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관객 만나는 ‘젊은 하종현’…아트선재센터 《하종현 5975》展 
젊은 관객 만나는 ‘젊은 하종현’…아트선재센터 《하종현 5975》展 
  • 김연신 기자
  • 승인 2025.02.17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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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4.20, 아트선재센터
1959년부터 1975년까지…초기 작업 40여 점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앵포르멜 작업부터 초기 단색화 작업까지, 하종현의 초기 실험 정신과 물질적 탐구의 여정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열렸다. 아트선재센터는 오는 4월 20일까지 하종현의 초기 작업(1959–1975)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전시 《하종현 5975》를 개최한다. 

▲하종현 작가
▲하종현 작가

이번 전시는 하종현이 다룬 물질과 회화적 기법이 당시 한국의 시대적 맥락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발전했는지 탐구한다. 하종현의 초기 작업은 한국전쟁과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라는 한국 현대사의 격동에 반응하며, 다양한 재료와 물질성에 대한 실험을 확장해 왔다. 그의 작업은 사회적 현실과 개인적 경험을 재구성하고, 회화의 가능성에 질문하는 실험적 시도로 가득 차 있다.

전시는 1959년 하종현이 홍익대학교를 졸업한 직후부터 현재 그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접합〉 연작을 시작한 1975년까지의 기간을 총 네 시기로 구성됐다. 

1부: 전후의 황폐한 현실과 앵포르멜(1959–1965)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1950년대 후반, 하종현은 당시 유럽에 등장해 정형화된 회화의 틀을 깨고 물질성을 강조한 앵포르멜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앵포르멜을 한국적 맥락에서 재구성하여 전후 한국 사회의 혼란과 상처를 작업에 담아냈다. 두꺼운 물감과 불에 그을린 표면, 어두운 색조를 활용하여 시대적 불안을 화면 위에 구현했다. 이는 전쟁과 사회적 혼란이 남긴 집단적 기억을 재료와 행위를 통해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시도였다. 이러한 초기 작업은 이후 하종현이 물질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회화의 경계를 확장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됐다.

▲하종현, 자화상, 1959,  캔버스에 유채, 63 x 40 cm. 작가 제공.
▲하종현, 자화상, 1959, 캔버스에 유채, 63 x 40 cm. 작가 제공.

 2부: 도시화와 기하학적 추상(1967–1970)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하종현은 도시화와 경제 성장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를 작업의 주제로 삼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대표작 중 하나인 〈도시계획백서〉 연작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으로 인한 급격한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을 구조적 형태로 추상화한 작업이다. 하종현은 도시의 형성과 변화를 강렬한 색채와 반복적인 패턴으로 시각화하며, 새롭게 만들어지는 도시적 경관의 역동성을 표현했다. 비슷한 시기에 작업한 〈탄생〉 연작은 단청 문양과 색조, 돗자리 직조 기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전통적 미학과 현대적 조형 언어의 조화로운 융합 가능성을 탐구했다. 〈도시계획백서〉와 〈탄생〉연작은 근대화로 인해 소멸해 가는 전통과 새롭게 형성되는 근대화적 구조라는 상반된 두 요소를 동시에 보여준다. 또한 캔버스를 이어 붙이거나 캔버스 하단을 구부리는 등 회화의 고정된 형식을 넘어서는 실험 역시 지속됐다.
    
3부: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새로운 미술 운동 시기 (1969–1975)

1969년, 하종현은 비평가 이일 등 총 12명의 작가와 이론가로 구성된 한국아방가르드협회 (AG)를 결성하며 미학적, 철학적 교류를 넓히고 작업의 영역을 확장했다. AG는 당시 한국 현대미술에서 실험적 작업과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예술가들이 모여 함께 협회지를 발간하고 전시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현대미술의 지평을 넓히고자 했다. 하종현은 철망을 비롯해 신문, 휴지, 시멘트 가루, 스프링 등 한국 사회를 반영하는 다양한 일상적 재료를 사용한 실험적인 작업을 통해 당시의 경직된 사회와 언론 검열, 사회적 억압을 은유적으로 드러냈다. 이번 전시에서는 현재 도면으로만 남아 있는 거울 설치 작업 〈작품〉(1970)을 재현하여 AG의 첫 전시였던 《70년 AG전》(1970) 이후 최초로 공개한다. 이 작품은 여러 개의 거울과 두개골 및 골반 엑스레이 필름을 재료로 활용해 전위적인 설치 형식을 시도한 작업이다. 

▲하종현, 도시계획백서 67, 1967, 캔버스에 유채, 112 x 112 cm. 작가 제공.
▲하종현, 도시계획백서 67, 1967, 캔버스에 유채, 112 x 112 cm. 작가 제공.

4부: 접합—배압법 (1974–1975)

하종현은 1974년 “입체 실험에서 얻은 효과를 평면에 어떻게 옮길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접합〉 연작을 시작했다. 작가는 올이 성긴 마대자루를 캔버스로 활용하여 캔버스 뒷면에 물감을 듬뿍 바른 후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밀어내는 독창적인 제작 기법인 ‘배압법’을 고안했다. 이 기법은 뒷면에서 시작된 작업의 결과물이 앞면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직조된 마대자루 표면을 투과해 흘러나온 물감으로 입체적인 텍스처와 깊이를 형성하는 작업 방식은 단순한 시각적 효과를 넘어 작가의 신체적 행위와 물질성이 결합된 결과물로서 나타난다. 〈접합〉 연작은 회화가 가진 매체적 한계를 넘어 평면적 구성과 입체적 실험의 경계를 탐구하려는 하종현의 지속적인 시도에서 탄생했다. 2010년부터는 〈이후 접합〉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전개하며 현재까지도 하종현의 작업 세계를 대표하는 주요 연작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트선재센터 관계자는 "한 가지 방법론에 안주하지 않았던 하종현의 작업은 그가 경험한 시대와 함께 변화하고 성장했다. 사라져가는 전통에 대한 탐구, 변화하는 사회 환경에 대한 성찰, 일상의 재료를 사용한 새로운 조형 언어 연구, 물질에 대한 실험을 통해 평면적 회화를 넘어서려는 시도는 초기 작업 전반을 관통하며 하종현의 실험 정신이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보여준다"라며, "이번 전시를 통해 하종현의 작품 속에 담긴 시대적 메시지와 물성의 탐구를 들여다보며 그가 남긴 시간의 흔적과 물질성의 이야기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하종현, 탄생-B, 1967, 캔버스에 유채, 콜라주, 145.5 x 193.9 cm. 작가 제공.
▲하종현, 탄생-B, 1967, 캔버스에 유채, 콜라주, 145.5 x 193.9 cm. 작가 제공.

전시 도록 『하종현 5975』

한편, 아트선재센터는 이번 전시에 앞서 지난해 10월, 사전 연구 프로그램으로 동명의 심포지엄을 개최한 바 있다. 심포지엄에는 신정훈(서울대학교 서양화과, 미술경영 부교수), 정연심(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교수), 레슬리 마(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근현대 아시아 미술부서 큐레이터)가 참여해 전후 산업화가 한창이었던 시기, 한국 미술계의 화두였던 도시주의와 물질문화라는 키워드로 하종현의 1959년부터 1975년 사이의 작업을 살펴보며 작가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를 다각화했다. 세 연구자의 심포지엄 발제문은 이번 전시 도록에 수록되어 3월 초 출간될 예정이다.

전시 도록 『하종현 5975』는 하종현의 초기 작업과 조형 언어의 발전 과정을 심도 있게 탐구할 수 있는 다양한 글과 시각 자료를 포함한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 김선정의 글과 더불어, 2024년 10월 26일 아트선재센터에서 진행된 ‘심포지엄: 하종현 5975’에서 발표된 발제문이 수록된다. 심포지엄 발제자들의 원고로는 신정훈의 「근대화의 회화, 면밀하고 고집스럽게 물질주의적인」, 정연심의 「하종현의 6년(1969–1975): 매체의 물질성에 대한 실험과 ‘방법론’」, 레슬리 마의 「표식 만들기의 정치학: 1960–1970년대 하종현 회화」가 포함되며, 2017년 그레고리 R. 밀러 앤 컴퍼니(Gregory R. Miller & Company)와 국제갤러리에서 출간한 도록 『Ha Chong Hyun』에 실렸던 안휘경의 「끊임없는 실험의 연속: 단색화 이전의 하종현」이 재수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