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남북예술교류의 아이콘, 최승희
[성기숙의 문화읽기]남북예술교류의 아이콘, 최승희
  • 성기숙 무용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승인 2018.04.24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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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무용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올해는 최승희가 해금된 지 30년이 되는 해이다. 알다시피 최승희는 20세기 한국을 빛낸 최고의 예술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때 신화와 전설 속에 묻혀있었다.

1988년 이전 최승희는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못하고 최모(崔某)라고 지칭되었다. 최모라는 호칭도 드러내 놓고는 말할 수 없는 금기어였다. 월북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분단이후 냉정이데올로기가 가져다 준 비극의 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최승희는 누구인가? 그는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기, 한국 근대무용의 여명을 연 춤의 선구자이다.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石井漠)에게 입문하여 서양의 모던댄스를 체득하고 민족고유의 전통(춤)과 접목하여 신무용(新舞踊)이라는 새로운 춤사조를 창출하는 등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다.

근대 한국무용사에서 국제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화하여 일약 세계적 스타가 된 무용가로는 최승희가 독보적이다. 그는 미국, 유럽, 중남미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을 순회하며 무려 150여회에 달하는 공연을 개최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국권이 상실된 상황에서 ‘코리안 댄서’라는 타이틀로 국제무대에 진출하여 한국춤의 문화적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떨쳤다. 그를 지칭하는 수식어 또한 다채롭다. ‘동양의 진주’, ‘반도의 무희’, ‘한국의 이사도라 던컨’, 세계적 무희‘  등 거론하기조차 숨가쁘다.

최승희의 성공비결은 무엇인가? 그는 타고난 용모와 천부적인 재능으로 동양의 신비와 이국적인 멋을 구사하여 서양인의 감성과 심미안을 자극했다. 또 치열한 창작정신과 예술적 열정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파카소, 마티즈, 로망 롤랑 등 세기의 예술가들이 최승희 춤에 매료되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한마디로 세계가 알아준 조선의 춤꾼이며 세계무대에서 통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무희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근대의 아이콘 최승희의 활동은 무용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반도의 무희’에 출연하여 4년동안 장기 상영되는 흥행기록도 세웠다. 또 음반취입과 광고모델, 미인대회 등에 참가하는 등 근대 대중스타로도 명성을 떨쳤다. 큰 키에 균형 잡힌 몸매, 모던풍의 도시적 이미지는 대중들의 취향과 미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최승희가 춤 이외 다른 분야로 시선을 돌린 것은 순전히 해외무대 진출을 위해서였다. 국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정부의 지원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 대중을 겨냥한 상업적 활동으로 수익창출을 모색한 것이다. 여기엔 세계무대로 비상하기 위한 재원마련이라는 전략이 숨겨져 있었다. 이처럼 최승희는 일찍이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에 익숙한 예술가였다.

8·15 해방은 최승희에게 두 개의 갈림길에서 하나의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했다. 좌우익의 극심한 이념대립 속에서 그에겐 친일무용가라는 굴레가 씌워진다. 더욱 거세지는 친일무용 비판에 그는 월북으로 응답한다. 월북을 결행하기까지 그의 고뇌는 상상을 초월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월북은 여러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미 월북하여 북한 정계에 터전을 다진 남편 안막은 최승희의 북행을 집요하게 종용했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김일성의 회유도 끈질겼다. 일제강점기 세계적 무용가로 이름 날린 최승희가 북행한다면 사회주의 체제수호에 더할 나위 없다는 판단이 앞섰던 것이다.

그 즈음 최승희의 잔류를 위한 남한사회 각계 각층의 노력도 예사롭지 않았다. 우선 신무용가로  조택원은 해방된 조국의 터전에서 새로운 각오로 함께 무용활동을 펼쳐보자고 제의한다. 정계의 실력자 이승만은 최승희에게 남한에 계속 머물며 예술활동을 해달라는 친필 서한을 보냈다고 한다. 남북한 모두 최승희에 대한 구애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승희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심지어 북으로 갈 것인가, 남한에 남을 것인가를 두고 무당에게 찾아가 점을 쳤다는 기록도 전한다. 결국 남편의 거듭된 종용과 김일성의 집요한 유인에 굴복한 최승희는 1946년 월북을 단행함으로써 한국의 춤역사에서 잠정적으로 사라졌다.

최승희가 월북하자 김일성은 약속대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동강가에 국립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예술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이곳을 매개로 최승희는 자신이 꿈꾸던 ‘동양발레’의 일환으로 이른바 민족무용극 창작에 주력하면서 북한무용 초기 토대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남긴다. 최승희는 6·25전쟁 중에도 불바다가 된 한반도를 피해 중국 북경으로 보내진다. 김일성의 특혜로 취해진 조치였다. 당시 김일성은 중국 주은래 수상에게 최승희를 특별히 부탁할 정도였다. 최승희의 존재론적 위상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이러한 배경에 힘입어 1951년 북경 중앙희극학원에 최승희무도반이 개설된다. 여기서 최승희는 조선춤을 전수하는 한편, 종합예술로서의 경극을 독자적 무용체계로 정립한다. 그는 중국무용의 근대화 최전선에서 큰 공헌을 남겼다. 북으로 복귀한 최승희는 민족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를 안무한다. 1954년에 창작된 ‘사도성의 이야기’는 최승희의 야심작으로 손꼽힌다. 또 『조선민족무용기본』을 통해 춤의 매소드를 과학적으로 체계화하였고,  『무용극대본집』을 집필하는 등 남다른 탐구력을 과시했다. 이렇게 월북 초기 최승희는 김일성의 절대적 신뢰를 한 몸에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월북이후 최승희의 위상은 그를 일컫는 다채로운 칭호로서 웅변된다. 그는 예술가에게 부여되는 최고등급인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또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무용가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 국립무용극장 총장 등을 역임하며 북한 문화계의 최고 실세로 군림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했던가. 1950년대 후반 남편 안막의 몰락과 함께 최승희 역시 1960년 이후 북한 무용계 중심에서 밀려나 1969년 숙청된 것으로 알려진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최승희에게 불어 닥친 불행의 징후는 훨씬 그 이전에 찾아왔다. 최승희의 평전을 집필한 서만일은 1950년대 후반 당으로부터 한 개인을 지나치게 우상화했다고 호되게 비판받는다. 특히, ‘사색하는 육체’란 표현이 집중적인 공격대상이 된다. 이는 서만일의 부르조아적이고 데카당한 미학관이 작동된 결과라는 것이다. 불똥은 최승희에게로 전이된다. 최승희 역시 미제국주의자들에게 굴복당한 서만일의 세계관이 그대로 이입돼 있다고 비판된다.

비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동구권을 방문하고 남긴 최승희의 글을 트집 잡아 내면에 부르조아 미학관이 서려있다고 공격한다. “과거 내가 본 파리, 뉴욕의 발레보다 훨씬 능가하는 수준으로 우리 조선의 민족발레를 발전시켜야겠다는 것이 나의 최대 염원이다”라는 글귀를 문제 삼는다. 왜 형제국가들을 방문하고 온 직후에 하필 수십 년 전 자본주의 국가들의 부르조아적 예술을 답습할 것을 예술적 목표로 삼는지를 비판한다. 심지어 최승희의 내면에 깃든 부르조아적 미학관이 남편 안막에게서 전이된 것이라며, 최승희·안막 부부를 싸잡아 매도한다.

이렇듯 최승희를 둘러싼 자본주의 잔재 혐의는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민족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도 비판에 직면한다. ‘사도성의 이야기’는 초연 직후 막대한 예산을 들여 북한 최초의 천연색 영화로도 제작된 최승희의 출세작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사도성의 이야기’조차 사회주의체제 건설을 위한 혁명성이 미약하고 복고주의와 수정주의 나아가 자본주의 수법이 깃들어 있다고 비판된다. 당의 혁명전통과 천리마시대의 전형적 성격창조 및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미학적 정서와 괴리된다는 이유로 최승희의 예술적 업적은 폐기처분될 위기에 놓여진다. 최승희는 ‘무용가는 인민을 위한 투사다’라는 호전적 논조의 글을 발표하는 등 안간힘을 써 보지만 이미 천리마 기세에 눌린 ‘기울어진 운동장’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북한은 지난 2011년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출세작 ‘사도성의 이야기’를 50여년 만에 복원한다고 널리 선전한 바 있다. 공훈배우 홍정화가 ‘사도성의 이야기’ 복원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퍽 흥미롭다. 그는 최승희 숙청이후 북한예술계에서 ‘인민의 꽃’으로 부상한 대표적 무용가다. 70세 생일기념공연을 허용할 정도로 홍정화에 대한 당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조선무용가동맹서기장 등 최승희가 누렸던 거의 모든 명예와 권위를 물려받았다.

홍정화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북한무용계의 침체를 깨뜨리기 위한 돌파구로 최승희의 ‘사도성의 이야기’를 복원한다고 술회한 바 있다. 자본주의 색체가 깃들어 있다하여 최승희 숙청의 도화선이 된 ‘사도성의 이야기’가 세월의 간극을 넘어, 세대를 넘어 화려하게 부활한 셈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최승희만큼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삶을 영위한 무용가도 드물 것이다. 원래 정치와 예술의 분리론자였던 최승희는 격동의 한국근대사의 중심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제국주의 일본, 식민지 조선’이라는 이항 대립적 구도에서 ‘전통의 현대화’를 통한 민족혼을 일깨웠음에도 그에겐 친일무용가라는 굴레가 덧씌워져 있다.

남한에서 최승희는 친일·월북이라는 굴레 속에서도 여전히 한국무용사에서 방기할 수 없는 뚜렷한 ‘역사적 징표’로서 굳건한 위치에 있다. 신무용 유산이 이를 증명한다. 북한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등 ‘김씨세습왕조’ 삼대(三代)를 초월하여 최승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살아 숨 쉰다. 어디 그뿐인가. 최승희의 춤은 남북한은 물론이요, 중국의 조선족무용 그리고 일본의 재일무용인사회에도 그 맥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국의 무용근대화에도 큰 공헌을 남겼다. 일찍이 세계 각국의 순회공연을 통해 춤한류를 견인한 이력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며칠 후 사회주의체제를 신봉하는 북한과 자본주의 천국인 미국의 최고지도자가 얼굴을 마주할 예정이다. 세계 유일의 ‘김씨세습왕조’의 후계자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글로벌기업인 출신으로 뼈 속까지 자본주의 추종자인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른바 북·미회담을 앞두고 있다. 기대와 우려 속에 ‘세기의 이벤트’를 지켜보는 것은 퍽 값진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다. 한반도에서 이념의 장벽을 뛰어넘어 민족을 하나로 매개하는데 있어 최승희는 매우 유용한 카드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최승희는 격동의 근현대사에서 스스로는 이념의 노예가 되기를 철저히 거부했다. 그녀를 두고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최승희는 자본주의의 꽃이었을까? 사회주의 ‘인민의 꽃’이었을까? 곧 도래할 것으로 예측되는 북한식 자본주의 체제에서 최승희의 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부활될 것인가? 우선은 해빙기에 있는 작금의 한반도에서 최승희가 남북예술교류의 아이콘으로 화려하게 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