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문명의 시원을 향하여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문명의 시원을 향하여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18.12.31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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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진섭 미술평론가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를 머리 맡에 놓고 잠들기 전에 아무 페이지나 펼쳐 조금씩 읽는다. 감탄스러운 것은 그의 성실함이다. 어떻게 전란의 와중에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일기를 쓸 수 있었을까?

많은 날들이 그저 '맑다', '눈이 오다' 등으로 채워져 있다. 그의 문장은 군더더기가 없이 명쾌하고 직설적이다. 임란이 일어난 지 네 해가 되는 병신년 오월 초하루 날(정묘 오월 이십 칠일)의 일기는 이렇게 돼 있다. ''흐리나 비는 오지 않다. 경상수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한 번 목욕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문장에서 주어가 생략된 사실을 발견한다. 그러고 보니 지금 쓰고 있는 나의 이 짧은 글에도 '나'라는 주어가 생략된 문장이 더러 있다. 한국어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이 주어가 생략된 어문 구조를 갖춘 민족에게서 미래의 희망을 기대한다고 원로 철학자 박동환은 말한다. 

영어의 문장을 보자. 가령 ''I go(나는 간다.).''라는 문장에서 '나(I)'를 빼면 ''Go!((너) 가!)''처럼 명령형이 돼 버린다. 낱말 하나 차이로 나의 세계에서 남의 세계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나는 영문학자가 아니라 자세한 분석은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지만, '나(I)'라는 주체에서 '너(you)'라는 주체로의 전이는 오스틴(L. Austin)이 말한 '총체적 발화상황(performative)'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국어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상관하지 마.''라는 문장에서 '너'라는 주체가 생략된 경우가 그렇다.  

인간은 의사소통을 위해서 말을 고안했고 여러가지 이유에서 기록을 위해 문자를 발명했다. 시비를 가리기 위한 법조문,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문학작품 등은 다같이 소통을 위해 문자를 매체로 삼는다. 그러나 아무리 어휘가 풍부하고 발달된 언어라도 말을 할 당시의 상황이나 분위기, 감정을 다 담아낼 수는 없다. 그것이 언어의 한계다. 

바다풍경을 그린 그림에서 화가의 몸은 빠져 있다. 산이나 사과를 그린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그림이 전시장에 걸릴 경우 그림을 마주보는 관객의 시선(몸)이 개입되고 화가의 시선(몸)은 관객의 신체로 전이된다.

여기서 언어와 마찬가지로 소통의 문제가 발생한다. 언어의미론자인 알프레드 코르짚스키(Alfred Korzypsky)의 추상사다리 이론에 기대면 단어의 개념화와 추상화 단계가 높아질수록 이해는 더욱 어려워진다. 미술에 대해 밝지 못한 관객이 추상화 앞에서 곤혹감을 느끼는 이유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가 생략된 문자언어를 지닌 민족에게는 미래의 희망이 있다.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나와 세계를 동일시하는 시원성, 즉 자연의 원초성이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움직임을 국내의 자연미술 작가들과 문제의식을 지닌 소수의 퍼포먼스 작가들에게서 발견한다. 그들은 과연 변방의 작가들인가?

어느 글에선가 나는 국내의 이곳 저곳에서 자생하는 작가군을 가리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진귀한 버섯들의 군락지''라고 쓴 적이 있다. 그 버섯들의 생장기가 긴 경우 수십 년에 달한다. 놀랍지 않은가? 아무리 저 좋아서 한다지만 그 고난의 긴 기간을 버텨왔다는 사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