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국의 국악담론] 운학(雲鶴) 이동안(李東安)의 자리매김이 필요하다
[김승국의 국악담론] 운학(雲鶴) 이동안(李東安)의 자리매김이 필요하다
  • 김승국 노원문화예술회관장
  • 승인 2019.01.18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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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국 노원문화예술회관장

흔히 한성준(韓成俊, 1875?-1941)을 우리 '근대 한국춤의 아버지' 혹은 ‘근대 한국춤의 비조(鼻祖)’라 부른다. 그가 창안하거나 재구성한 춤들은 우리춤 중에서도 탁월하고 정통성 있는 춤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 중 승무와 태평무가 후대에 각각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와 제92호로 지정되었으니 ‘한국춤의 비조’라 부를 만도 하다. 

그러나 한성준 보다 더 먼저 근대 한국 춤의 문을 열었던 당대의 명무(名舞)이자 안무가였던 김인호(金仁鎬, 1855?~1935?)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김인호는 용인 태생으로 화성재인청 출신으로 어전(御殿) 광대의 반열에 올랐던 인물이다. 1902년 서울에 세워졌던 우리나라 최초의 옥내 극장인 협률사(協律社) 단원으로 전국을 유랑하며 각종 민속연희에 참가한 유랑광대이자, 1898년경에 세워져 1930년까지 문을 열었던 광무대(光武臺) 의 인기 있는 재인이기도 했다. 

그의 출생년도와 사망년도의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그의 스승이 19세기 최고의 예인으로 명성을 날린 이날치(李捺致, 1820-1892)라는 점, 광무대 시절 기록이 1914년에 집중적으로 매일신보에 그에 관한 기사가 나오다가 1930년에 한 번 나오고 아주 끊어진 점, 순종 때 그의 어전광대로서의 일화가 전해지는 점 등 관련 문헌자료로 미루어보면 1855년쯤 태어나 1935년쯤 별세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성준이 1875년생이니 김인호는 한성준보다 스무 살 연상으로서 춤에 있어서도 한참 선배인 셈이다. 한성준이 김인호의 춤반주를 하였다하니 당시 김인호의 위상을 알만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성준을 아는데 김인호를 왜 모를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의 제자들의 활동상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한성준의 직계 제자이자 외손녀인 한영숙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국에서 승무로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되었고, 역시 그의 직계 제자인 강선영도 태평무로 예능보유자가 되어 스승인 한성준을 한국 근대 춤의 아버지 혹은 비조'로 자리매김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한영숙은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장차 한국춤계의 지도자가 될 인재들을 양성하였고, 그녀의 제자 이애주와 정재만도 스승의 대를 이어 예능보유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애주는 서울대학교에서 정재만은 숙명여자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학을 양성하였고, 강선영의 제자들도 여러 대학에 포진하여 후학을 양성하여 한성준의 위상은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

당대의 춤의 명인으로 자리매김했던 김인호 역시 많은 제자를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 이동안(李東安, 1906~1995)이 가장 특출하였다. 이동안 역시 김인호와 같이 화성재인청 출신으로 1922년 광무대로 진출하여 김인호로부터 전통춤과 장단을, 김관보(金官寶)에게 줄타기를, 장점보(張點寶)에게 대금, 피리와 해금을 배웠으며, 방태진(方泰鎭)에게 태평소를, 조진영(趙鎭英)에게 남도잡가를, 박춘재(朴春在)에게 발탈을 배워 다양한 예능에 두루 능했다. 

이동안이 김인호로부터 전수받은 춤은 태평무, 승무, 진쇠춤, 검무, 살풀이춤, 엇중모리 신칼대신무, 한량무, 승전무, 성진무, 학무, 화랑무, 신로심불노, 희극무, 장고무, 기본무, 노장춤, 신선춤 등 대략 17종으로 알려져 있다. 

이동안이 생전에 기억하고 있던 재인청류의 춤은, 기본무, 살풀이춤, 승무, 태평무, 엇중모리 신칼대신무, 한량무, 성진무, 화랑무, 도살풀이, 검무, 남방무, 선인무, 팔박무, 진쇠무, 승전무, 장고무, 노장무, 소고무, 희극무, 아전무, 바라무, 나비춤, 장검무, 신노심불로, 입춤 신선무, 오봉산무, 학무, 하인무, 춘앵무, 화선무, 포구락무, 연화대무 등 41여종에 이른다. 

이동안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보유한 다양한 춤을 아낌없이 전승하였고, 생전에 춤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1983년에 국가무형문화재 발탈로 예능보유자가 되어 지내다 1995년 세상을 떠나니 그의 스승인 김인호도 역시 한국춤계에서 조명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춤계가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쪽으로 줄을 서는 상황에서 이동안이 죽고 난 후 그로부터 춤을 배웠던 김백봉, 장월중선, 최현, 김덕명, 문일지, 배정혜, 정승희, 김백초, 최경애, 김진홍, 오은희, 김명수 등은 이동안이라는 구심점을 잃자 전승의 힘을 잃고 대부분 각자 제 갈 길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히 이동안의 직계제자인 정경파가 승무와 살풀이로 1996년 경기도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가 작고하고 지금은 김복련으로 이어져 전승을 지속하고 있고, 윤미라, 정주미, 이승희, 박경숙, 박경현, 이선영 등이 전승을 이어가고 있으나 이동안이 남긴 수많은 춤들은 전승기반이 너무나도 허약하다.  

이동안은 악·가·무·희·극(樂·歌·舞·戱·劇)에 두루 명인이었으나 특히 춤에 있어서는 불세출의 명인이었다. 그가 춤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되지 못한 것이 개인적으로는 그에게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춤계에서도 큰 손실이 되고만 것이다. 

많이 늦었지만 한국춤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이동안의 춤을 재조명하여, 이제라도 그의 다양한 춤의 온전히 전승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전승기반을 마련해주는 등 정당한 자리매김을 해주어야할 것이다. 이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