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 블랙리스트가 남긴 것 그리고 公에 대하여
[성기숙의 문화읽기] 블랙리스트가 남긴 것 그리고 公에 대하여
  • 성기숙 무용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승인 2018.04.17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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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기숙 무용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지난 주말 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얼마 전까지 화려하게 만개했던 봄꽃들이 비바람에 흩어져 거리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사람들의 발길에 무참히 짓밟혔다. 아름다움을 뽐내던 형체는 오간데도 없이 사라졌다. 우리네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닌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순간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극적 삶이 스쳐갔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대통령으로 화려하게 등극했으나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처참하게 부서져버린 인생 말이다. 인생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

어느새 1년 하고도 수개월이 흘렀다. 전국이 촛불로 타올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온 나라 사람들이 밤마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국정파탄을 초래하고 문화예술인들을 유린한 박근혜 정부는 퇴진하라고 외쳤다. 정부 퇴진에 무용계도 목소리를 보탰다. 현실의식에 다소 낙후성을 보였던 무용계가 이토록 강한 응집력을 보인 것은 퍽 이례적이다. 무용인들은 국정파탄과 블랙리스트로 인한 문화생태계 파괴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일어섰다. 

“대통령의 헌법유린과 그 측근에 의한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를 목도하며 충격을 금할 수 없다. 문화융성을 국정기조로 내세운 박근혜 정부는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헌신해왔던 예술인들의 창작의욕을 말살하고 자존심을 처참하게 짓밟았다. 특히, 기초예술을 말살하는 문예진흥기금 운용의 불합리한 집행,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선임 및 비정상적 운영, 문화재청의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예고와 연관된 부당행정과 거짓해명 등 매우 이례적인 일들이 자행되면서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국정농단을 규탄하는 대한민국 무용인 시국선언문’의 첫 문장이다. 약 140여개 단체가 참여한 무용계 시국선언은 춤역사상 초유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무용인들은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 작성은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다고 비판했다. 나치시대를 방불케 하는 비상식적 행태로서 문화예술계를 파탄시켰다고 분노했다. 

블랙리스트란(blacklist)란, 원래 수사기관 등에서 감시가 필요한 위험인물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박근혜 정부에서 약 1만 명에 달하는 문화예술인들이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랐다.  청와대와 문체부 주도로 이뤄져 분노가 더 컸다. 예술가들에 대한 능멸과 박해가 서슴없이 자행되어 큰 충격을 안겨줬다. 문명국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무용계에 자행된 블랙리스트엔 무엇이 있는가? 무용가 개인이 블랙리스트 명단에 포함된 경우도 없지 않다. 부당하게 피해 입은 무용가도 분명 있을게다. 그러나 무용계의 블랙리스트 사건은 공공단체에서 자행됐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증폭된다. 국립무용단의 이른바 ‘향연’을 둘러싼 블랙리스트 관련 ‘불편한 진실’은 지금껏 해소되지 않고 있다.    

블랙리스트와 매개된 ‘향연’의 문제점은 언론보도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향연’은 원래 국립극장의 기획작품이 아니다. 당시 문체부 장관의 지시에 의해 갑자기 제작됐다고 한다. 예산 확정 후 겨우 20여일 연습하고 무대에 올린 급조된 작품이란다. 약 6억 원이라는 지원금이 갑자기 위로부터 하달된 점도 합리적 의심의 무게 추를 더한다.

더욱이 ‘향연’이 최순실 국정농단 절정기에 만들어졌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모든 점이 상식을 벗어나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작품제작비의 출처가 문제로 지적된다. ‘향연’은 국립극장 자체 예산이 아닌,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산실 예산으로 충당됐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창작산실지원은 이명박 정부 시절 만들어진 지원제도다. 공연예술 분야에 파격적인 지원을 통해 순수예술 장르를 활성화시켜 보자는 취지에서 생겨난 지원제도로서 현장예술가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었다. 예술가들의 창작의욕을 고취시키고 창작현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순수예술분야 창작자들에게 정부의 지원금은 ‘생명의 젖줄’과 다름없다. 그런데 민간의 현장예술가들에게 지원돼야 할 창작산실예산이 공공단체인 국립무용단으로 흘러들어간 것이다. 정상적이지 않다. 

알다시피 ‘향연’은 2015년 12월 5,6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초연됐다. 조흥동·김영숙·양성옥 등 한국춤계에서 잔뼈가 굵은 세 명의 무용가가 공동안무를 맡았다. 특히, 대중적 인기가 높은 의상다자이너 정구호가 연출을 맡아 큰 화젯거리가 됐다. ‘향연’은 전통춤 소품을 옴니버스 스타일로 엮어놓은 작품으로 한국춤 종합선물세트의 전형이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다. 그저 평범했다는 말과도 상통된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통한 세련된 무대미학을 상찬하는 언론의 호평과 달리 ‘향연’을 대하는 전문가들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향연’에 대한 불편한 시선은 작품의 탄생 배경과도 연관된다. 작품에 대한 미학적 가치판단의 호불호를 떠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약 6억 원에 달하는 예산이 어떤 목적에서 왜, 갑자기 국립무용단에 하달되었는가 말이다. 비정상적 경로로 지급된 공연제작비를 수령하는 과정에서 최종 의사결정 권한을 행사한 사람은 누구인가? 또 ‘향연’ 안무에 참여한 세 명의 무용가는 누가, 어떤 이유와 명분으로 발탁했는가? 이러한 비정상적이고 부당한 절차를 실행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 지점에서 관료는 ‘영혼이 없는’  존재라고 규정한 막스 베버의 주장을 음미한다. 관료는 대개 개인 감정을 갖지 않는다. 오로지 명령과 복종의 상하관계에서 공적 의무를 다하는 존재로 설명된다. 베버의 주장은 한국에서 다소 곡해되어 해석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는 영혼이 없는 기계처럼 작동하는 관료제를 비판한 것이지 관료의 맹목적 복종을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블랙리스트 작성, 국립무용단 ‘향연’의 부당한 실행에 복무한 관료에 대해, 그들은 원래 ‘영혼이 없는’ 존재로서 그저 상급자가 시키는 대로 실행했을 뿐이라는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로 들리기 십상이다.  

왜 그럴까? 관료의 보편성 속성에서 기인된 문제로 보인다. 거의 모든 정권을 불문하고 권력은 관료의 절대적 충성을 요구한다. 관료는 권력의 오감에 맞춰 ‘영혼이 없는’ 존재이기를 스스로 자처한다. 상급자가 시키는 대로 기계적으로 작동해야 탁월한 능력자로 인정받는다. 그래야 자리를 보전하고 꽃보직을 보장받으며 영달을 챙길 수 있다. ‘영혼이 없는’ 관료일수록 출셋길에서 유리한 고지를 달린다. 관료에게 개인의 소신과 신념을 기대하기란 실로 어려운 문제이다.

따지고 보면, 박근혜 정부의 패망 원인도 사적(私的) 욕망에 사로잡힌 최순실이라는 사람에게 관(官)·공(公)이 흔들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관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여 국가와 사회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 근대 국민국가 수립이후 한국은 이른바 ‘관의 나라’였다. 관 주도의 국가경영으로 산업화를 견인했고 압축성장의 세계적 모델이 됐다. 자랑스런 결과다. 그런데 언제부터라고 특정할 수는 없지만 공공의 이익에 부합해야 할 관(官)·공(公)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박근혜 정부의 실패요인은 관의 사익추구, 공직의 사유화에서 찾아진다. 

작년 취임 직후 문재인 대통령은 “공직자는 국민과 함께 깨어있는 존재가 되어야지, 정권의 뜻에 맞추는 영혼 없는 공직자가 돼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도종환 문체부 장관도 취임식에서 ‘영혼이 있는 공무원이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고 알려진다. 현 정부 출범 직후 문체부에는 블랙리스트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 정부 주도의 관련 토론회만도 수 십 차례 이어졌다. 그런데 어떤 성과를 남겼는지는 오리무중이다.  

아쉽게도 개혁과 정상화를 위한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는 무관하게 문화예술계가 느끼는 변화의 체감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 왜 그럴까? 문화예술계에 암세포처럼 기생하면서 권력의 시녀노릇을 해온 하수인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기 때문이다. ‘최순실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출세한 관료’는 무늬(사람)만 바뀌었을 뿐,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다.

현 정부에서도 역시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전문가들이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문화예술정책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듯 하다. 그들은 역설적으로 최순실 국정농단과 블랙리스트 사건의 최대 수혜자들이 아닐까? 부디 주어진 권력 혹은 권한을 공(公)을 위해 사용하시고 오로지 국가를 위해 헌신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