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미술시장이야기]삼각지 그림_무시하지 말자.
[박정수의 미술시장이야기]삼각지 그림_무시하지 말자.
  • 박정수 미술평론가/ 정수화랑 대표
  • 승인 2015.08.21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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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수 미술평론가/ 정수화랑 대표

미술가들은 곧 잘 삼각지 그림과 자신의 그림을 비교하곤 한다. 삼각지 그림을 싸고 볼품없는 것, 갤러리 전시장이나 미술관에 있는 그림은 수준 높고 품위 있는 것으로 이해하려 든다. 이것은 문제가 아니라 좋고 나쁨으로 평가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

못 그린 그림의 표본으로 사용되기도 하는 삼각지 그림이란 말 그대로 삼각지 등지에서 그려진 그림을 칭한다. 삼각지 그림의 유래와 역사는 50년이 훌쩍 넘어간다. 한국동란이 끝나고 이태원 등지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우리나라 화가의 솜씨 좋은 초상화에 반하게 되고, 여기에 미술품을 제공하는 화실이 임대료가 싼 삼각지 등지에 자리하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70년대에는 외국에 수출하는 미술품 회사가 삼각지에 주둔하면서 물량을 수급하지 못하여 미술대학을 졸업한 이들에게 의뢰하기도 하였다. 현재, 70세가 넘은 서양화가 중에는 삼각지 수출용 그림을 그리면서 생활한 이들이 여럿 있다. 환율이 오르면서 미술품 가격이 높아지면서 수출용 미술품 시장은 베트남이나 중국 등지로 옮겨간 지 오래다.

삼각지 그림이 이발소 그림이나, 싸구려 그림으로 통칭되는 것은 소비자의 기호에 맞추는 주문자 생산방식도 있지만 제작원가를 낮추기 위하여 페인트나 값싼 안료를 사용하여 그렸음도 작용한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작품이 삼각지 그림으로 취급당할 수 있음을 상기하자. 사실 따지고 보면 쉽게 말하는 삼각지 그림보다 작품 제작기술 수준이 떨어지는 미술품 또한 상당량이다. 미술대를 졸업하고 제도권 안에서 작품활동 한다고 해서 삼각지 그림을 폄훼하거나 비난해서는 곤란하다.

이것은 예술작품의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 예술활동의 다름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주문제작하면 예술수준이 떨어지고 스스로 그려서 판매하면 수준이 높다는 공식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대중의 기호에 맞추면 덜 좋은 예술이라는 것은 누구에게서 비롯된 명제인가.

누군가 10호 한 점에 500만원 줄터이니 원하는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면 이를 거부할 수 있는 용기 있는 미술가 몇이나 될까? 500만원을 거부한다면 5천만원이라면 어떠할까. 결국 값에 의해 예술작품의 수준으로 구분될 뿐이지 않겠는가.

이즈음에서 다시 한 번 상기하자. 예술작품은 가격의 문제가 아니다. 가치에 대한 다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술작품의 수준을 누가 결정짓기는 곤란한 문제다. 다만, 현재 우리사회가 끝없는 자본의 권력에 휘둘리기 때문에 비싸면 좋은 작품이라는 등식이 인정(?)되기도 할 뿐이다. 삼각지 그림이 수준 낮다고? 그럴 일 절대 없다. 다름에 대한 이해도 부족일 뿐이다.

여타의 문학작품이나 논문에는 자기표절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가 쓴 원고나 발표문이지만 다른 내용의 글을 작성할 때 출처를 밝히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미술에도 자기표절이라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 수용된다면 수많은 작품들이 자기표절이 되고만다. 삼각지 그림이 주문자나 대중의 기호에 맞추는 것이라 했다. 여기에 빗대어 작가 스스로가 스스로의 기호에 맞는 작품을 제작하는 것 또한 ‘자기주문’ 제작이라고 한다면 너무 억지일까?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세계 최고임을 스스로 믿어야 한다. 자신의 작품이 세계최고이어야만 하는 것은 작품 활동의 원동력임과 동시에 더 나은 발전을 위한 자기 변론이며 자기 보호색이다. 예술창작은 어디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 정치나 이념에 의해 예술이 구속당하고 옳고 그름의 잣대가 만들어진다면 창작의 다양성은 그만큼 협소해지고 만다.

삼각지 그림이라는 것을 가지고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것보다는 자신의 견해와 입장을 가지고 다양성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아줌마 작가, 문화센터 출신, 교육원 출신 등으로 예술작품을 평가해서도 안 된다. 다양성과 다름을 인정할 때 자신의 영역 또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또 상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