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영원한 현역 –주리
[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영원한 현역 –주리
  • 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
  • 승인 2018.04.01 22: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

국립무용단 창단 멤버인 주리(1927~ ,본명 주애선)는 한국인 최초로 스페인 마드리드 왕실 무용학교를 졸업했다. 20년간 스페인에서 무용을 가르치고 공연을 하던 주리는 1997년 한국에 돌아와 스페인 음악, 무용 아카데미를 설립했고 4년 뒤인 2001년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에서 귀국공연을 올렸다.

주리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2002년 가을이었다. 발레단 선배 김명순, 정남숙이 플라멩코를 배운다고 하여 압구정동의 연습실에 가게 되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신비롭고 우아한 주리선생의 자태에는 남다른 품격이 있었다. 남편이자 예술적 동반자인 호세선생님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호세 역시 한국인 최초로 스페인 왕실음악학교를 졸업했고 아테네오 극장에서 독주회를 열었던 기타리스트다.

2015년 K-발레 월드 야외 음악회에서 카르멘의 <하바네라>를 추게 되었다. 언젠가는 새로 이사한 금호동 주리선생 연습실로 찾아가 배움을 요청하겠다는 소망이 드디어 풀렸다. 국립발레단원일 때 카르멘조곡에서 카르멘 역을 맡아 하바네라를 춘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발레가 아닌 스페인 고유의 정서가 담긴 하바네라를 추고 싶었다.

▲주리 선생의 2010년 국립극장 공연.

주리선생은 사고로 고관절 수술을 하신 뒤라 거동이 불편하신데도 흔쾌히 안무와 지도를 해주시겠다고 하셨다. 잘 이해하지 못해 내가 헤매고 있으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일어나 시범을 보여주시곤 하였다. 몸이 완전치 못하여 중심을 잃으며 비틀거리시기도 했지만, 잠깐의 시범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섬광처럼 지나가는 순간 음악과 움직임의 섬세하면서도 절묘한 타이밍을 느낄 수 있었다. 안달루시아 집시의 플라멩코보다는 18세기 스페인 무곡에 의한 작품이며 발레를 기초로 한 단사 에스파뇰라(Danza Espanola)가 나에게 더 어울린다고 하시며 격려의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지금도 행복했던 그 시간이 떠오르며 미소 짓게 된다.

▲2005년 경의 주리선생의 수업의 한 장면.

주리선생의 스승 진수방(1921-1995)이 렛슨할 때는 반드시 피아노 반주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발레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1950년대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일이다. 음악성이 뛰어난 진수방 선생 문하에서 배웠고, 렛슨 할 때 피아노 반주자의 옆에서 악보를 넘겨주었던 주리 선생의 음악에 대한 예민함은 절로 생긴 것이 아니다.

조교로 일하던 주리는 진수방이 발레나 스페인 춤을 추는 걸 곁에서 보았고, 진수인은 고모인 진수방에게 혹독하게 발레를 배웠다. 주리라는 예명도 진수방 선생이 지어주셨다. 세 분에게 배울 수 있었던 기회를 가진 나는 크나 큰 축복을 받은 셈이다. 얼마 전 90세가 넘은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여사(1928-)가 최근까지도 현역으로 하루 7시간씩 일을 한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우리의 주리선생(1927년-) 역시 아직 건재하시다.

▲주리선생의 2006년 정동극장 공연

1973년 국립발레단이 국립무용단에서 독립하기 전에는, 여러 장르 무용가들이 함께 작품을 만들며 공연을 했다. 국립무용단에서 <푸른 도포> <무희 타이스> <론도 카프리치오소> <스위트 에스판요라>등의 작품을 올리면서 발레를 하던 주리는 1969년 스페인으로 유학을 감행했다. 공연을 눈여겨 본 스페인 대사 부인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마흔이 훌쩍 넘어서다. 그녀의 스승 진수방 선생 역시 마흔 넘은 1961년 미국으로 떠났었다.

스승과 제자 모두 무용수로서는 전성기가 지난 나이에 한국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공부하기 위해 떠났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름다운 외모 뿐 아니라 성격도 취향도 닮은 데가 있다.

▲주리 선생의 2010년 국립극장 공연.

개인차가 있지만 클래식발레 무용수의 생명은 비교적 짧다. 수직성을 강조하는 클래식발레의 특성상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은퇴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수평적 움직임을 하는 춤들의 생명은 인생의 겨울에도 지속가능하다. 한국 춤을 비롯하여 각 나라의 민속춤들이 그렇고, 스페인춤 또한 생명력이 길다. 발레작품 중 <돈키호테> <카르멘> <라우렌시아>등의 무대는 스페인이다. 이 작품들에 나오는 규격화된 캐릭터댄스에 비해 스페인의 전통 플라멩코와 음악, 노래는 인생의 사계절을 담은 듯 깊고 흥겹고 때론 슬프다 못해 처연하기에 더욱 인간적이다.

스페인춤을 주리 선생에게 배우면서 이 춤이 얼마나 자연친화적인지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주리선생은 그 길고 섬세한 손으로 길 옆에 피어난 꽃을 따서 향기를 맡기도 하고, 밤하늘에 매달린 초승달과 별을 가리키기도 했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영혼이 자유로운 집시이자 춤의 구도자였다. 구순이 넘은 영원한 현역 주리선생의 춤에 대한 헌신과 실천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