[미술칼럼] 박정수의 뒷방 이야기-예술은 서바이벌이 아니다
[미술칼럼] 박정수의 뒷방 이야기-예술은 서바이벌이 아니다
  • 박정수 미술평론가
  • 승인 2011.12.07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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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리 났다. 이건 난리도 아니다. 생난리다. 텔레비전만 켜면 온통 서바이벌이다. 말 그대로 생존게임이다.

각 방송사마다 비슷한 색깔과 비슷한 형태로 경쟁을 부추킨다. 실력도 대단하다. 누구하나 부족한 이 없다. 온갖 멘토가 나오고, 온갖 천재들이 출연한다. 너무나 많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존재하다보니 거기에 대한 변별력도 없다. 그러다보니 실력에 맞춰 또 다른 경쟁력이 필요하다. 어려운 환경과 힘든 역경을 딛고 자리에 섰음이 강조된다. 처음에는 어려운 환경과 고된 삶이 실력의 부속역할이었는데 이제는 인간승리가 주전이 된 느낌이다. 주객전도(主客顚倒)다.

서바이벌에 출연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비슷하다. 어려운 환경이기 때문에 ‘효도’해야 하고 힘든 역경이기 때문에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울먹인다. 누가 더 힘들고 어려운 환경을 딛고 그 자리에 있는가에 대한 경합이다. 누가 더 시청자의 감정을 자극하는 환경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생존 게임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수많은 프로그램들은 개인의 자질과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여 한국을 빛낼 우수한 인재를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를 텔레비전 수상기 앞으로 앉혀 더 많은 광고 수익을 올리는데 목적이 있다. 아이들이 출연하여 어른들의 노래를 부르고 어른의 입맛을 자극하는 춤을 춘다. 어느새 아이들의 개성은 사라지고 돈 될 수 있는(?) 아이와 그저 실력 있는 아이를 구분할 뿐이다.

몇 해 전 방송 드라마에서 원빈이 송해교에게 소리를 질렀다.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니?”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가 세상을 횡횡한다. 식상한 스타 발굴 서바이벌에도 그러할 것이고, 검사나 변호사도 그러할 것이고, 수십 년 변함없는 정치 서바이벌에도 그러하다.
미술계에는 서바이벌이 아니라 경합이 많다. 소위 말하는 비리 많은 공모전이 그러하고, 경쟁력 있는 아트페어나 전시행위가 그러하다. 판매량에 따른 경합이며, 상장에 대한 집착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인사동을 지나는 화가님들 등만 치면 누구다 다 금상이고 대상이고, 입선이다. 이 역시 텔레비전 서바이벌 같이 너무나 식상하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공모전은 심사위원님들의 제자님께 돌아가고, 조금 명성 있는 공모전에는 적당한 타협이 존재한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원빈의 목소리조차 식상해진지 오래다. 오히려 손바닥 지문이 다 닳아 없어질 즈음 부장이 된다는 속설이나, 명절 때 방문하는 집의 문을 발로 열어야 문을 열어 준다거나하는 속된말로 ‘짜웅’이 더 깨끗해 보일 지경이다.

2011년도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다. 창의와 미래를 생각하는 문화예술에 더 이상 식상함이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2012년 달력엔 여전히 식상한 그림들이 많다. 미술작품이 유행과 시류에 따르다보니 너무 식상하다. 어디를 봐도 어디서 본 듯한 이미지들이다. 미술은 유행을 탈지 모르지만 미술작품은 돈을 타고 다니는 현실이 되었다. 패션경향의 유행처럼 미술경향도 돌고 돈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세상에 창작은 다 죽었다고 소리친다. 최소한 예술 활동이 돈과 관련된 서바이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누구 그림은 이번 게임에 졌으므로 사라져야 합니다.’ ‘이 그림 사면 돈 됩니까?’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