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승진 현악기 제작자 "'이승진' 이름으로 세계적 악기 제작자 되고 싶어"
[인터뷰] 이승진 현악기 제작자 "'이승진' 이름으로 세계적 악기 제작자 되고 싶어"
  • 이은영 발행인/박우진 기자
  • 승인 2018.04.02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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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유수 콩쿨 잇달아 입상 “바이올리니스트 아내 강운영, 연주자 입장 전달하는 중요한 조언자”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도시 크레모나. 이곳에서 현악기 장인을 목표로 13년 넘게 치열하게 악기 제작에 몰두하고 있는 이승진 씨. 크레모나 스트라디바리 국제 현악기 학교에 28세에 입학해 31세에 졸업과 함께 이탈리아 최고 제작가이자 스승으로 꼽히는 모라시 가문 공방에 외국인으로서 유일한 직원으로 취직했다.

6년간 전통 방식도 전수받고 모라시 가문의 악기들도 함께 만들었다. 재학 당시에도 선배들보다 악기 제작 완성도나 속도가 빨라서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유럽의 유수한 악기 제작 콩쿠르에 출품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한국인 ‘이승진’의 이름을 알렸다. 현재는 자신의 이름을 건 공방을 열고 바이올린과 비올라 등의 악기를 제작 판매하고 있다.

▲ 2016 로마콩쿨 수상 후의 이승진

처음부터 그가 악기 제작의 길을 가기 위해 이태리에 간 것은 아니었다. 이태리 굽비오에서 현악기 제작 공부를 하고 있던 누나를 따라 이태리 요리 학교에 들어갔다. 누나를 통해 취미로 접한 바이올린 제작에 흥미를 느껴 누나가 다니던 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다 점점 더 심취하게 되면서 상급학교로 진학하고 세계적으로 이름난 모라시 공방에 들어가면서 현악기 제작이 천직으로 자리 굳히고 있다.

그 가운데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내 강운영씨를 만난 것도 큰 힘이 됐다. 그녀는 현재 이탈리아 볼로냐와 밀라노 오케스트라의 정식 단원으로로 활동하면서 악기 제작에 연주자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전달하는 중요한 조언자다.

오는 10월 악기전시 준비 등을 위해 이 달 서울을 찾은 이승진씨와 그의 아내 강운영씨를 만나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악기 제작 과정과 그의 작업세계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이태리 크레모나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크레모나 하면 명품 악기 제작으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몇 십억대까지 호가하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으로 더 명성이 높아진 곳이기도 하다.

크레모나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고향이면서 바이올린으로 유명한 도시이다. 지금도 크레모나를 중심으로 유명 바이올린 제작자들이 150여개 정도의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바이올린만 취급하는 큰 박물관도 있다.

▲ 이태리 현지 신문에 소개된 이승진의 콩쿨 수상 소식

크레모나에서 악기 제작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원래는 요리를 공부해 한식, 양식 자격증을 취득하고 서울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일했었다. 그러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간 누나를 따라 요리를 배우러 이탈리아로 갔다. 요리 학교를 다니면서 굽비오 현악기 제작 학교를 다니던 누나를 보면서 틈나는 시간에 바이올린 제작을 취미로 배우게 됐다.

요리와 같이 칼을 써서 하는 작업이라 악기 제작에 더 흥미로웠다. 심화된 바이올린 제작 코스를 배우고 싶어 누나와 같은 상급 학교인 스트라디바리 국제 현악기 학교 편입을 해서 크레모나로 가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어떤 일을 했나? 

학교 졸업 후에 6년 동안 Gio batta Morassi 스승님의 공방에서 월급 받으며 일하면서 악기 제작에 대해 배웠다. 그러다 올해 2월에 내 이름을 걸고 공방을 열었다. 

스승은 어떤 분이신가?

지오 바타 모라시(Gio batta Morassi) 스승님은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네리 다음 세대인 가림베르티와 오르나티 그 두 명 모두에게 사사한 유일한 제작가이다.

2차세계대전 이후 침체되있던 이탈리아 현악기 시장을 살리기 위해 직접 악기들을 메고 세계 곳곳을 다니며 이탈리아 현악기를 널리 알리고 또한 현재 크레모나 100개 넘는 현악 제작 공방 마에스트로들 중 90프로 이상의 스승이기도하다.

현재 80세가 넘으신 연세로 천천히 제작을 하시긴 하시지만 주로 세계 곳곳에서 메이저급 콩쿨 심사나 강연을 주로 다니신다. 저는 지오 바타 모라시의 아들인 Simeone Morassi에게도 또한 사사를 했는데 현재 중견 현악기 제작가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국제콩쿨들 심사위원장을 여러 곳 맡고 있고 내가 소속된 이탈리아 현악기 제작가 협회의 회장님이시기도 하다. 

강운영: 사실 이탈리아가 이민국가도 아니고 자국민보호주의가 강해서 외국인들에게 계약서를 써주고 정식 비자 발급과 차별없이 살 수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질 않는다. 남편이 최고 명문 가문 스승님들과 함께 악기를 만들고 정식 취업 비자와 영주권 취득은 남편 전에도 후에도 크레모나에선 손에 꼽힐 정도로 없는 일이었다. 

바이올린은 1년에 몇 개 정도 제작하는가? 가격은 어떻게 되는가?  

한 달에 한 개 꼴로 만들 수는 있지만 콩쿠르에 집중하다 보니 실제로는 1년에 5~6대 정도를 생산한다. 가격은 평균 만유로(한국 돈: 1300만원) 정도 된다.  

외국에서 악기의 수요는 어떠한가? 

전 세계적으로 경제가 안 좋으면 예술 쪽 투자가 줄긴 하지만 연주회 수요가 일정해서 연주자들이 악기를 꾸준히 산다. 악기 제작에서 중간자적 위치에 있는 제작자들은 그만두기도 하지만 실력이 있고 잘되는 곳은 꾸준히 잘돼서 전체적인 시장이 위축되지는 않는다.

악기 제작을 시작한지 13년이 되었는데 나이에 비해 빨리 시작한 편인데 분야 내에서도 실제 어린 편인가? 

1979년생으로 올해 마흔인데 경력은 13년차이니 경력 치고는 어린 편이다.  

수상 경력도 꽤 많던데 현재의 수상 경력 정도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것인가?   

학교 다닐 때부터 많이 참여해서 수상 경력이 있는 편이다. 나의 현재 위치는 악기 제작자들 사이에서 ‘저 친구는 잘 만들지’ 정도의 평가를 받는 정도다. 

외국 콩쿠르에 한국 이름으로 출품을 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잘 인식되지 않을 수도 있을텐데. 
사실 동양인의 이름으로 활동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다른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이탈리아식 예명을 써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잘하면 내 이름을 건 악기들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까 싶어 콩쿠르에 내 이름으로 악기를 출품한다. 또한 콩쿠르가 내 이름을 알릴 수 있는 빠르면서도 확실한 방법이기에 그렇다. 

▲ 아칭 표면다듬기

본인이 제작한 악기의 큰 특징은? 

악기에 뒤틀림이나 변형이 생기지 않아서 밝고 안정적인 소리가 크게 멀리 나간다. 

그러한 특징을 갖게 된 비결은?

스승님의 엄격한 가르침 덕분이다. 스승님께서 이탈리아 북동부 지역에 산을 소유하고 계신데 그 산의 나무를 자르고 나서 10년 정도 작업 공간에 보관하신다. 그러면 나무의 변형이 생기지 않는다. 

악기 만들 때의 마음가짐은? 
처음 시작할 때와 같다. 늘 즐겁고 다음에는 어떤 새로운 모델을 만들지 생각을 많이 한다. 결혼한 이후에는 판매에 대한 부담이 커졌다. 악기 제작처럼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더라. 

크레모나에 악기를 배우거나 악기 제작 작업을 하는 한국인은 몇 명 정도 있는가?

공방을 갖고 있는 사람은 6명 정도 있고, 아마추어 제작자나 학생까지 합치면 50명 정도 된다. 5~6년 전부터 크레모나가 인기를 끌면서 20대 초반 학생들이 많이 유학을 왔다. 어떤 학교는 학생 5명 중에 1명이 한국인인 곳도 있다. 

악기 제작을 배우러 오는 학생들은 악기 제작 분야를 직업으로 삼는 편인가? 

직업으로 삼기 위해 오는 친구도 있지만 악기 제작을 배워 보고 싶어서 온 친구들도 많은데 그들도 열의를 갖고 배운다. 예전에는 3~5년 정도 배운 뒤에 직장을 어떻게 잡을까 걱정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면 요즘 학생들은 외국 친구들과 자유롭게 교류하면서 즐기는 분위기가 크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소리의 비결이자 명품이 될 수 있었던 것 중 하나가 나무에 벌레가 많아서 칠하게 된 화학 약품에 영향이 크다고 하던데

여러 가지 설들이 있다. 바이올린 제작을 시작하기 전에 그런 쪽에 관심이 많아서 과학적으로 분석한 책들을 많이 봤지만 과학적 분석으로도 끝내 밝히지는 못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제작할 때 알코올칠이나 오일칠을 한다고 하는데 이것도 확실하게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탈리아 크레모나 지역에서는 1800년대 후반부터 알코올 칠을 해왔기 때문에 이 쪽에서는 알코올칠을 해왔다고 주장하는 편이다. 다른 가설은 포강이라는 강을 통해서 바이올린 제작에 쓰일 나무를 강물에 떠내려 버린 후 말리는 과정을 겪는데 이 과정에서 소리가 좋아졌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옻칠의 효능이 다양한데 옻칠을 사용할 생각은 없는지? 

예전부터 옻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아직 시도는 안 해봤다. 그동안은 콩쿠르에 집중하면서 이탈리아에서 배운 방식과 현대적 기법을 접목하려는 시도는 해봤으나 한국적인 것을 접목시키는 시도는 아직 안 해봤다.

그랬던 이유가 이탈리아 사람들이 악기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서 콩쿠르에서 정통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만든 악기는 출품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나만의 작품을 만들 기회가 생겼기에 장점이 많다면 한번 해보고 싶다.     

악기 연주는 하는지? 

7살 때, 바이올린을 배운 적이 있다. 당시에는 흔한 일이 아니었는데 아버지께서 외국을 많이 다니시면서 취미 활동의 중요성을 체감하셨다. 그 때문에 바이올린 레슨을 받았다. 하지만 6개월 정도 배우다가 그만 두었다. 

이번에 한국에 온 이유는? 

올해 10월에 서울에서 내가 만든 악기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전시장 선정 등 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다. 무엇보다도 외국을 다니시며 일하시는 아버지께서 휴가를 내서 국내에 들어오셔서 가족여행을 하기로 한 것이 하나의 이유다.     

전시 내용이 궁금하다

바이올린 전시와 연주를 겸한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 전시회가 잘 되면 내가 속해있는 이탈리아 제작자협회와 공동 전시를 여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매년 이탈리아 제작자 협회와 공동으로 전시를 열고 있다. 

한국에는 악기 제작자들의 전시가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외국과 비교하면 어떤가?     

한국 악기 제작자들이 제작을 많이 안 해서 전시가 많지 않은 것 같다. 제가 알아보니 한국제작자협회에서 2년에 한번 정도 전시를 한다고는 하더라. 유럽 같은 경우에는 제작자들이 전시를 많이 하고 있다. 

▲ 이승진 강운영 부부

아내되는 강운영씨는 악기를 만들면 시연자이자 조언자 역할을 하는데, 남편이 처음 만들던 악기와 지금의 악기에는 어떤 차이를 느끼는지.

강운영: 13년 동안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스승님의 방식 그대로의 악기였다. 남편이 변화를 주는 것에 두려움을 가졌었다. 스승님이 고지식하셔서 이거 아니면 안 된다고 하시는 분이었는데 그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내가 항상 말하는 것이 악기의 존재 이유는 연주에 있어서 소리를 잘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점차적으로 사운드 포스트, 브리지 치수, 판 두께 등을 바꿔나갔고, 그 과정에서 칠, 형태, 마지막에 소리 잡는 과정 등에 대해서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 그러면서 소리가 많이 좋아졌다.  

이승진:  제작자 입장에서만 생각하다 연주자의 입장을 반영하다 보니 좋아진 것 같다. 결혼하고 나서는 연주자의 입장과 특성을 고려하면서 소리 쪽으로 신경을 많이 썼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된 계기는?  

강운영: 당시 남편은 스승님 공방에서 일하고 있었고, 나는 불가리아 국제 콩쿠르에서 1등을 해서 이탈리아로 왔을 때 처음 만났다. 바이올린 제작자를 본 것은 남편이 처음이었다. 둘 다 한국 사람으로는 흔치 않은 이유로 이탈리아에 온 것이라 서로 신기하게 봤던 것 같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남편의 눈에서 악기 제작에 대한 열정과 확신에 찬 모습이 느껴졌는데 그 점에 반했던 것 같다.   

현재는 남편의 일만 돕는 것인가? 

강운영:  이탈리아에 오자마자 여러번의 오디션을 본 끝에 현재는 볼로냐, 밀라노 두 곳의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었다.

이승진:  외국에서 오디션 보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이 점은 아내한테 많이 미안했다. 

악기 제작을하고 판매까지 하자면 힘든 일도 많을 것 같은데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없었던 것 같다. 콩쿠르 준비할 때 조금 힘들고, 영업을 하다 보니 서류 작업을 많이 하는데 그게 제일 힘들다. 나무 깎으면서 살고 싶지 종이와는 일하고 싶지 않더라.(웃음) 
                  
언어를 비롯해 여러 어려움들도 있을텐데 어떻게 극복했나

동양인으로서 소외감은 있지만 제작에 있어서 어려움은 없다. 10년 넘게 제작자협회 친구들과 잘 어울려 지낸다. 언어 또한 처음 이탈리아에 왔을 때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면서 이탈리아어를 빨리 배우게 돼서 어려움은 없다.  

앞으로 꿈은
올해는 내가 스스로 공부하고 연구해서 내놓은 결과물을 콩쿠르에 출품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내년부터는 주문 받은 악기를 공방에서 만들어서 꾸려 나가는 것이 목표다. 최종 목표는 런던에 있는 누나네 가족들과 함께 공방을 운영하는 것이다. 

매형은 독일 미텐발트 현악기 제작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레온하르드 플로리안 회사에서 영국과 한국을 오가며 고악기 복원 수리가로서 이름이 널이 알려져 있다. 누나는 활 전문파트를 맡고 있어 언젠가 한 파트씩 나눠 맡아 현악기 제작 수리 복원, 활 제작까지 하는 가족 사업을 이루고 싶다.

<이승진 프로필>

2011 이탈리아 피소네 현악기 제작 콩쿨 바이올린 3위 
2012 이탈리아 피소네 현악기 제작 콩쿨 바이올린 2위 
2013 이탈리아 안라이 현악기 제작 콩쿨 바이올린 1위 
2014 독일 국제 미텐발트 현악기 제작 콩쿨 비올라 8위 
2015 이탈리아 안라이 현악기 제작 콩쿨 비올라 2위 
2016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국제 현악기 제작 콩쿨 바이올린 3위 
2016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국제 현악기 제작 콩쿨 비올라 2위, 3위 
2017 몰타 국제 현악기 제작 콩쿨 바이올린 동메달 
2017 몰타 국제 현악기 제작 콩쿨 비올라 은메달 
2018 몰타 국제 현악기 제작 콩쿨 바이올린 동메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