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미술시장이야기 _ 거짓과 진실
박정수의 미술시장이야기 _ 거짓과 진실
  •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 승인 2013.10.27 17: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누군가 누군가에게 거짓을 말할 때, 상대가 그 거짓말을 믿으면 상대에게 있어 그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

▲필자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다. 분명한 사실이다. 시간이 경과하여 그 거짓말이 거짓말로 밝혀졌을 때, 그 거짓말은 더 이상 거짓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거짓말이 없다. 타인에게 모멸감이나 경제적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거짓말을 잘 하면 성공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미디에서는 교묘한 거짓을 저질러도 죄를 묻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micro blog]와 [SNS]의 문제점들이다.

페이스북에 올려진 인물사진을 그대로 믿는 이 아무도 없다. 어쩌다 초대받은 고급 레스토랑의 음식을 올리면서 매일 다니는 척 한다. 가끔씩 방문하는 와인 바에서 즐거운 한때의 모습을 저장한다. 완전 치고 빠지기 작전이다. 스스로 믿지 않으면서도 아무런 간섭하지 않는다. 이러한 거짓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은 잘 돌아간다.

여기에 SNS에 인성을 담는다. 위로까지 받는다. 위로하는 이들도 그저 그러한 마음으로 위로한다. 잘 모르는 이들끼리의 거짓 위로 또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기계를 통해 정보를 입수하고, 기계를 통해 이미지를 획득한다. 모니터를 통한 세상이 현실의 세상보다 더 넓고 편리하다. 그것이 현실에 가깝다고 믿어 버린다. 완전 웃기는 세상이다.

몇 해 전의 [도토리 일촌 맺기]와 [I Love School]이 대박친 일이 있다. 지금의 온라인은 변화만 있을 뿐 익명의 관계는 더욱 넓어지는 것 같다. micro blog와 SNS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신의 좋은 부분만 공개하고, 자신에게 유익한 부분만 취득한다. 이러한 관계에는 거짓은 없다. 모두가 거짓이기 때문이다. 사실과 거짓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편리와 이익/불편과 손해>에서 비롯된다.

그러다 보니 예술의 정체가 없어져 가고 있다. 실물에 대한 직접적 관여와 침해와 판단이 필요한 부분인데 모니터로 대다수의 것들이 해소되고 만다. 예술작품까지 모니터로 소비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면서 예술의 범위는 넓어지고 종류 또한 다양해져 간다.

현재는 종이소설이 현재 불경기이기는 하지만 좋은 예술은 소장의 것과 만짐의 것이 있기 때문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모니터를 통한 소비는 <가지기에> 부족하거나 <쪽팔린> 것들이 잘 팔린다. 그것이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예술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거짓말을 믿는 이들에게는 거짓말이 없기 때문이다.

예술은 절대적으로 정신의 상층부에 있다. <자랑삼아> 가지거나 <폼 내기 위해> 혹은 <잘난 척 하기 위한> 예술을 손에 쥐고자 하는 일은 아니다. 모니터를 통한 예술품 또한 마찬가지다. 동창회라는 것도 나이가 대충 마흔이 넘어야 슬금슬금 나타난다. 서로의 이익과 서로의 관계설정을 위해 기왕이면 아는 사람끼리의 <협업>이 형성되는 일이다. 지나온 과거를 숨기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참석한다는 사실을 숨긴다. 어떤 친구에게 어떤 이익을 획득할 수 있을까를 살핀다. 그러기 때문에 거짓은 없다. 말하지 않으면 없다.

평평한 종이위에 석고 데생을 하면서 입체감을 살리라고 말한다. 빛의 흐름이 있어야 하고 원근이 있어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던 어느날 평평한 종이위에서 입체감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때부터는 거짓말이 아니라 그림 중독증에 걸린다. 심각한 ‘입체 중독증’이다. 그래서 미술대학에는 입체중독증 환자 투성이다. 여기에 보지 않고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일인 냥 미술작품으로 재현해 낸다.

가상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상(假想)의 예술이나 진상(眞想)의 예술이나 예술은 같다. 그것을 어떻게 소유하고 어떻게 소비시킬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접근이 필요한 시대다. 어쩌면 진실조차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