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둥어로 외친 자유, 피 묻은 운동화로 남은 연대의 서사
극단 명작옥수수밭 부부 창작자 최원종ㆍ이시원, 두 사람의 시선으로 완성된 무대
지난해 국립정동극장 세실 ‘창작ing’ 이어 올해 ‘기획공연’ 선정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ㆍ진보연 기자] ‘장국영’이라는 이름은 누군가에겐 첫 영화의 설렘을, 또 누군가에겐 시대의 공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스크린 너머로 전해지던 그의 존재는 단순한 배우나 가수로 기억되기보다, 자유롭고 찬란했던 시대의 공기 자체를 품은 듯했다. 연극 <굿모닝 홍콩>은 그 기억과 현실이 겹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 작품은 낭만의 잔상 속으로 들어가 다시 현실과 마주하고, 잊고 있던 감각과 가치를 다시 꺼내 보게 만든다.
<굿모닝 홍콩>은 2022년 초연된 이후 매해 무대에 오르며 관객과 호흡해 왔다. 국립정동극장 세실 무대에는 지난해 ‘창작ing’으로 처음 올랐으며, 올해 국립정동극장 세실 기획공연으로 선정되며 지난 3월 3일부터 4월 6일까지 다시 한번 관객들과 만났다. 특히, 올해 공연 기간 중이었던 4월 1일에는 장국영의 기일을 맞아 <영웅본색2> 특별 상영회가 열리기도 했다.

작품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네 명의 팬들이 장국영을 기리기 위해 홍콩을 찾는 이야기로 출발한다. 그러나 극은 팬심에만 머물지 않고, 각 인물의 상실과 변화, 그리고 현재의 사회 현실까지 감각적으로 확장된다. 작품은 <아비정전>, <영웅본색>, <천녀유혼> 등 익숙한 영화적 기억을 무대로 옮겨와, 과거의 감정이 오늘의 현실과 만나는 접점을 만든다. 광둥어로 외치는 시위대의 목소리, 피 묻은 운동화를 건네는 장면 등 영화와 현실이 겹치는 장면들은 모두 관객의 감정을 건드린다.
극단 명작옥수수밭의 부부 창작자 최원종 연출과 이시원 작가는, 매해 재공연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진심과 완성도를 놓치지 않기 위해 꾸준히 이 작품을 다듬어왔다. 이번 시즌 역시 정동극장과 함께 장기 레퍼토리화를 준비하며, 기존 구조를 유지하되 감정과 관계의 밀도를 한층 더 높였다.
<굿모닝 홍콩>은 스타를 추억하며 시작되지만, 결국 지금 우리의 삶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우리가 여전히 간직하고 싶은 감정은 변하지 않았다. 예술을 매개로 사회적 감각을 풀어내는 창작 방식이 인상 깊었던 본지 기자들은, 작품이 던지는 질문과 그 이면의 창작 과정을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지난 3일 최원종 연출과 이시원 작가를 국립정동극장 세실 인근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공교롭게도, 이번 <굿모닝 홍콩> 공연 시기가 사회적 이슈와 맞물리며 시의적절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홍콩에서 울려퍼졌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 다시 우리 광장에 울려 퍼지게 된 가운데 이 작품을 올리게 된 소회를 전한다면.
(이시원) 작품이 세상에 나온 지 햇수로 3년째이다. 같은 작품인데도 올릴 때마다 작품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관객들이 이 작품을 대하는 반응에서 나오는 것 같다. 10~20대를 보냈던 1980~90년대 문화를 떠올리며 50대에 접어든 첫해에 쓴 작품이다. 1980년대의 홍콩은, 우리가 갖지 못했던 문화예술을 가지고 있었다. 자유와 판타지의 상징처럼 느껴졌는데, 우리가 80년대에 느꼈던 감정을 지금 홍콩이 우리나라를 보며 느끼고 있겠다는 생각을 이 작품을 만드는 동안 하게 됐다. 정치적ㆍ국제적 이슈를 염두하고 작품을 쓴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둘러싼 사회의 분위기가 문화예술과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걸 사람들이 최근들어 새삼 느끼고 있고, 작품 감상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최원종) 극단 명작옥수수밭은 소규모 연극단체이다. 그래서 항상 재공연이 거의 불가능한 제작 여건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올해 국립정동극장 기획공연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당연히 재공연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재공연 형태가 아닌 장기 레퍼토리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디밸롭해달라는 주문을 주셨고, 이 작품이 내년, 내후년, 나아가 10년 후에도 좋은 작품으로 남으려면 어떤 걸 놓치지 않고 가야 할까 고민하게 됐다. 가급적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 감정에 호소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이번 공연은 입소문을 타게 되어 홍콩 관객들도 많이 찾아주셨는데, 공연이 끝나고 계단에서 저희를 기다렸다가 감사 인사를 전하고 가는 분들도 계셨다. 홍콩 시위대에 관련된 작품을 만들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이 작품으로 하여금 홍콩 그리고 한국 분들이 ‘동지애’를 공유하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기적으로 퇴색되지 않고 좋은 작품으로 남기 위한 많은 이들의 노력 덕분에, 많은 관객의 공감을 얻게 됐다. 이에 힘입어, 서울 공연을 마친 후 4개 지역 투어 공연도 예정되어 있다. 이 또한 정동과 함께해서 가능한 일인 것 같다. 개인 단체가 지역 공연을 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공연장과 매칭되는 것부터가 어렵고, 제작 여건은 더 어렵기 때문에 더 의미가 깊다. 6월 화성을 시작으로, 9월 대구ㆍ밀양, 11월 안산 공연까지 계속된다.

-연극 <굿모닝 홍콩>은 2022년 초연한 작품이다. 세실 무대에서 관객들을 처음 만난 건 지난 2024년이었는데, 초연과 재연 그리고 지난해 국립정동극장 세실 ‘창작ing’ 시리즈 선정 당시와 올해의 무대의 완성도가 다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무엇이며, 달라지지 않고 가장 중심에 둔 요소는. 바뀌게 된 과정과 이유도 듣고 싶다.
(이시원) 내용 측면에서 크게 달라진 점은 없지만, 발전시키기 위한 첫 단계로 ‘원래 이 작품을 왜 썼던가’를 떠올리게 됐다. 작품의 주인공 4명은, 우리가 그리워하는 당시의 홍콩 문화와 장국영으로 대표되는 화려한 시절을 추억하려 홍콩을 찾았다가 그곳의 현실과 직면하며 지금까지 몰랐던 것을 되찾게 된다. 주인공 4명은 90년대 학번이라는 설정인데, 이들은 선배들이 쟁취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홍콩 영화를 즐기며 기성세대가 됐다. 운동권 학생들은 거의 없어지고,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기 전 시기의 홍콩 영화를 접했기 때문에 자유의 가치를 대하는 태도가 80년대 학번이랑은 조금 달랐을 것이다. 막연하게 알고 있던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를 되새기는 여행에 초점을 맞췄다.
그런데 이 공연이 공연될 때마다 우리를 둘러싼 정치적, 사회적, 국제적 이슈들이 변화하고 이에 따라 작품 속 시위대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다가옴을 느꼈다. 홍콩 시위대의 서사가 의도치 않게 깊어진 만큼, 주인공 4명의 밀도도 높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들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만드는 작업에 집중했다. 관객들이 조금이라도 불분명하게 느끼거나 의문을 갖지 않도록 깊이를 더하려 했다. 장국영이라는 스타를 그 자체로 봐도 좋고, 우리가 잊고 있던 자유롭고 찬란했던 시간으로 치환해도 무리가 없게끔 만들어보려 했다.
(최원종) 국립정동극장과 처음 함께했던 ‘창작ing’ 작업 당시, 장국영 영화를 반복적으로 보며 충분히 고민하고 창작에 임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기획공연을 준비하며 영화를 다시 보니, 이미 다 안다고 생각했던 영화들이 새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영화들을 보며 공연이 잘 나오게 해달라고 장국영 형님에게 기도했다. 힘을 빌려야겠다는 간절함에서 그랬던 것 같다.(웃음) 이젠 연습할 때도, 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도 (장국영 형님에게) 기도를 하게 된다. 하나의 루틴이 되어버렸다.
크게 두 가지 라인에서 고민했는데, 하나는 장사모 멤버들이 왜 그를 여전히 잊지 못하고 매년 홍콩에 오는가에 대한 이유를 찾는 것이었다. 사실 그들의 행동은 객관적으로 보면 잘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이해받지 못할 구석이 있고, 이들을 친구나 동료처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 라인을 만들기 위해 작가님에게 텍스트적 보완을 요청했다. 또 하나는 ‘나이키 신발’을 어떻게 더 극대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사실 홍콩 시위를 이 좁은 무대에서 다 보여주기란 어려운 일이다. 시위가 어떻게 시작됐고 끝이 났는지 몇 장면으로 보여줄 수 없지만, 관객들에게 ‘홍콩 시위는 이런 거였어’라는 하나의 이미지를 남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미지가 홍콩 시위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라고 봤다. 그렇게 나온 것이, 피 묻은 나이키 운동화였다. 그 신발이 시위대를 거쳐 기찬에게 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을지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연출적 노력이었다.
더불어, 이번에 새롭게 추가된 설정 중 하나가 바로 시위대가 사용하는 ‘광둥어’이다. 홍콩에서 쓰는 광둥어와 중국 본토에서 쓰는 만다린어. 광둥어로 말하는 시위대를 통해 자유를 표현하고 싶었다.

-작품의 소재이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존재는 단연 ‘장국영’이다. 한때 낭만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홍콩의 영원한 스타라는 점 외에, 그를 작품의 중심에 둔 특별한 이유나 이를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있는지.
(이시원) 홍콩 스타 중 주윤발, 양조위 등 유명한 배우들이 많지만, 장국영으로만 설명되는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홍콩 영화 전성기의 끝물에 가장 화려하고 유명하게 활동하다 그 시대와 함께 져버린 사람이다. 장국영이 홍콩 영화 시대를 마무리한 느낌이 든다. 실제로 장국영의 영화가 지기 시작하면서 홍콩 영화의 전성기도 함께 막을 내렸다.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후에도 왕가위 감독 등의 활약으로 홍콩 영화 붐이 지속됐으나, 장국영이 사망한 2003년 전후로 그 명성도 점차 사라지게 됐다. 그가 사망한 지 20여 년이 흘렀지만, 홍콩에서는 아직도 그의 기일이 되면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는 등 그를 기리기 위한 행사들이 많이 열린다고 하더라.
(최원종) 이 작품의 시작은, ‘왜 장국영일까’에 대해 고민하며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과정이었다. 홍콩 영화 황금기에 강렬한 인상을 줬던 주윤발, 유덕화 등은 대개 작품에 영웅으로 등장해, 모든 현실의 고민들을 일거에 해결해 줄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런 인물들에 매료됐는데, 20년이 흐르고 나서 되돌아보니 사실 그들이 해결한 건 아무것도 없고 그들은 이제 할아버지가 됐다. 그러나 만우절에 죽음을 선택한 장국영은 여전히 젊은 모습으로 우리 곁에 머물러있다. 그는 영화에서 보통 현실의 불안을 껴안고 사는 사람으로 존재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그 모습이 오히려 우리의 모습과 맞닿아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이것이, 장사모가 장국영을 잊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내밀하고 인간적인 면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던 솔직함을 대변하는 장국영이라는 인물을 이해하자, 그를 중심에 두고 작품을 풀어나갈 수 있었다.
-객석에 홍콩 관객들의 비중이 높았던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홍콩 관객들이 어떻게 이 작품을 알고 찾아왔다고 생각하나.
(이시원) 입소문의 힘이 가장 컸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굿모닝 홍콩>의 광둥어 자문을 해주신 홍콩 현지인 두 분이 개인 SNS에 ‘한국에 올 일 있으면 꼭 보라’고 게시물을 올린 게 자연스럽게 퍼지며 알려졌던 것 같다. 나중엔 일부러 공연 스케줄에 한국 방문 일정을 맞춰 오신 분들도 계셨다. 더불어, 국립정동극장 차원에서도 어학원이라든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홍보를 많이 해주셨다.
홍콩에서 오신 관객 중 한 분은, 어머니께서 과거 장국영의 전담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다고 하더라. 더불어 그의 친구는 홍콩 시위 관련하여 수감됐다가 며칠 전에 출소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관객과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시대를 관통하는 작품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감격스럽게 다가왔다.
-공연 일정 중 4월 1일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를 활용한 <영웅본색2> 상영회도 진행하여 더욱 주목을 받았다. 장국영의 기일을 염두에 두고 공연 일정을 잡았나 싶다.(웃음)
(이시원) 대관 일정은 사전에 미리 잡혀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공연 기간 중 4월 1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극장 측에서 공연 전 영화 상영회라는 아이디어를 내주셨다. 처음엔 극장 분위기가 날까 걱정도 됐는데, 세실극장 특유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옛날 독립 영화관 같은 느낌이 났고 관객분들도 좋아해주셨다. 공연에 등장하는 영화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웅본색2>와 <천녀유혼> 가운데 상영할 영화를 관객 투표에 부쳤는데, <영웅본색2>가 70% 넘는 압도적 비중으로 선택됐다.
-극 중 가장 주요하게 차용되는 영화는 <영웅본색>과 <천녀유혼>, <아비정전>이다. 장국영의 수많은 대표작 가운데 어떻게 이 작품들을 오마주하게 됐나.
(최원종) <아비정전>과 <영웅본색> 모두 1987년에 개봉한 작품인데, 당시 밖에서는 시위를 하고, 극장 안에서는 느와르와 판타지 영화를 보며 환상의 세계로 빠지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다. 홍콩 영화라는 장르를 대표할 수 있을만한 흥행작이면서, 극중 홍콩의 상황이 부각될 수 있는 영화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 두 작품을 패러디했다.

-극 중 인물둘의 직업과 성정체성, 관계성 등을 다양하게 설정했다. 주요 출연진은 장국영의 팬이라는 하나의 구심점이 있지만, 이렇게 인물들을 설정한 이유가 있을텐데.
(이시원) 아무리 장국영 팬이라고 해도, 단순히 홍콩에 방문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추모 영상을 찍을 정도의 팬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조금 특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열정적인 팬심을 가져본 사람이 아니라, 그 특별함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더라. 다만, 이 사람들이 매년 홍콩에 가서 힘을 얻어야 하는 사람들이라면 막강한 동기가 필요할 것 같았다. 사회적으로 평범해보이지만 내가 발 붙이고 있는 곳에서 힘을 얻을 수 없을 때, 내가 사랑하는 스타의 흔적을 찾으며 다시 힘을 낼 수 있는 동력을 얻는 사람들. 2022년 (광명시민회관) 대극장 공연 당시 장사모 회원은 총 7명이었는데, 강력한 동기를 가진 4명만 남았다.(웃음)
이번 시즌 첫 공연을 보신 기자 몇 분이, 극 중 이정환의 동생이 자살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셨다. 이 질문에 나는 “장국영이 왜 죽은지 알 듯 말 듯 우리 모두 모르잖아요”라고 답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 중에는 짐작 가능한 동기가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는 남겨진 사람들의 추측일 뿐이다. 정환의 동생도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동생이 남긴 질문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동생이 좋아했던 장국영을 통해 답을 계속 찾는 것이다. 또한, 백승재라는 인물이 동성애자라는 설정은 장국영 때문에 넣은 것은 아니다. 그저 대한민국에서 여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이것이 그냥 사랑으로 받아들여지면 안 될까 생각하는 사람을 표현하고 싶었다. 특별할 것 없는 원태라는 인물은, 항상 무료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삶을 사는 듯 하지만 그의 내면에 홍콩 영화와 장국영이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힘든 시기를 살아낼 수 있었다. 상준은 이루지 못했던 영화감독의 꿈을 장국영 오마주 영화 촬영을 통해서나마 해소하게 된다. 이 네 사람이라면 홍콩에 가는 것이 이상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캐릭터 별 밀도감이 올해 더 깊어진 것 같다.
-주연 배우들의 연기만큼 빛났던 것이 시위대와 경찰을 맡았던 배우들의 앙상블이었다. 전부 광둥어로 대사를 소화하는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한국어 자막이 제공되는 장면과 아닌 장면이 있었는데, 이것으로 어떤 차별화를 꾀하려 했나,
(최원종) 자막을 보면 아무래도 눈앞에 보이는 장면에서 시선을 돌리게 되니, 가급적이면 자막 없이도 장면을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도 정서적으로 다가왔으면 했다. 극 중 전달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장면에 한해서 자막을 제공했는데, 자막을 보다가 시위대 장면을 놓치지 않도록 무대 중앙 배경과 양 측면에 각각 배치했다.
시위대 역을 맡은 배우들은 모두 우리 극단 단원들이다. 한 4~5년 차 된 친구들인데, 장면 연습 전에 항상 1~2시간 미리 와서 광둥어를 연습했다. 현지분들이 듣기엔 어색함이 많았겠지만, 공연의 흐름을 깨지 않으려 성조 연습도 많이 했다.

-시위대 중 한 여학생이 기찬의 잃어버린 나이키 운동화 한 짝을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시위 상황에서도 가지고 다니다가, 신발 주인을 만난 순간 건넸던 피로 물든 운동화가 잊히지 않는다. 이로 인해 자신의 관심사에만 가치를 두던 한 청년이 비로소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된다. 이 장면에 대한 작가와 연출의 의도를 듣고 싶다.
(최원종) 기찬이란 인물은 나이키 신발을 리뷰하는 유튜버이다. 극 중 스페셜 에디션 운동화를 처음 구매한 가격은 1,300만 원이었으나, 그걸 잃어버렸음을 구독자들에게 밝히자 이를 찾으면 더 많은 돈을 후원해주겠다는 이가 나타난다. 그의 입장에선 잃어버린 게 오히려 좋은 일이 된 것이다. 여정이 험난할수록 가치가 올라간다. 신발에 대한 강한 욕망으로 가득 찼던 기찬이 피로 물든 신발을 받았을 때, 텅 비어버린 마음이 무엇으로 채워질까를 보여주는 것이 의도한 바였다. 기찬의 경우, 이를 채울 것은 울음밖에 없었다. 욕망으로 가득 찼던 마음이 사라졌을 때, 내가 바라봐야 할 것은 무엇일까. 천만 원이 넘는 신발을 장사모 멤버들에게 넘겨주고 시위대에 합류해서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 이 과정이, 자본주의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이키 신발을 통해 진행하고자 했던 이야기의 축이다.
(이시원) 요즘 젊은 친구들에겐 나만 알 수 있고, 나만 갖고 있는 것들이 굉장히 중요하지 않나. 그게 기찬에겐 나이키 신발이었다. 다른 나라에 가서 구할 정도로 신발에 목숨 걸었던 그가, 피 흘리고 목숨을 바치며 얻어야 하는 홍콩 시위대들의 더 중요한 가치에 궁금증을 갖게 된 것이다. 기찬에게 신발은 소중하지만,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그만한 가치의 것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다. 자유를 위해 싸우던 시위대의 피가 묻은 운동화를 장사모에 건네며 ‘자유를 위해 뛰어다닌 녀석이니 잘 보관해달라’라는 기찬의 말은 일종의 새로운 목표이다. 신발에 묻은 피와 함께 전달된 것이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한정판 운동화보다 더한 절박하고 귀한 가치가 있다면 나도 함께 찾아보고 영상으로 기록해 보리라는 그의 결심이다.
-동료이자 부부로서 함께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는데 작업 과정이 궁금하다.
(이시원) 나는 참을성이 없는 편이고, 최 연출은 말이 없는 편이다. 참을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상황을 이해시켜줘야 하는데, 이 사람은 연습 과정에 기다리라든지 상황을 설명해주는 일이 거의 없다. 이 부분에 대한 불만이 많았는데, 한 3~4년 전부터는 잔소리를 줄여가고 있다. 작업을 계속 같이 하면서 상대의 작업 방식을 이해하게 됐고, 연출이 잘 표현할 거라는 믿음이 생긴 것 같다.
(최원종) 물론 내 머릿속에도 생각한 그림이 있지만, 작가나 배우도 나름의 그림이 있을 테니 처음부터 내 고집대로 움직이기 보다 우선은 기다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과거에 나를 연출로 만들어 준 건 사실 배우 분들이다. 조연출은 많이 해봤지만, 연출의 영역은 정말 다르더라. 모든 걸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며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다. 그래서 처음엔 부담도 크게 느끼고 불안해 했다. 그런 나에게 선배 배우가 찾아와 “원종아, 너는 객석에 앉아서 공연을 봐. 우릴 믿어.”라고 말해줬다. 그래서 그대로 했더니 공연이 끝난 후 로비에서 공연이 너무 좋았다는 칭찬을 들었고, 연출가가 됐다. 배우에 대한 신뢰가 그때부터 생겼다. 존경심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어떤 그림이 있더라도 배우들과 함께하면 그 이상의 것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첫 데뷔작이었던 <에어로빅 보이즈> 연습 당시, 피날레에서 인간탑을 쌓는 장면이 있었는데 전문 선수들이 아닌 배우들이 하기엔 위험 부담이 크다고 생각해 동작을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 그런데 배우들이 나보다 적극적으로 해당 장면을 하고 싶어 했고, 결국 수많은 연습과 노력으로 그 장면을 공연에서 해냈다. 연출이 겁내고 안 된다고 했던 걸 배우들이 해내는 것을 보고 더 믿게 됐다.
나도 내 나름의 연출관이 있지만, 그걸 강요하지 않는다. 배우들의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듣고, 절대 반론을 펴지 않는다. 배우들이 연출가에게 의견을 말하는 게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게 어려워지는 순간 창작은 굳어진다. 신뢰를 기반으로 하니, 배우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연출의 방향성을 제시하면 함께 만드는 이들도 대부분 마음을 모아주고 결과물도 잘 나오게 되는 것 같다.

-작품을 만들면서 가장 어려웠던 지점을 각자 꼽아본다면.
(최원종) 특별히 어려운 지점은 없었다. 다만, 시위대가 매 공연마다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치는 등 목을 많이 쓰다 보니 배우들의 컨디션이 가장 걱정이었다. 이를 반복해서 했을 때, 우리가 의도했던 상태가 유지될 수 있을지가 큰 고민이었다. 배우들의 목 상태가 가장 염려되었는데, 연습 끝에 목을 긁어서 내는 발성을 찾았다고 하더라.
-극단 명작옥수수밭의 다음 작품은 무엇인가.
(이시원) 지난해 낭독극으로 선보였던 <겨울산책>을 올해 정식 공연으로 처음 선보일 예쩡이다. 극작에 이어 연출까지 맡게 된 첫 작품이다. 처음엔 남편이 연출을 맡으려 했으나, 베트남 출신 결혼 이민자가 작품의 주인공이다 보니 내가 해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제안을 받아들여 도전하게 됐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해보려 한다.(웃음) 베트남 출신 이민자 린은 이혼 후 아들이 살고 있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여성이다. 여행사를 운영하는 린은 국가 지원을 받기 위해 장애인 고용을 고려하던 중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일종인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성재라는 친구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뭔갈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코로나 팬데믹으로 여행사는 운영이 어렵게되고, 이후 각자의 겨울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최원종) 더불어, 극단 명작옥수수밭이 20주년을 맞는 오는 6월에는 <세기의 사나이>를 기념작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2018 창작산실 올해의신작 연극부문에 선정되어 2019년 처음 선보였던 작품으로, 경술국치ㆍ의열단ㆍ위안부ㆍ3.1운동ㆍ한국전쟁 등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 속에서 동분서주 달려드는 사나이 박덕배의 모습을 비추는 작품이다.
(이시원) 개인적으로 최원종 작가의 연출 데뷔작인 <에어로빅 보이즈>나 <헤비메탈 걸스>도 굉장히 좋아한다. 두 작품에서는 헤비메탈과 데스메탈이 주 소재로 쓰이는데, 이 음악 장르는 밴드음악 가운데서도 가장 원초적인 것들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잃어버렸던 야성을 되찾자’는 주제를 말하는데, 중장년층에게 오히려 더 필요한 마인드라고 생각한다.
-다음에 작품을 올리게 된다면, 주인공으로 록밴드 36.5℃ 보컬로 활동하는 최민수 배우를 캐스팅하면 아주 잘 어울릴 것 같다.
(이시원) <헤비메탈 걸스> 속 회사 사장이 과거 메탈 밴드의 리더이자 클럽 주인인 설정인데, 그 역할을 맡아주시면 너무 좋을 것 같다.
-서울에서의 공연을 마무리하며,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이시원) 많은 분들이 이 작품에 애정을 가지고 지켜봐주신 덕분에, 막공을 향해 갈수록 공연장이 가득 찼다. 마지막 공연 티켓은 일찌감치 매진이 돼서, 주변에서 보고 싶다고 해도 내 능력으로 표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연을 사랑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꼭 전하고 싶다. 더불어, 다음 시즌에 이 공연을 다시 올릴 때에는 주윤발 배우님을 꼭 모시고 싶다. 배우님에게 공연을 알리고 싶어 연락이 닿을 수 있는 방법을 수소문했지만 SNS도 하지 않으셔서 결국 이번엔 실패했지만, 다음 공연에는 꼭 이 공연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