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미술시장 이야기] 경험치도 통계다. 10년 주기설을 믿자.
[박정수의 미술시장 이야기] 경험치도 통계다. 10년 주기설을 믿자.
  •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 승인 2013.10.11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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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미술시장의 10년 주기설을 믿는 이들도 많다. 2008년 이후 미술시장 하락이후 2010년을 정점으로 회복되리라는 미술시장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정확한 통계치나 그래프도 없으면서 10년 주기설이 힘을 받는 것은 미술시장에 살고 있는 이들의 경험치에 의한 통계가 어느정도 들어맞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간혹, 미술시장은 경기불황에 의한 여파라거나 부동산 시장의 위축이라는 말도 있다. 그것도 그럴 것이 1980 광주항전 이후 부동산은 폭등에 폭등을 거듭한다. 1983년 부동산투기 억제대책이 시행되면서 소위 말하는 복부인들이 언론에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묶여있던 돈들이 골동시장에 몰리기 시작하는 것이 1985년경이다.

이때를 즈음으로 미술시장을 장악하던 ‘국전’이 관전에서 민전으로 바뀐다. 복부인들의 골동에 대한 관심은 70년대부터 이어져 왔지만 이때는 미술품에 대한 정보부족으로 국전출신의 미술가가 미술품 투기의 가늠자가 되었다.

미술시장 10년 주기설을 위한 억지일수도 있다. 하지만 경험치에 의한 유사성을 부인할 수만은 없다. 1990년의 닷컴 시장을 기억하는가. 엄청난 금액의 자금이 온라인 시장으로 유입되었다가 닷컴 시장이 하락하는 시점이 1993년경이다. 다시 말하면 1985년의 시장자금은 부동산에 묶인 돈이며, 1995년 이후의 미술시장자금은 벤처사업에 유입되었던 금액이라는 경험치다. 1995년 이후 ‘한집 한 그림 걸기’ 운동이나 ‘김과장 전시장 가는 날’과 같은 테마로 전시장에 그림 걸기 바쁘게 팔려나간 정점이 1997년이다.

재미난 사실은 1982년 세기의 어음사기 사건이라는 장영자, 이철희 부부사건이 터지면서 상당량의 금액을 서화, 골동품을 비롯한 미술품 구입에 사용했다는 것이 언론을 통해 밝혀진다. 이것은 1993년 삼성가의 로이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사건과 유사하다. 여기에 하나를 2013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인 전재국의 600여점 미술품 사건을 덧붙여 본다.

2000년에 접어들면서 부동산 시장은 엄청난 차액과 투기가 과열된다. 1990년대의 벤처버블이 꺼지면서 부동산 시장에 쏠리는 탓도 있지만 금융위기에 따른 새로운 투자처를 찾기 때문이었다. 2003년 참여정부의 부동산 대책이 발표되면서 부동산 유동자금이 또다시 묶이는 상황을 초래한다. 그것이 미술시장을 촉발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미술품은 돈이 많다고 구매하는 품목이 아니다. 창의적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필수적이 요소이다. 여기서는 미술시장이 활성화 될 시점의 주변 상황을 이야기 할 뿐이다. 

미술시장의 변화도 급격했다. 골동품 매입으로 재미 본 미술시장에 ‘대한민국 미술전람회’라는 꼬리표에 관심을 집중한다. 골동에서 국전작가로 국전작가에서 2005년에 이르면 브랜드작가에 집중하는 현상을 보인다. 1995년경의 가장 비싼 화가가 이중섭이었다가 2005년에 이르면 박수근으로 역전된다. 미술시장의 유통을 위한 작품 수량이 주된 원인이었다. 한편으로 돈 되어있는 미술시장에서 돈 될 수 있는 미술시장으로의 전환도 슬며시 끼어드는 것이 2005년 이후의 미술시장이었다.

2013년 우리나라 미술시장의 가장 큰 ‘키아프’와 작가 개인의 미술시장인 ‘마니프’가 열렸다. 출품된 작품 도한 예년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소위 말하는 ‘팝아트’가 사그러지고 있다. 경험치에 의한 10년 주기설을 믿는다면 지금 2015년의 미술시장을 지금부터 준비하여야 한다. 어떤 미술품이 장악할 것이라는 것은 개인에 따라 달라야 한다. 그것은 문화의 다양성이다. 어찌되었거나 2015년의 미술시장을 위한 준비는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하여 오늘도 미술시장은 여전히 잘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