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미술시장이야기] 파프리카를 개량 고추라 우기기
[박정수의 미술시장이야기] 파프리카를 개량 고추라 우기기
  •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 승인 2013.08.1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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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선친께서는 파프리카를 개량 고추라 우겨서 군청에서 주는 상을 받았다고 한다. 근 50년 전 이야기다. 선친께 전해들은 무용담이기 때문에 거짓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사실일 수 있다는 근거를 어머님께 들어본 적 있다. 선친께서 어디에서 전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고추가 여러해살이 채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가을, 고추가 다 영글기 전에 새로 자란 가지 일부를 잘라 비닐 하우스에 꺾꽂이를 하셨단다. 한겨울이 되기 전에 뿌리가 내리고 새 잎이 자라더니 엄동설한에 다 죽어 버렸다고 했다. 지원받은 돈 다 쓰고 탈날까 싶어 야반도주 하더니 새봄이 되어 고추씨를 어디서 가져와서 파종을 하셨단다. 여름이 지나 굵고 튼실한 열매를 개량 고추라 우겼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다.

요즘 미술계는 파프리카가 많다. 70년대 이후에 등장한 추상미술의 형식과 일제식민시대에 태어나 발군의 실력으로 형식을 갈고 닦은 이들의 현대판 대결과 흡사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별종이 10여년 휩쓸더니 지금은 완전한 사막이다. 고전 서부영화에 나오는 말라빠진 잡초가 바람에 굴러다니 듯 휑하기 그지없다.

 

동네아줌마 곗돈 타서 그림 투자하던 2007년 이후 몇 년 동안은 영원한 호황이라 믿었다. 2008년에는 아시아프(ASYAAF·Asian Students and Young artist art festival)라는 아이돌 그룹이 등장하여 100만원 200만원에 그림이 무진장 팔리기도 했다. 곗돈 투자는 2년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 100만원이 150만원 500만원 될 줄 믿었다. 다 떠나갔다. 떠난 것이 아니라 그저 관망만 할 뿐이다. 판매수수료가 없다보니 판매량을 가늠할 길 없다. 딱지만 붙이면 다 팔린 것으로 안다. 작가에게 요구하는 입금확인증을 믿어볼 뿐이다. 여기에 덧붙여 5-6년을 종횡무진 활약하던 팝아트가 하향세다. 팝아트가 불길을 일으키기 이전에는 구상미술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수십년을 장악했었 중원천하다. 그 자리에 팝아트가 자리를 꿰차고 앉았을 뿐이다. 도(道)를 통하기 위해 2-3년 산속에 은거하여 완성된 작품들, 예쁘고 아름다운 꽃들과 수려한 풍광을 재현하던 품격 높은 미술품의 자리였을 뿐이다.  

만화주인공만 그리면 되고, 등장인물이나 이미지가 평면적이면 되고, 그냥 그러한 캐릭터만 만들면 다 팝이라고 했다. 무엇인가(특히 만화주인공이나 유명 배우나 스타 정치인)를 비슷하게 그리고 모방하고 패러디(parody-패러디는 모방과 다르다. 패러디에는 해학이 있어야 한다.)하면 팝인 줄 안다. 이것도 모자라서 예술가가 예인이 되고 있다.

예술가는 예인이 아니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에 전지전능성을 발휘하여 생명을 주는 이들이다. 예인은 예술가가 만들어 놓은 생명에 자신을 대입시키는 일을 한다. 예인을 폄훼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예술가가 예인이 되어 예술가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할 뿐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개성과 가치를 창출한다. 예인은 주어진 배역에 가치와 개성을 이입한다. 미술가로서 작품을 제작하여 작품의 가치를 확보하는 일보다는 자신을 알리기에 더 열심이다. 그들 몸 자체가 예술작품으로 활동하거나 몸짓으로 예술을 이야기 한다면 누구나 용인할 수 있다. 예인으로 살 것인지 예술가로 살 것인지를 정해야 할 때다. 예술가는 자신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낸 작품을 판다.

구상미술이나 팝아트 전체를 싸잡는 것 절대 아니다. 품격 있고 신(神)발 높은 미술가들은 미술시장에 잘 안 나온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작품보다 미술가가 먼저인 이곳에는 엄동설한이 오기 전 비닐하우스에서 뿌리내리던 꺾꽂이 고추 모종과 흡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