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미술시장 이야기] 큐레이터의 길
[박정수의 미술시장 이야기] 큐레이터의 길
  •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 승인 2017.09.27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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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미술계에는 다양한 이름의 직업들이 있다. 큐레이터, 학예사, 딜러, 매니저, 갤러리스트 등으로 불리지만 하는 일은 그리 다르지 않다.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보는 미술관에 학예사 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려 든다. 국민의 세금이지만 국민을 위한 전시보다는 자신들의 이상을 좇아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관을 미술관 공간에 풀어낸다.  

수년전부터 각광받는 직업중의 하나가 큐레이터였지만 지금은 그리 관심을 두지 않는다. 돈이 안 된다는 말이다. 큐레이터라는 직종의 위기가 왔다. 그렇게 각광받던 직업에 제동이 아무나 큐레이터였고 누구나 큐레이터였다. 화랑이건 미술관이건 “미술”과 관련 있으면 큐레이터였다.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누군가 왜 그렇게 하느냐고 따지고 물어도 소용없다. 작은 화랑에서 심부름을 하건, 큰 화랑에서 미술품을 팔건, 대안공간에서 기획을 만들건 상관없다. 큐레이터에 대한 자긍심이 존재하지 않는 미술계이기 때문에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미술관은 시민을 위한 전시자체가 미래형이어야 한다. 지금 시민에게 무엇인가를 제공한다는 것은 예술이라기보다는 문화에 가깝다. 미술관이 문화와 예술을 주도하여야 하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에 미술관에서는 관장의 역할에 의해 돈의 쓰임새가 결정된다. 학예사들의 전시기획은 무시되기 일반이다. 3년에서 5년 단위의 계약직 관장은 미술계의 저명인사로서 작품 활동을 하는 정치 미술가인 경우가 많았다. 사회적 담론이나 역사적 개념보다 월급이 많은 명예직으로서 역할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미술계의 존재로서 소명의식만 있다. 미술관 소속 학예사 또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매년 수천의 미술대 졸업생들이 미술계에 등장한다. 이들 중에서 십수년 후에도 미술계에 남아있는 이들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큐레이터 또한 마찬가지다. 관련학과를 전공하였거나 아니거나 상관없이 지금 시작하는 이들 중에 20년 후에도 여전히 같은 일에 종사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직업에 대한 자긍심과 문화예술에 대한 소명의식으로 지금을 살고 있는 이들도 많다. 이들은 전시기획자로 불리는 시절도 있었고 큐레이터라는 명함을 십수년 들고 다닌 기억도 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지난 시간에 대한 기록과 살아온 시간만큼의 무게가 어깨에 실린 탓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전시기획을 잘 하지 않는다. 해봐야 별거 없지만 한다고 해도 그다지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직업군으로서 큐레이터는 사회적 책임과 지금의 미래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능력 있는 큐레이터는 지금의 일이 아니라 지난 시간에 대한 결과를 가진 이들이다.  

지금 현재 미술계에는 필요한 직종이 많다. 딜러, 매니저, 아트텔러, 컨설던터 등도 있다. 미술을 학문으로 연구하는 이들이 있다면 미술시장의 현장에 종사하는 이들도 있다. 전시기획을 자신이 천명이라 믿는 젊은 지식인들의 서툰 경험을 인정하여야 한다. 과거의 성공과 실패를 지니고 있는 이들의 정신이 곧 큐레이터 활동이다. 

미술계의 주요 인사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이들에게 감히 조언하고 싶다. 현재 우리나라에 필요한 이들은 화려한 정치적 경력이나 과거 정부에서 일했던 이들이 아니다. 사회적 담론과 정신적 미래를 이해하는 이들이 필요하다. 이들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행정가가 아니라 사회의 미래를 담보할 가능성 있는 창의적 기획자이다.

이들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뜻과 의지와 희망이 맞는 미술가들과의 교류에 힘을 쏟는다. 미술가가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이유와 예술작품의 역할, 왜 이러한 작품이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이유와 작품제작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해 나간다. 이들이 활보할 수 있는 영역과 공간이 필요하다. 

“작년보다 못한 미술관 전시나 작년보다 못한 아트페어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