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미술이야기] 미술가가 그리는 법
[박정수의 미술이야기] 미술가가 그리는 법
  •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 승인 2012.12.2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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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타잔이 나오는 시간이면 거리가 한산 했다. 어린아이와 청소년들은 19인치 흑백텔레비전 앞에 진을 쳤다. 주인집 아들은 가장 앞자리에서 눕거나 엎드려 거드름 피웠다.

타잔과 제인의 연애담에 가슴조려하고, 치타의 뒤집은 입술과 재주넘기에 흥분했었다. 흑백텔레비전 이었지만 거기에는 이미 총 천연색이 있었다. 텔레비전이 귀하던 시절, 주말의 타잔이나 김일의 레슬링과 <여로>는 주인장이 시청을 쉽게 허락하였지만 평일에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나레이터의 목소리와 특수효과에 의한 바람소리 계곡소리 물소리에 따라 청취자들은 자신만의 계곡과 자신이 살고 있는 동내의 풍경을 연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총천연색 텔레비전이 나오더니 이제는 사람이 상상하는 모든 것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해리포터라는 영화에 환상과 마술을 현실화 시키더니, 반지의 제왕과 아바타를 보여주면서 상상의 모든 것을 시각화 했다. 예술이라는 것이 인간의 상상이나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것을 시각화 하는 것인데, 예술의 재료들이 예술처럼 미술가를 현혹한다.

라디오 시절에 미술가는 표현주의와 아방가르드와 같이 인간의 감정과 삶의 새로운 가치를 찾았다. 흑백텔레비전 시절에는 색면추상이나 팝을 통해 색의 의미와 다변성을 추구했고, 칼라텔리비전 시절에는 미니멀과 앵포르맬이라는 이름으로 현실과 사물과 색을 단순화하고 평면화 하였다.

보통사람이 총천연색 이미지를 다루기 시작하는 비디오와 디지털 카메라가 활성화되는 시점에서는 플럭서스와 모노하(物波)와 같은 정신운동으로 사유의 원리를 찾고자 노력했다. 그러던 오늘, 컴퓨터그래픽과 가상공간이 자리하는 현시점에서 미술은 무엇을 해야할지 방황하고 있다. 미술가가 그리는 법을 상실했다.

어떤 미술가는 정신으로 그림을 그린다. 자신이 응원하던 대통령 후보가 떨어져서 정신이 혼미하고, 당선되어서 정신없다. 온 세상의 고민을 혼자 다 짊어지고 정신으로 그림을 그린다. 고민이 많기 때문에 몸으로 그림 그릴 시간이 없다.

이들은 많은 사람들과 만난다. 만나면 정신으로 그린 그림을 설명하기 바쁘다. 상대가 아무리 관심을 두지 않아도 큰 목소리와 우격다짐으로 그렇게 한다. 그러지 말라고 하면 싸운다. 술이 미쳤다. 어떤 미술가는 눈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들은 들로 산으로 스케치 여행을 다닌다.

눈으로 보고 눈에 들어찬 광경을 그리면서 화폭에는 다른 그림이 나온다. 감성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장 스케치가 최고라 생각하는 이들은 혼자서는 잘 안다닌다.

손은 눈으로 그리는 것에 대한 따라쟁이다. 다니지 않을 때는 바구니에 과일을 담거나 도자기 화병을 식탁에 두고 눈으로 그린다. 이들은 무척 바쁘다. 어떤 미술가는 손으로 그림을 그린다. 정신을 표현한다고 하면서 어떤 정신인지는 스스로 도 모른다. 우주의 기(氣)나 세상 흐름의 원리를 좇는다. 어떤 경우는 기(氣)가 있기 때문에 아픈 사람이 낫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대단히 많은 시간을 붓질로 보냈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필력이 대단하다. 붓이 지나간 자리에 바람이 불 정도다.

어느 전시장에 가면 말로 그림을 그리는 이들을 만난다. 미술작품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말로 그리는 그림은 언제나 이웃아줌마와 옆집 아저씨와 참 친하게 지낸다. 그림 그리는 시간보다 사람들하고 만나는 시간이 더 많다. 금방 그릴 그림도 무진장 오랫동안 그린 척 한다. 말로 그리는 이들은 대체로 예쁘거나 잘생겼다.

미술가가 그리는 법은 다양하다. 어찌 되었거나 세상이 혼탁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무엇인가를 그려내어야 하는 시기다. 창의적이고 신선한 그 무엇을 찾아 오늘도 미술가는 무엇인가를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