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 ‘지하철 1호선’을 멈춰주십시오.
[윤중강의 뮤지컬레터] ‘지하철 1호선’을 멈춰주십시오.
  • 윤중강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18.12.31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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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김민기님, 간곡히 부탁합니다. “지하철 1호선”을 멈춰주십시오. 학전에서 본 “지하철 1호선”은, 실제 ‘지하철 1호선’과 너무도 거리가 멉니다. 시대가 지나서 바라보니, 더 그렇습니다. 당신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작품을 계속 공연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학전의 ‘지하철 1호선’은 이제 추억이 되어야 합니다. 그 시절의 지하철 이용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건 어떤 사람이 ‘머리와 가슴으로 만들어낸’ ‘지하철 1호선’일 뿐입니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몸으로 경험하면서 삶으로 받아들여진 ‘지하철 1호선’이 아니었습니다.

'지하철 1호선’을 보면서, ‘광장’과 ‘골방’이란 두 단어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지하철 1호선’은 골방에 있는 사람이 광장에 있는 사람을 ‘짐작’하면서 쓴 작품입니다.

2002년 월드컵 때, 혹시 시청앞 서울광장에 모여서 응원을 하신 적이 있나요? 현장에 존재하는 사람과, 이를 매스컴을 통해 접한 사람은 아주 다릅니다. ‘열기’의 온도차(溫度差)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의 정도차(程度差)를 얘기하는 겁니다.

당시 광장에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이걸 다룬 신문기사는 대략 이렇더군요.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사실을 전제로, 매스컴에선 거리서 벌어진 사건사고 또는 에피소드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에 골을 넣은 순간, 모르는 남녀가 서로 얼싸안았다! 또는 그런 상황에서 여자가 남자를 뺨을 갈겼다! 현장에서 1%로도 안 되는 소수의 상황일 겁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뉴스거리가 됩니다. 현장의 보편적 다수에겐 해당하지 않지 않습니다. 거기서 발생한 특이한 ‘상황’만이 전해지는 거죠. 지하철 1호선’이 내게 딱 그렇습니다.

“그런 일도 있었네” 하면서, 광장에 실제 있었던 사람은 매우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 버릴 것이, 골방에서 앉아서 광장을 짐작하는 사람에겐 심리적으로 확대되는 거죠. 자신은 비록 골방에 있었지만, 광장에 있던 것처럼 의식하고 싶은 심리의 반영이랄까요? ‘지하철 1호선’은 1988년의 지하철과 관련한 일종의 기시감(旣視感)으로 만들어낸 작품은 아닐까요? 지하철에서 벌어진 사건와 에피소드를 연결한 작품이었습니다. 이런 작품 형태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경험치(經驗値)가 매우 낮거나, 실제적 경험치라고 할 수 없는 작품이란 얘기가 핵심입니다.
이 작품을 보면서,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2)가 겹쳐졌습니다. 안정효의 원작소설이 영화로도 만들어졌죠. 주인공은 자신이 쓴 시나리오는 자신의 창작품이라고 믿고 있지만, 실제 그건 그간 자신이 본 헐리웃영화의 표절이었지요.

당신의 작품인 ‘지하철 1호선’이 표절이란 얘기는 아닙니다. 독일 작품에서 가져왔기에,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각각의 에피소드를 보면, 우리가 그간 많이 봐왔던 것이라는 걸 숨길 수 없습니다. 지하철이란 공간에서 벌어지고 얘기된다는 이유 로 이해되고, 독일원작이 있다는 것으로 용납될 순 있겠지만, 작품을 보는 동안 스스로 개운치 못한 심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 거 저런 거 다 떠나서도, 이 작품의 인물은 너무도 스테레오 타입니다. 때로는 지하철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전달하기보다는, 어떤 상황을 웃기게 만들려는 ‘목적’을 위해 지하철이 ‘수단’이 되는 것을 비췄습니다. 옛날 말이지만, 우리는 지금도 애환(哀歡)이란 말을 자주 씁니다. 슬픔과 기쁨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죠. 당신이 만든 이 작품은 ‘지하철 승객’의 애환이 없습니다. 그 사람과 그 시절에 대한 매우 피상적 접근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잘 그려내기 위해서 ‘노약자 보호석’과 관련한 방송멘트, ‘국가정보원’의 광고까지를 동원하지만, 이게 매우 지하철에서 ‘키노’와 ‘스크린’을 보는 학생들처럼, 모든 ‘오브제’처럼 보이고 들립니다. 작품의 ‘현실성’을 성취하기 위해서, “목적(objective)의 달성을 위해서 소모되는 도구(objet)라고나 할까요? 어쩌면 그러면 그럴수록 ‘실제적 현실’이 아니라 ‘관념적 현실’로 출발한 작품의 태생적 한계는 오히려 노출되는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지하철 1호선’은 결코 ‘응답하라’ 시리즈가 될 수가 없고, 되어 선 안됩니다. ‘응답하라’ 시리즈에선 그 시대의 보편적 경험(의식)을 전제로 합니다. 당시를 경험한 ‘자신’일지라도, 나와는 다른 ‘타인’의 삶을 심정적으로 깊이 이해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 땐 그랬지” 하면서, 페이소스가 느껴지는 공감을 만들어냅니다. 애환(哀歡), 곧 당시의 기쁨과 슬픔을 통해서, 한 시대를 건드리는 힘이 느껴집니다. ‘지하철 1호선’은 어떨까요? 이런 것을 목적에 두지 않는다고 얘기를 할지 모르나, 지금이 아닌 어떤 시대를 얘기할 때는 이런 건 ‘기본’이 아닐까요? ‘지하철 1호선’은 한 시대를 소환하기 위해서, 어떤 긍정적 장치와 치밀한 전략이 있었나요?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어떠한 ‘대(對) 사회적 목적’을 둔 작품인가요?

‘지하철 1호선’에서 스포츠신문 장면이 있습니다. 신문의 헤드라인이 “박찬호 허리 삐끗”입니다. 내게 이 작품을 ‘딱’ 이 신문의 헤드라인과 같습니다. 박찬호의 활약상이나 박찬호가 갖는 당대적 의미보다는, 박찬호와 관련한 가십이지요. 그리고 그런 ‘가십의 확대’가 이 작품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김민기님, ‘지하철 1호선’을 얘기하면서, 트리비얼리즘(trivialism)을 연결되었습니다.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은 탐구하지 아니하고 사소한 문제를 상세하게 서술’하는 것처럼, 내게 ‘지하철 1호선’이 그렇습니다. 그런 게 ‘응답하라’ 시리즈와 아주 다른 점입니다.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도 삼풍백화점이 나올 수 있고, 어른을 공경해서 자리를 양보하라는 공익광고도 나올 수 있고, 간첩신고와 연관된 대사와 상황도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트리비얼리즘’이 아닙니다. 그걸 통해서 작품이 지향하고자 하는 ‘리얼리즘’으로 가는 방법이지요. ‘지하철 1호선’을 보면서, “이제 김민기와 정태춘도 한물 갔어”라는 대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니, 어떻게 받아 들여주길 바랍니까?

‘지하철 1호선’을 보면서, 그저 웃으면 되는 장면을 내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지하철 1호선’은 한국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에 대해서도 예의를 저버린 느낌도 듭니다. 원래 ‘병태와 영자’라는 영화도 있긴 합니다만, 이 영화에선 세월이 지난 병태와 영자가 만나죠. 1960년대식 신파조 대사는 논외로 합시다. 고래사냥을 떠난 영철은 논외로 쳐도 좋습니다. 이걸 과연 1970년대를 치열하면서도 즐겁게 살려 했던 세대의 ‘1990년대적 초상(현주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지하철 1호선’에서 내(김민기)가 만든 병태와 영자는 다른 인물인데, 너(윤중강)는 왜 그것과 연결하느냐 하면서, 나의 태도를 탓하실 건가요?

‘지하철 1호선’의 시대적 배경이 된 1998년을 생각해 봅니다. 나는 결코, 1998년 11월을 그렇게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하철로 몸을 실으면서 버거운 시대를 살았던 ‘보편적 다수’의 삶과 너무도 유리되어 있습니다. 시대적으로는 물론, 작품적으로도 아쉽습니다.

‘지하철 1호선’은 장면마다 예측 가능합니다. 왜냐구요? 등장인물은 거의 ‘스테레오 타입’입니다. 등장인물 간의 관계도 ‘선악구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사와 연기는 곤객마다 다른 평을 하겠지만, 내겐 매우 ‘신파적’입니다. 이런 ‘신파적 연기’가 긍정적 미감(美感)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때론 어떤 한 개인 혹은 한 쪽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며 드러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상황에 동정을 얻기 위해서, ‘심적(心的) 구걸’을 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이 작품에서 매우 뜻있는 캐릭터인 ‘걸레’ 마저도, 후반의 대사와 노래가 매우 ‘넋두리’ 같았습니다. 남자배우의 여장(女裝), 술 취한 샐러리맨의 슬랩스틱은 딱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장치’ 이상이 되지 못해서 못내 아쉽습니다. ‘지하철 1호선’에선 정녕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날 순 없는 건가요? 지하철을 일상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저마다 지하철에서 그런 상황을 맞닥뜨린 경험이 있었을 겁니다. 왜 내겐 당신이 만든 ‘지하철 1호선’에선 뭉클하게 되지 못는 걸까요?

그건 아마 당신이 ‘지하철 1호선’ 보는 시각이 편향되어서 그런 걸 겁니다. 많은 걸 이분해서 보면서, 그 시대의 한 쪽을 대변하려 하기 때문인 거죠. 이 작품에서 1998년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저 ‘편 가르기’입니다. 그런 토대 위에서, 한 편은 과장되고, 한 편은 거세된 것이죠. 따라서 작품의 애초에 리얼리티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지하철 1호선’에서 최악의 장면은 1막의 끝이었습니다. 지하철과 관련한 방송이었죠. 아마 당시 조순시장을 염두에 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 공연에서 보는 모습은, ‘이주일’스러운 용모와 ‘김대중’스러운 말투의 결합이었습니다.

‘예의 없는’ 막간극입니다. 이주일과 김대중이란 인물이 살아 있을 땐, 이런 건 풍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이 지금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실제 그 분들이 생전에 한 말도 아닌 것을, 그저 ‘우스꽝스럽게’ 하려는 일념으로 진행하는 장면은 대단히 유감스러웠습니다. 왜 이런 ‘지하철 1호선’을 우리가 봐야 할까요?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고, ‘무엇을 위해서’ 계속되는 겁니까?

누군가는 이 글을 보면서, 내가 김민기님에 대해 대단한 악감정을 가지고 쓴 글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겠네요. 나는,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무지 좋아하는 일인입니다. 그것에 관한 호평의 글을 쓴 바도 있구요. 거기엔 ‘현실성’을 전제로 한 ‘시대’와 ‘사람’이 있었습니다. ‘힘든 어제’와 ‘참된 오늘’, 나아가 ‘복된 내일’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이건 ‘실제를 토대로 만든 작품’이죠.

‘지하철 1호선’은 출발부터 한계를 가지고 있는 작품은 아닐까요? 지하철 1호선은 ‘부분확대’입니다. 지하철의 어떤 한 면을 ‘만화경’처럼 부분을 확대했습니다. 이거 자체는 좋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그것을 마치 전부 인양처럼 보이기 합니다. ‘부분확대’가 그 상태로 머물면 그만이지만, 그것이 그렇게 존재하지 않으면 ‘전체왜곡’의 소지가 충분한 것이지요. ‘지하철 1호선’은 지하철 혹은 한 시대에 대한 침소봉대(針小棒大)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나요? 작품에 대한 애정을 반성적 시각을 통해서 발언한 사람은 없었나요?

작품 속 개별 인물은 함구하려 하지만, 주인공 ‘선녀’만큼은 얘기하지 않을 수 없네요. 너무도 신파의 극치이기 때문입니다. 선녀 이후 탈북여성 목란언니(2015)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선녀의 순수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인간의 다층적 심리가 실종된 느낌입니다. 가련키보다 답답함이 더 큰 거죠.

한국영화 ’미워도 다시한번‘(1968년)과 여주인공 혜영(문희)을 알고 있나요? 그건 시대성의 반영이요, 나름의 공감의 폭이 넓었습니다. ’지하철 1호선‘의 선녀는, ’미워도 다시 한번‘의 혜영(문희)보다도 사회적 의미로 보나, 젠더적인 의미로 보나 한참을 후퇴하거나, 제대로 다루기조차 머쓱한 여성입니다.

지하철 1호선이 멈춰야 하는 이유는 참 많습니다. 이 작품에 관해서 정말 ’광장‘ 혹은 실제 토론의 장이 열려도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지하철 1호선‘은, 뉴스로 보기엔 팩트가 부족하고,
다큐로 보기엔 취재가 부족하고, 극으로 보기엔 갈등이 부족하다.” 그러니, 이제 제발 ’지하철 1호선‘을 멈춰주십시오. ’지하철 1호선‘이란 작품이 갖는 과거의 영예를 아름답게 간직하면서, ’시대적 의미‘만큼은 소중히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