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뒷방이야기] 개성의 시대, 그러나 예술은 서바이벌이 아니다.
[박정수의 뒷방이야기] 개성의 시대, 그러나 예술은 서바이벌이 아니다.
  •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 승인 2013.02.01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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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과거에는 중간만 가라고 했다. 튀지 말라고 했다. 줄을 잘 서라고 했다. 그런데 요즘 와서는 개성의 시대라고 튀기를 원한다. 서바이벌을 방불케 하는 미술계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제켜야만 자신이 사는 줄 안다. 이미 주어진 상태를 차지하는 것이나,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만 가능한 일이다. 예술은 서바이벌이 아니다. 그럼에도 어떤 캐릭터나 특정의 이미지를 차지하기위해 내가 먼저, 혹은 누구도 하지 않았던 무엇을 열심히 찾는다. 독특한 자기만의 색깔 찾기에 골몰한다. 특히, 미술가나 예술계통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강조한다. 개성은 특정의 상징이 아님에도 말이다. 개성이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철학이 없다는 말이다. 예술은 정신활동이다. 정신활동에 정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것에 목적을 가진다. 주변에서 개성강한 인물을 발견해 보자. 그는 독특하다. 가끔 이상하기도 하지만 딱히 주장하는 바도 없다. 친구도 많다. 개성은 튀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다. 개성은 반박보다 수용 이다.

수 해 전 아트페어나 그룹 전시에는 과일과 꽃, 곡물과 같은 과수원과 꽃밭이 진을 치더니 몇 해 전에는 만화 주인공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지금은 변화의 서로들 개성을 찾느라 야단이다. 시대의 통합이라고 하지만 예술은 통합되어서는 곤란하다. 개성을 강조하는 때임에도 미술작품에는 개성이 잘 발견되지 않는다. 시대통합과 화합의 시대이기 때문인가 보다. 그래서 여기저기 비슷한 의미가 표현되나 보다. 어떤 그룹 전시에 가면 개인전 인줄 착각도 한다. 작품들이 거기서 거기다.

character는 기질이나 성질, 혹은 특질의 것이다. 캐릭터를 개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개성(個性, Individuality)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이나 어떤 사물이 다른 기타의 것들과 구별되는 '내적' 특질을 말한다. 주관이나 자아발견이라는 말과 비슷하게 쓰이는 용어다.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을 말한다. 미술작품에 있어서 개성이라고 하는 것은 형식보다는 의미에 대한 접근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물론, 내용이 형식에 의해 드러나기 때문에 형식에 의해 개성의 특성이 발현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다보니 일부에서는 자신의 내적 본질에 의한 형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을 먼저 고수하는 경향이 있다.

동대문이나 을지로 청계천 등지에서 발견한 기기묘묘한 기구를 활용하여 작품을 한다거나, 우연히 발견한 밧줄이나 철 조각을 미술작품에 쓴다. 어떤 무엇을 표현하기 위한 사물을 수용하기 보다는 다르게 보이는 사물을 수용한 이후에 자신의 의미를 담기도 한다. 이것은 주객전도다. 미술작품에서 형식과 내용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하는 문제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다르게 칠하고 다르게 만들고, 다르게 붙인 후에 나의 개성과 특성을 담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냥 우기는 일과 같다. 

개성은 정체성(正體性)과 관련되어 있다. 가끔 미술가들이 잘난 채 할 때 쓰는 아이덴티티(identity)의 부속물이다. 어떤 존재의 본질 찾기다. 강을 그리다가 계곡을 그린다고 미술가의 개성이 달라지지 않는다. 유화물감을 쓰다가 아크릴 물감으로 바뀐다고 그 미술가의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손쉬운 방법이 구상을 하다 비구상을 하는 일이다. 알맹이도 없이 그저 형식만 바뀌었을 뿐이다. 비구상을 하다가 설치를 한다. 그저 평면에서 입체로 바뀌었을 뿐이다.

예술은 서바이벌이 아니다. 누구는 죽이고 누구를 끄집어 내리는 경쟁사회가 아니다. 예술에서 경쟁상대는 자기 자신이며, 시장과 맞대응 할 수 있는 끊임없는 자기 개발이다. 그것이 자신 없다면 무리를 지어라. 아프리카 세렝게티 공원에는 하이에나와 임팔라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