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 국수호의 춤‘무위(無爲)’
[이근수의 무용평론] 국수호의 춤‘무위(無爲)’
  •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18.10.22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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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道家)의 무위(無爲)는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해탈(解脫)과 통한다. 자연의 본질을 깨달아야 무위의 경지에 이르는 것처럼 사람의 본성을 깨치는 것이 해탈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곧 자연의 산물이며 자연의 일부란 자각이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염담허정(恬淡虛靜)을 가능케 한다. 국수호가 55년 춤 인생을 ‘무위’(9.19~20)에 담아 아르코소극장 작은 무대에 펼쳐놓았다. 

무대 중앙에 커다란 원(圓)이 그려져 있다. 원은 우주이며 삶의 원형이다. 원 주위를 돌아가며 누런 볍씨들이 뿌려져 있다. 의자들도 주변에 자리를 차지하고 놓여있다. 상하의를 초록색으로 통일한 여인네와 남정네 들이 걸어 나오며 그 주위를 돌기 시작한다. 눈을 감은 듯 무아의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그네들의 춤사위는 자연과 하늘의 기운을 상징한다. 이 기운이 모여서 생명이 탄생한다는 것이 도가의 생명설이다.

맨 앞에 서서 무리를 이끌던 장혜림이 원 안으로 들어와 춤추기 시작한다. 자리에 앉아있던 무용수들이 따라 들어와 속을 채운다. 마을 축제처럼 춤은 활기를 띄며 원 안에 또 하나의 원을 만든다. 강강수월래를 떠올리는 모양새다. 무리 중에서 선택된 조재혁이 장혜림과 짝을 이루며 음양의 교합을 예고한다.

객석 앞자리에서 국수호가 소리 없이 무대로 나아온다. 국수호는 흙의 신이다. 한 움큼씩 볍씨를 집어 들어 대지 위에 흩뿌리기 시작한다. 군무진도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 둘씩 짝을 이룬다. 흙의 신이 짝을 이룬 남녀를 축복하고 남녀 간의 교합이 이루어진다. 대지가 볍씨를 싹틔워 이삭을 맺는 것처럼 사람도 생명을 잉태한다.

어머니의 다리 밑을 통과해서 세상으로 나아오는 탄생의식이 펼쳐진다. 매미가 허물을 벗듯 초록색 옷이 벗겨지고 그 안에 황토색 옷이 드러난다. 황토색은 영글어진 벼이삭이고 새로 태어난 아기의 피부색이다.

무대 양 쪽에 소리꾼이 앉아 있다. 땅의 소리(이소연)와 하늘의 소리(김준수)가 춤꾼들과 어울리며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음악 역시 국악과 양악이 섞인다. 피아노(강상구), 첼로(유하나루)와 나란히 놓인 아쟁, 칠현금, 생황과 함께 유경화의 타악기도 섞여 동서양 소리의 조화를 이루어낸다. 

소극장 무대는 국수호에게 생소한 자리다. ‘한국천년의 춤 시리즈’, ‘Korean Drum’, ‘용호상박’ 등 그의 대표작들은 모두 대극장이 무대였다.

춤 50년을 결산하는 무대였던 ‘춤의 귀환’(2014, 아르코대극장)을 보고 나는 이렇게 썼다. “무대가 떠나갈 듯 객석을 압도하는 그의 에너지를 능가할 무용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변신이다. 넘치는 힘과 끼를 과시하던 과거의 춤과 다른 새로운 미학이 그곳에 있었다. 힘과 끼를 바탕으로 50년 춤의 연륜이 가미된 비움의 정서가 국수호 춤에서 새롭게 발견한 미적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로부터 5년 국수호는 소극장무대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연과 하나 된 자신의 모습을 비춰준다. 그가 이제 다시 본래의 춤 자리로 돌아왔다는 의미일까. 홍해리의 시 한편이 생각나는 무위의 춤이다.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 
 눈물 젖은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무위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국수호가 그려낸 무위세계엔 생명의 탄생과 번식, 농사의 파종과 수확, 음양의 만남과 소리의 조화 등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무위(無爲)’ 속에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는 ‘무불위(無不爲)’가 내재되어 있다는 의미일까.

그가 농고 토목과에서 습득했다는 거리와 공간에 대한 개념이  대극장 무대보다 소극장에서 더욱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품어본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곳이 소극장무대이다. 종심(從心)의 나이 70을 맞는 연대이기에 그에게 품어보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