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미술시장 이야기]예술은 어디에 있는가?
[박정수의 미술시장 이야기]예술은 어디에 있는가?
  •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 승인 2016.04.05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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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갈수록 험악해 지는 예술폭력은 감상자로 하여금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에서 알려주는 미술품의 가격은 몇 천만 원에서 몇 억이고, 가진 자들의 재산 축적이나 비리의 온상으로 비쳐준다. 이곳에서 알려주는 미술품의 모양은 일반인으로선 도저히 알 수 없는 기기묘묘한 형상의 추상화이거나 대충 그려진 풍경화가 대부분이다.

이것이 왜 비싼지 그것이 어떤 그림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일언의 말도 없다. 그냥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서민들에게는 이미지 폭력이고 넘볼 수 없는 성지다. 돈이면 다 된다는 자본주의 근본속성에 여타의 정신적 무장이 사라진 탓 일게다.

뿐만 아니다. 예술인의 성지며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던 인사동에는 예술가 보다는 거지가 더 많이 기거한다. 이들은 길가는 이들을 가로막기도 하고 애처롭게 바라봐 주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구걸하는 방법도 참으로 다양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부나 한결같은 삑싸리 왕자 바이올린 외국인 아저씨, 천원이면 배고픈 아프리카 난민 하루 식량이라고 고함치는 여고생, 독도는 어느 나라 땅이냐고 지나는 외국인에게 스티커 붙여달라고 떼쓰는 중학생들,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스피커 매고 인사동을 왕복하는 키 작은 아저씨 등등의 구걸쟁이들이 인사동에 산다.

인사동에는 공연거지, 종교거지, 서명거지를 비롯한 국적 불문, 남녀노소를 불문한 이들의 활약상이 대단하다. 인사동에 필요한 거지는 배고픈 거지가 아니라 머리가 고프고 생각이 고픈 이들이다. 새로운 생각은 언제나 어색하고 불편하다.

예술은 없고 예술가만 있다. 미술작품 또한 기술적 축적으로 그리거나 기술이 전혀 배재되었음에도 기(氣)나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그려지는(사실은 그려지는 것인지 잘 모를 정도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추상화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설득력이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초 자연적 마술의 영역이거나 사회에 대한 불만이나 사회 참여적 예술이 거의 사라져 간 듯하다. 간혹 미술관이나 대형 갤러리에서 이들의 작품을 확인되긴 하지만 언론과 돈에 의해 감히 넘볼 수 없는 정신 폭력집단의 가족잔치처럼 느껴질 뿐이다.

보통사람의 눈에 잘 그린다는 시골 풍경이나 예쁜 꽃들은 현대예술이라는 불합리에 대한 희생양으로 ‘못’그리는 그림 혹은 ‘예술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치부되고 말았다. 이러한 작품들이 기술성이 강화된 부분이라 할지라도 예술에 있어서 기술은 작품완성에 대한 중립의 영역이기 누구도 이를 평가하거나 잘잘못을 따질 이유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좋은(?)미술품이 비싼 미술품이 된다는 등식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이를 위한 기초적 생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예술이 대중화 될 리 만무하지만- 예술이 대중화 된다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문화이기 때문에 다른 입장에서 접근하여야 한다 -대중 속에서 예술은 여전히 과거와 같은 교육과 정서적 측면에서 정의되어야 한다.

사물 묘사의 기술적 측면이 강조된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 경중(輕重)을 따지거나 예술에 대한 순위를 따져서는 곤란하다. 예술작품에 대한 가치(價値)는 예술작품이 지나고 있는 쓸모를 이야기 하거나 인간사회에서 상호 관련성을 지니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다만 자본주의 속성에서 말하는 값어치에 따라 예술의 중요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사회에서 통용될 뿐이다.

예술작품이 ‘돈’에 의해 이해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예술 자체는 돈이나 사회적 계급에 의해 결정되어서는 곤란하다.

인사동에 필요한 거지는 예술에 대해 배고픈 젊은 예술가의 정신이며, 자본주의 시장이 아무리 강화된다 할지라도 예술작품의 돈(錢)기능이 아니라 예술을 창작해 낼 수 있는 다양한 양식(樣式)과 풍부한 정신세계가 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