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담 부흥, 혼자서는 어려워…‘젊은 세대’와 함께 만담 가치 알리는 것이 사명”
지난해 ‘한국전기수협회’ 발족, “서울광장서 책과 함께 전기수가 전하는 ‘세종대왕’ 무대 꿈꿔”
“美 롱비치 빅토리호 무대로 해외 공연 꿈꿔, 교포 예술인과 함께하고파”
‘정해복지’서 36년간 상임고문 맡아…라이따이한 교육ㆍ국내외 저소득층 지원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ㆍ진보연 기자] “우리 아버지가 장에 소 팔러 간 사이 어머니가 나를 낳았다고 해서 장소팔이야. 내 이름이 소팔이고 형님은 중팔이고 아버지는 대팔이고, 우리 할아버지는 곰배팔이랍니다.”
서울시 중구 성동공고 옆 길모퉁이를 돌면, 벤치에 앉은 채 손짓하는 친근한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바로 국민 만담가 故 장소팔(본명 장세건ㆍ1922~2002) 선생이다. 과거 개그 프로그램에서 두 명이 짝을 지어 말로써 웃음을 선사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러한 형태의 원형은 ‘만담’으로 재치 있는 말로 세상을 풍자하는 언어예술이다.

한국전쟁 이후 이어진 독재의 폭압과 배고픔으로 국민들이 어둠을 헤매던 1960~70년대, 장소팔 선생은 입담 하나로 서민들을 울리고 웃겼다. 고춘자 선생과 나란히 무대에 서서 가늘게 웃는 눈으로 두 팔을 앞뒤로 흔들며 쏟아내던 만담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TV의 자리를 라디오가 대신하던 시절, 사람들은 피곤한 일상을 보내면서 장소팔의 만담 시간을 기다렸다. 라디오도 흔치 않아서 마을에 라디오 있는 집으로 모였다.
그러나 만담은 1970년대 이후 급속한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 TV 영향력이 커지면서 차츰 사람들의 기억에서 흐려졌다. ‘아재개그’로 분류되며 젊은 세대에겐 시시한 말장난으로 보일지라도, 한 시대의 웃음을 책임졌던 그 위안의 공을 기억하고 이어가는 이들이 아직 우리 곁에 있다.
장소팔 선생의 차남 장광팔(본명 장광혁) 만담가는 ‘만담보존회’를 통해 우리 전통 만담의 역사를 계속 쓰고 있다. 그는 ‘장에 소 팔러 갔다가 나왔다’는 선친의 예명 장소팔 어원을 차용해 ‘장에 광 팔러 갔다가 나왔다’는 뜻을 담은 예명인 장광팔을 사용한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법률 출판사도 차렸었고, 법률신문사 출판사업단 대표로도 일했다. 중대형 서점부터 잡지사, 공연예술 감독, 가수 매니지먼트 등 여러 일들 중에도 아버지의 공연을 위한 대본 작업을 돕는 일을 병행했다. 이를 통해 부친의 삶을 이해하게 됐고, 명맥을 이어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됐다. 만담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늦은 나이에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과정을 밟았고 <장소팔만담연구> 논문을 썼다. 선친의 활동기를 책으로 엮은 ‘서울의 전통문화 장소팔 만담’도 저술했다. 이외에도 만담의 명맥을 잇기 위한 그의 활동은 다방면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7월에는 ‘한국전기수협회’를 발족했다. 시각적 매체의 발달로 전기수의 명맥이 끊겼지만, 그는 여전히 낭독극이나 오디오북 등 ’말로 전하는 이야기’의 특성이 강조된 매체로 활용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만담’과 더불어 장광팔을 이루는 또 하나의 줄기는 바로 ‘정해복지’이다. 이곳에서 그는 36년간 상임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라이따이한(Lai Đại Hàn) 아이들의 교육과 자립을 위한 학교 설립으로 시작된 이 재단은, 해외지원봉사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어린이ㆍ청소년 및 어르신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아울러, 문화예술과 연이 깊은 그는 특기를 살려 어르신을 위한 음악극, 시설아동을 위한 공연 관람 등의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웃음이 소비되지 않는 사회가 됐다”라고 말하면서도, 비극적 상황 가운데 있는 웃음의 중요성을 아는 장광팔은 지금이야말로 ‘웃음이 필요한 때’라고 힘주어 말한다. 세대를 넘어 ‘한국적 유머’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그를 만나,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만담이 필요한 이유를 들어봤다.
KBS 아침마당ㆍ황금연못 출연, ‘거창마을영화제’ 무성영화 변사 참여, 음반 발표 등 대중에게 만담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만담가라는 직업 자체가 생소할 수 있는 요즘 세대를 위해 소개를 부탁한다.
흔히들 만담과 코미디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도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만담은 재미있는 말로 세상을 풍자하고 인정을 비판하는 이야기가 더해진 것이다. 근원은 광대소학지희(廣大笑謔之戲)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 시대 고종 때 재담의 대가 박춘재가 1세대로 꼽힌다. 이어 일제강점기 신불출, 광복 이후에는 장소팔이 흐름을 이어갔다.
본래 소리꾼이었던 박춘재 선생의 재담으로부터 시작된 민요 만담의 형식은 장소팔 선생으로 와서는 그 형태가 조금 변형됐다. 장소팔 선생이 먼저 만담을 하면 중간에 소리꾼이 소리를 하고 다시 만담이 이어지는 식의 극 형태가 자연스레 이뤄졌다.
중국ㆍ일본의 만담과 구별되는 우리나라 만담만의 특징 중 하나는 ‘바보’ 역할이 없다는 것이다. 상대를 바보 만드는 것으로 웃음을 유발하지 않고, 서로 대등한 관계의 보통 사람들이 등장해 ‘배려’하며 소소한 이야기로 재미를 이끌어낸다. 또한 우스갯소리를 하되 실없는 소리로 채우는 게 아니라 사회 풍자를 통해 날카로운 메시지를 함께 전한다.
청각적 언어에서 시각 언어로 소통의 수단이 변하는 시대적 흐름 가운데, 만담은 오디오를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어 비주얼에 대해 불가항력적 측면이 강했고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흘러가게 됐다. 점차 만담과 코미디의 차이점을 사회에서도 인식하지 못하고, 심지어 학계에서도 큰 관심을 받지 못하다 보니 점점 외톨이가 되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만담에 대한 연구와 정리가 그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고, 누군가 정리를 하지 않으면 언젠가 소멸될 거라고 생각했다. 환갑이 넘어 진주교육대학원에 들어갔고, 이후 2018년에 <장소팔만담연구> 석사 논문으로 만담의 역사를 기록하게 됐다.

아버지가 우리나라 만담의 전설로 꼽히는 장소팔 선생이다. 아버지의 무대가 기억나는지. 만담에 대한 첫 기억이 궁금하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만담 속에서 자랐다. 워낙 어린 시절부터 만담 무대를 봐왔던 터라 첫 기억은 남아있지 않지만, 나에게 만담은 특별함보다는 익숙한 자연스러움이다. 당시엔 대본 작가도 없고 복사기도 없었으니, 아버지가 200자 원고지 아래에 먹지를 깔고 쓰시면 그걸 모아서 내가 고춘자 선생한테 갖다 드렸다. 대본을 각자 댁에서 연습하신 후, 우리 집에 모여서 함께 맞춰보시고 식사하신 후 방송국에 가시는 게 일상이었다. 당시 아버지께서 일본 등 외국 동포들을 위한 공연도 자주 가셨는데, 종종 따라가기도 했다. 이처럼 만담은 예전부터 그냥 특별할 것 없이 언제나 나의 삶에 착 붙어 있는 존재였다.
아버지가 태어난 중구는 예부터 소리꾼과 풍물패가 오가던 곳으로 유명해 서울에서도 만담의 중심지로 역할을 했다. 황학동(전 상왕십리)과 그 인근 지역은 장안의 내로라하는 이야기꾼과 소리꾼들의 집성촌이었다. 이곳에는 채소를 저장하기 위해 만든 반지하 공간인 움막이 있었는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 인기가 좋았다. 특히 소리 방음도 잘 되어서 예인들이 연습도 하며 아지트처럼 쓰였다. 집에 발탈 박해일, 배뱅이 굿 이은관, 선소리 산타령 이창배, 중고재 판소리 박동진, 경기민요 이은주ㆍ묵계월ㆍ안비취 선생 등 아버지의 동료 예인들이 자주 오셨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대학 졸업 후 법률출판사를 세웠고, 중형 서점도 운영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다 ‘만담가’라는 직업을 택하게 된 것에는 아버지의 영향도 있는지.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쓰고자 하는 욕심은 많았다. 중학생 때는 신춘문예 바람이 들어서 소설을 쓰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도 했었다. (소설가) 최인호 선배의 영향이었다. 그 분이 고등학생 때 <벽구멍>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됐으니, 나는 중학교 때 좀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달빛 소나타’라는 작품을 썼는데 당연히 떨어졌다. (웃음) 경기중학교와 동성고등학교를 거쳐, 장학금을 받고 단국대에 들어가게 됐다.
같이 고시 공부하던 친구들은 법조계에서 잘나가지만, 예체능계로 사는 내가 제일 행복해 보인다. 법률 출판사도 차렸었고, 법률신문사 출판사업단 대표로도 일했다. 중대형 서점부터 잡지사, 공연예술 감독, 가수 매니지먼트 등 망하는 짓만 골라서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모아두신 돈을 많이 날렸다. 아버지께선 ‘네가 주색잡기에 날린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다 그런 거니 괜찮다’라고 오히려 격려해 주셨다. 그래도 아버지 돈 쓴 게 죄송해 말년에 내가 대본을 직접 써드리곤 했다. 라디오 방송처럼 전 세대가 듣는 방송이 갈수록 많아지니, 내가 써드려야 젊은 세대와의 소통도 더 수월했다. 같이 무대에 서진 않았지만, 일련의 작업 과정을 통해 부친의 삶을 이해하게 됐고, 명맥을 이어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됐다.
선친이신 장소팔 만담의 대표적 특징인 ‘남녀 만담’ 형식과 ‘빠른 속도의 나열 방식’, ‘서울 토박이 말투’ 그리고 ‘민요 삽입’의 방식은 나의 공연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전통적 공연 장르인 재담에 음악, 연극, 영화 등의 장르가 더해진 장소팔 만담의 형식에 나만의 방식을 더해 시대에 맞는 계승을 하고 있다.

지난 3월 인사동에서 <어머님의 손을 놓고> 공연과 더불어, 도쿄와 오사카에서의 초청 공연 계획을 알렸다. 당시 “3국 이야기 문화의 국제교류를 도모하고 있다”라고 밝힌바 있는데 이에 대한 진행 상황이 궁금하다.
아쉽게도 올해 일본 공연은 성사되지 못했다. 전국의 사람들이 모이는 마츠리(축제) 기간에 공연을 할 계획이었는데, 공식적인 라인이 없으면 제대로 설 수 있는 무대가 없더라. 괜히 어설프게 가서 조그마한 공연장에서 해봤자, 눈에 띄지도 않을 것 같아 공연 계획은 내년으로 미뤘다. 대신 인사동에서 일본 라쿠고 명인과 함께 공연했고, 중국 유학생 왕결청의 서울대 박사 논문 <중국의 샹성과 한국의 만담> 집필에 도움을 준 것으로 자족했다.
일본 공연과 더불어 계획하고 있는 또 하나의 해외 공연은 바로 미국 롱비치에 있는 빅토리호를 무대로 하는 것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12월25일, 피란민 1만 4천명을 태우고 흥남부두를 떠난 미국 배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거제 장승포항에 도착했다. 배가 이동한 이틀 남짓한 시간 동안 그 안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고, 미국인들은 아이들에게 ‘김치 파이브’라는 별명을 붙여줬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를 참전용사 유가족들과 함께 기억하고, 교포들과 함께 기리기 위해 선상 공연을 하고자 한다. 미국에서 초청도 받았는데, 비용 문제가 아무래도 걸리는 지점이다. 공연에 필요한 인원을 최소한으로 꾸리고, 현지 교포들과 함께 무대를 꾸미는 방향으로 기획해보려 한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꼭 선보이고 싶은 공연이다.
지난해 7월 ‘한국전기수협회’가 발족했다. 만담가와 전기수는 그 성격이 비슷한 듯 조금 다른데, 전기수협회는 어떻게 탄생하게 됐나. 조선 후기 18~19세기에 글을 모르던 백성들에게 책이나 시대 이야기를 전하던 ‘전기수’인데 요즘에도 활동하는 전기수가 있는지.
지금은 전기수(강담사, 강창사, 강독사)로 활동하는 분이 없다. 전기수라는 직업 자체가 글을 모르거나 책이 비싸서 살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존재했는데, 시대가 변하며 이러한 필요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형식이 매력적이라 성우들을 중심으로, 전기수협회를 만들게 됐다. 과거와 현재에서 전기수가 필요한 이유는 다를지 몰라도 여전히 수요가 있는 직업으로 생각한다. 오디오북이나 낭독극이 그 예가 될 수 있겠다. 나아가, 이를 특화시켜 무성영화나 악극, 만담, 재담의 현대화를 꾀해도 좋을 것 같다.
더불어, 서울시청 앞 잔디광장에 야외도서관과 함께 마련된 별도 무대에서 진행되는 라이브 공연에 전기수의 무대도 포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책’이라는 공통분모를 활용한 전기수의 공연이 더해진다면, 우리의 전통 직업을 알리면서 책 읽는 분위기와도 어우러져 좋을 것 같다. 한글날이 있는 10월에 세종대왕을 주제로, 관련된 책을 출판사 별로 비치하고 전기수가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하면 남녀노소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현대적 전승에 성공한 일본의 만자이와 달리, 우리나라는 코미디 프로그램마저 공중파에서 자취를 감췄다. 젊은 세대의 웃음코드를 잡으면서도 만담의 전통적 명맥을 잇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만담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상태고, 지금으로써는 코미디도 공중파에서는 거의 사라졌다. 현실이 너무 코미디라 그런 것 같다. (웃음) 이제 더 이상 웃음이 소비되지 않는 사회가 됐다. 이건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비극 속에서도 웃음 코드, 즉 골계미가 들어가야 비장한 맛이 더 사는 법인데 이게 다 사라졌다.
만담의 부흥을 현실화하는 것은 혼자 힘으로 될 일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한다. 다만, 만담이라는 이야기 문화 형식이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젊은 친구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전을 현대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세태 풍자 만담극 <리어카를 탄 리어왕>, <테스 형수> 등을 선보이고 있다.
재담과 만담의 차이는 무엇인가.
만담의 뿌리가 재담이다. 재담이 만담으로 되고 만담이 다시 희극이 됐다. 희극이 지금의 코미디와 개그이다. 이는 장르 각각의 차이가 아닌 시대에 부합해 발전해 나간 과정이다. 20세기 초 박춘재 선생에 의해 연행되던 재담소리는 제자들에 의해 복원되어 계승되고 있다. 서울특별시무형유산 보유자로 2008년 백영춘 이후, 2017년 최영숙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아쉬운 점은 박춘재 선생은 과거 ‘발탈’을 이용해 팔도강산 유람을 다녔는데, 후대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장대장 타령’만 부각된다는 것이다. 재담소리 공연에 가면 대부분 ‘장대장 타령’만 한다. 문화재로 지정해 이를 지켜나가는 것도 좋지만, 과거의 유산이 이 시대에서도 사랑받고 기억되기 위해서는 현대화하려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악이 점점 젊은 세대로 흐르는 것도 정통 소리를 보존함과 동시에 새로움을 수용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이다. 오직 우리나라에만 있는 ‘발탈’에도 후배들이 많은 관심을 보여, 다양한 형태로 현대화 되었으면 한다. 나의 경우, 2년 전 발탈 전승 교육사(준문화재) 문영식 선배와 어린이 발탈 공연을 한 바 있다.

명함을 보니 다양한 직함이 눈에 띈다. 만담 외 어떤 다양한 일을 하는지 궁금하다.
정해복지에서 36년간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2007년에 정해복지 20년사를 정리해 책으로 냈는데, 벌써 40년사를 준비하고 있다. 아주 우연한 계기로 라이따이한(Lai Đại Hàn)과 마주한 뒤, 이충범 변호사가 설립하고 지금은 강한승 이사장이 이끄는 복지법인이다. 학교를 세워 아이들이 먹고 살 수 있게 돕자는 것이 처음 취지였다. 한국과 베트남 간 수교가 이뤄지기 이전인 1991년, 기술 학교 설립이 처음 추진됐고 1997년 4월 ‘정해기술학교’ 1기 입학식이 진행됐다. 대기업의 후원을 받아 사용하지 않는 컴퓨터들을 정비해 학업에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또한, 고장난 자동차를 보내면 정비 학과에서 실습용으로 이를 활용했다. 이와 더불어 한글 교육과 태권도 1단을 의무 교육으로 가르쳤다. 이후 학교는 2008년 3년제에 이어, 2015년에는 투득공과대학으로 승격됐다. 이제는 학교를 직접적으로 운영하지 않지만, 여전히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
해외지원봉사 뿐만 아니라 탁아소, 고아원 퇴소 아이들을 위한 중간의 집, 청소년 사업, 농촌무료진료, 휠체어 1000대 보내기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함께했다. 이제는, 문화예술과 연이 깊은 나의 특기를 살려 어르신을 위한 음악극, 시설아동을 위한 공연 관람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지난 10월 말에는 ‘어머님의 손을 놓고’ 공연을 개최했는데, 공연의 취지를 알고 동료 배우ㆍ연주자들이 소정의 출연료만 받고 함께해줬다. 주위에서 뜻을 함께해주시는 많은 분 덕분에, 오랜 기간 문화예술을 세상에 나눌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년의 계획과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
젊은 친구들과 우리의 전통 이야기를 소재로 한 만담 기반 총체극을 만들고 싶다. 전국 순회공연도 다니고, 해외에도 이를 알릴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더불어, 앞서 말한 미국 빅토리호에서 ‘어머님의 손을 놓고’를 꼭 선보일 수 있길 바란다. 꼭 그곳뿐 아니라 전 세계를 유람하며 전통과 역사를 담은 공연으로 우리 문화를 알리고 싶다. 내가 하는 것도 좋지만 젊은 친구들이 만담에 관심을 가져준다면 어떻게든 도우려 한다. 돈 안 받고 대본을 써줄 의향도 있다. (웃음) 우리나라 만담의 가치를 알고 함께 이야기를 이어갈 이들을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