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미술시장이야기]팔리는 미술품이 좋은 예술품인가? 생각해 볼 문제다.
[박정수의 미술시장이야기]팔리는 미술품이 좋은 예술품인가? 생각해 볼 문제다.
  •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 승인 2014.01.12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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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자신의 작업실을 미술공장이라고 칭했던 앤디워홀의 일부작품은 1천억이 넘는다. 그는 미술상품을 생산해 내면서 사회를 공격하고 일침을 가했다.

포름알데히드(방부제)에 죽은 상어를 넣은 데미안허스트의 상어는 140억이 넘는다. 여기다 진짜 해골을 백금으로 주조한 뒤 다이아몬드를 촘촘하게 박아 940억 정도에 매매되었다. 말 그대로 팔기위한 목적으로 제작한 미술품이다.

팔기위한 목적으로 어떤 미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생산해 낸다는 것은 이미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지금이야 컴퓨터를 활용하여 프린트하거나 프린트 한 이미지 위해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작품을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십 수년 전만 하더라도 어떤 미술가가 슬라이드 환등기를 활용해 사물의 외관을 스케치 한다는 것은 밝힐 수 없는 사실로 취급되기도 하였다.

미술작품은 손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계를 활용하는 것은 어떤 비겁한(?)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현대미술은 보는 것, 느끼는 것을 포함한 장식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기에다. 돈되는 것까지 포함하여 매매된다. 디지털프린트가 상용화되고, 이미지에 대한 정신성만 내포된다면 표현 방식은 상관없는 시대가 되었다.

새해 벽두부터 ‘팔리는 것이 좋은 예술이냐?’는 질문이 생경스럽긴 하지만 별스러운 문제는 아니다. 지금부터 생각해봐야할 문제가 여기에 있다. ‘팔리는 것’에 다소 어색하게 반응하는 예술가라 할지라도 ‘팔리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속내는 꼭 있다. 못 팔아서 환장이다. 안 팔리기 때문에, 팔 자신이 없기 때문에, 사주지 않기 때문에 ‘팔리는 작품이 좋은 예술일 수 있다’는 명제에 과민반응 보이는 것 아닌지 모를 일이다.

여기서 팔린다는 것은 유통의 문제와 관련 지워진다. 어떤 작품이 자신의 가치를 가지고 개인에서 화랑으로 화랑에서 개인으로 유통된다는 것은 이미 유형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단순히 한두 점 팔려서 누구의 집에 영구 소장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미술계를 바라보는 일반인의 입장에는 가난하고, 굶주리면서도 고뇌에 찬 어떤 특별한 것을 만들어내는 존재로 인식되어 있기도 하다. 돈과 관련된 어떤 행위를 하면 예술가로서 <타락>하였다거나 현실과 타협하는 얍삽한 ‘쟁이’로 왕따 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1980년 이후가 되면서 많은 것의 변화를 가져온다. 물론, 외국의 경우에는 자본주의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사고 판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그것을 어떤 문제꺼리로 삼을 이유조차도 없다.

모든 것은 차치하고, 그렇다면 예술작품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이것은 예술 혹은 예술작품이라고 이해되는 미술품과 상품으로 이해되는 미술품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다. 여기에 자본주의라는 기본 구조가 관여되면서 예술인 것과 예술이 아닌 것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있다.

‘예술가는 가난하다’는 우리나라 예술계의 일반적 개념을 극복하기 시작한 것이 불과 20여년에 불과하다. 말로는 그렇게 하면서도 예술가 스스로의 속내는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철학과 관련되어 있으며, 어떤 무형의 정신적 가치를 강조하고 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다.

2014 갑오(甲午)년 새해가 밝았다. 갑(甲)은 십간의 첫 번째이면서 활기와 생동을 의미하는 청색이기도 하다. 활기자고 생동감 넘치는 한해를 맞으면서 올해는 모든 미술가들의 미술작품이 잘 팔리는 한해가 되길 희망해 본다. 고고한 미술가인척 해도 팔려야 먹고 살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