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칼럼] 박정수의 뒷방이야기 - 화가가 사는 세상
[미술칼럼] 박정수의 뒷방이야기 - 화가가 사는 세상
  •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 승인 2012.04.25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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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정수화랑 대표

빛의 무게를 생각해 본 일 있는가. 있다면 무게는 얼마나 될까. 누군가를 기다려 본 일 있는가. 가벼운 약속과 몹시 사랑하는 이의 기약 없는 약속의 무게는 분명히 다르다. 이를 측정한다면 얼마나 될까.

1901년 미국의 맥두걸이라는 의사는 임종 직전과 임종직후의 무게를 재었더니 21그램이라 발표한 적 있다. 그것이 영혼의 무게라 하였다. 무게를 가진 사람도 무중력 상태에 가면 무게를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보면 무게는 분명 중력과 관계가 있다. 마찬가지로 빛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무게를 측정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중력의 영향을 받을 짬도 없이 빠른 속도로 지나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소리는 무게가 있을까. 소리는 진동에 의한 전달이다. 진동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에너지란 물리적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일을 한다는 것은 에너지의 소비가 필수 이며, 에너지가 소비된다는 것은 양을 지니고 있음이다. 이런 결론이라면 양은 물리적으로 무게를 지녀야 한다. 물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화가의 작품에는 어떤 경우에든 무게를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화가의 그림에는 빛이나 소리의 무게뿐만 아니라 기다림의 무게, 인생의 무게, 시간의 무게도 측정 가능하다. 인생의 무게를 측정함에 다양한 방법이 사용된다. 전시장에 저울을 가져다 놓는 식은 어린아이 장난과 같다. 상상할 수 없었던 기발한 방법으로 ‘당신이 지닌 인생의 무게는 몇 그램(혹은 톤)입니다’라고 보여준다. 개인적 편차에 따라 다름을 인정하는 범위에서 누구든지 느낄 수 있는 무게를 제공한다. 그래서 화가가 보는 세상은 보통사람이 보는 세상보다 훨씬 넓다.

매일 아침에 보는 신문의 그림은 점들의 집합이다. 작은 점들이 모여 글씨를 만들고 작은 점들이 모여 사람의 모습을 만든다. 신문에 나온 칼라사진도 알고 보면 네가지 색으로 만들어진 조합일 뿐이다. 네 가지 색으로 총 천연색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 화가는 또다른 눈으로 바라본다. 불과 네 가지 색으로 만들어진 인물(4도 인쇄물에 한함)을 보고 잘생겼다 못생겼다 평가한다.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그래서 리히텐슈타인이라는 화가는 ‘이보쇼들, 당신들이 보는 인쇄매체(특히 만화)는 네 가지색으로 만들어진 별거 아닌 것이요.’라고 하면서 만화 이미지를 크게 확대해서 인쇄망점을 보여준다.

몇 해 전 삼성에서 떠들썩하였던 <행복한 눈물>이라는 그림을 기억하실 것이다. 점으로 찍혀진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라는 작품은 대단히 유명하다. 작가를 안다거나 작품을 이해하는 것보다 삼성에서 소유한 수십억 원대의 작품이라는 것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이렇게 유명한 <행복한 눈물>이 바로 인쇄매체에 좌우되는 군중심리와 정치적 편향을 꼬집은 작품이다. 잡지의 작은 그림을 확대해서보면 점으로 만들어진 인쇄물일 뿐임을 리히텐슈타인이라는 화가가 직접화법으로 표현하였다.

현대인은 인쇄매체의 망점과 인터넷의 픽셀에 의해 감정과 정보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인터넷의 정보역시 가볍지만은 않다. 여기에 화가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본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무게를 재거나, 가치를 측정한다. 옳음과 그름을 판단하기 보다는 의문을 제시하는 경우가 더 많다. 때로는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으로, 때로는 지극히 보편적인 입장으로 바라본다.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혹, 어떤 이가 자신을 그려준다고 한다면 반드시 그림을 받자. 닮지 않았다고 잘 못 그렸다 말하면 곤란하다. 그가 보는 세상은 우리의 세상과 다르기 때문이다. 틀림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