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심청ㆍ춘향ㆍ놀보가 한 자리에”…국립극장 ‘마당놀이 모듬전’

유행가와 밈 반영한 ‘고전의 현대화’, 웃음 소재 선정에는 아쉬움 남겨

2024-12-10     진보연 기자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 그야말로 연말 맞이 종합 선물 세트 같은 공연의 막이 올랐다. 4년 만에 관객들 곁으로 찾아온 국립극장 마당놀이는 ‘모듬전’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심청이 온다>, <춘향이 온다>, <놀보가 온다> 세 작품의 가장 대표적이고 흥미로운 장면을 엮었다. 극은 세 이야기의 공통분모를 찾아 이를 매개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들이 교차하며 전개됐다.

▲국립극장

마당놀이는 우리 고전을 현대적인 감각의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내면서 노래와 춤 등 우리 고유의 연희적 요소를 더한 공연이다. 손진책 연출을 비롯해 극작가 배삼식, 안무가 국수호, 작곡가 박범훈 등 마당놀이 신화를 일궈온 제작진들이 의기투합하고 ‘마당놀이 스타 3인방’ 윤문식ㆍ김성녀ㆍ김종엽이 다시 뭉쳤다. 

개막을 하루 앞둔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는 ‘마당놀이 모듬전’ 전막 시연회가 진행됐다. 마당놀이가 낯선 관객도 객석에 들어서는 순간 공간에 적응할 수 있을 정도로, 공연 전부터 자유로운 분위기가 연출됐다. 일부 배우들이 객석을 누비며 엿을 팔았는데, 즉석에서 현금을 건네는 관객들이 적지 않았다. 다른 공연에서는 볼 수 없는 진풍경 중 하나이다. 객석 상단에 자리한 오케스트라 피트는 공연장 분위기를 더욱 흥겹게 만들었다. 연주자들은 배우들과 어우러져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국립극장

부채꼴 형태로 설치된 기존 하늘극장 객석에 가설 객석을 더해 관객이 무대를 완전히 감싸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무대 상부에는 지름 19m의 천으로 만든 거대한 연꽃 모양 차일을 설치해 전통적이면서도 감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무대 바닥 일부에는 LED 패널을 설치해 젊은 감각을 더하고, 다양한 이야기 속 시공간의 변화를 영상으로 표현해 관객의 몰입감을 높였다.

‘춘향전’의 춘향이와 몽룡이가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초야를 치르려는 순간, ‘심청전’의 심봉사가 별안간 등장한다. 심봉사의 품에 안겨있던 갓난아기 심청이는 어느새 어엿하게 자라 아버지 대신 동냥을 하러 다닌다. 그 장면에서 심청은 흥부네 부부와 마주친다. 이렇듯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 속 인물들이 서로 교차되며, 극은 새로우면서도 익숙한 서사로 진행된다. 

심청이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할 공양미 300석을 위해 선인들에게 자신을 팔기로 결정하고 심 봉사와 함께 들어가는 순간, 이몽룡이 곡소리를 내며 등장했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져 연꽃에 감싸지는 순간, 흥보 마누라는 연꽃 꿈을 꾼다. 놀보가 회개의 뜻으로 잔치를 열기로 하자, 장원급제한 이몽룡이 등장한다. 황후가 된 심청은 심 봉사를 그리워하며 노래하고, 옥에 갇힌 춘향은 몽룡을 기다리며 노래하는 모습이 교차하여 동시에 진행된다. 

▲국립극장

국립창극단을 대표하는 민은경, 이소연, 김준수, 유태평양, 조유아 등의 출연은 신의 한 수였다. 어지러울 수 있는 세 이야기의 조합은 창극단 배우들의 개성있고 뛰어난 연기력과 소리로 각기 다른 고전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특히 춘향 역을 맡은 이소연의 ‘쑥대머리’는 객석을 단숨에 압도하며 춘향의 서사로 몰입하게 만들었다.

작품 곳곳에 녹아든 현대적인 요소도 재미를 전한다. 심봉사는 태블릿 PC로 공양미 300석을 바친다는 계약에 서명했고, 놀보는 골프채를 들고 흥부를 내쫓았다. 기생점고 장면에서는 최근 국내외 각종 차트를 휩쓴 가수 로제와 브루노 마스의 ‘아파트’와 숏츠 챌린지 음악 ‘마라탕후루’를 활용한 음악이 흘러나와 다소 당황스럽긴 했지만, 객석에 예상치 못한 웃음을 안겼다.

마당놀이의 대표적 특징이 되는 해학과 풍자가 잘 녹아있어, 공연 내내 관객들의 웃음을 자연스레 유발했다. 다만, 극 중 유행가나 밈(Meme)을 다수 녹여낸 만큼 대사 혹은 애드리브도 시대에 맞게 변화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극 중 심봉사 역의 윤문식은 객석의 여자 관객에게 젖 동냥을 한다. 극의 설정과 관객의 참여가 어우러져 공연의 즉흥성이 발휘될 수 있는 장면이지만 “젖 주세요”라는 직접적 표현을 여성 관객에게 수차례 반복함으로써 웃음 대신 당혹감과 불쾌감이 앞섰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설정을 활용해 차라리 남성 관객에게 이 대사를 건넸다면 출연진이 원하던 웃음이 나오지 않았을까. 

▲국립극장

더불어, 춘향전의 기생점고 장면도 어설픈 현대화로 모호함을 남겼다. 첫 번째 기생은 임산부, 두 번째 기생은 남성, 세 번째 기생은 할머니였다. 이들은 각각 저출생 특례, PC(정치적 올바름ㆍPolitical Correctness) 특례, 경로 우대로 참여했다고 밝혔다. 재미를 위한 요소로 포함된 장면인 것은 알겠으나, 임산부와 남성 그리고 노인은 모두 기생이라는 직업과는 거리가 멀다. 특례라는 단어와 저들의 상황은 전혀 맞지 않는다. 여전히 ‘뜨거운 감자’인 사회적 현상을 단순한 웃음의 소재로 이용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고전이 2024년 관객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아직 해소되지 못한 간극이 분명 존재했으나, 그럼에도 “응급실에 갔는데 의사가 없다”, “너 요즘 법대로 되는 거 본 적 있느냐” 등 사회현상을 꼬집으며 마당놀이 특유의 해학과 풍자를 살린 장면들이 공연의 맛을 더했다. 공연의 마지막, 커튼콜에서는 관객들을 무대로 불러 함께 어우러지는 장관을 이룬다. 중간중간 아쉬움이 있었음에도 극의 시작과 끝에는 관객들을 중심에 두었다는 점에서 ‘마당놀이’의 정체성이 부각됐다. 국립극장이 앞서 지적한 사항들을 세심하게 살피어 세대를 아우르는 공연으로 매년 연말을 흥겹게 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