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청춘의 시선, 숨겨진 인문학 발견하기] 더하기와 빼기
[2030청춘의 시선, 숨겨진 인문학 발견하기] 더하기와 빼기
  • 윤이현
  • 승인 2025.03.16 00:27
  • 댓글 0

▲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최근 윤영채에서 윤이현으로 개명했다.
▲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SNS를 팔로우하고 있는 사람은 채 60명이 안 된다. 대부분은 친한 친구 또는 가족들이지만, 그 안엔 고등학교 때 간혹 복도에서 얼굴은 마주쳤지만, 사적인 대화는 나눠본 적이 없는 친구 아닌 친구와, 생계의 전쟁터에서 함께 총알받이로 있다가 돈독해진 인연들이 섞여 있다. 원래는 이보다 두 배는 많은 팔로워가 있었지만, 작년 이맘때부터 나의 됨됨이를 알아버렸는지 하나둘씩 빠져나가다가 지금의 숫자가 되어버렸다. 앞으로 여기서 절반은 더 줄이는 게 목표 아닌 목표가 되었다.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것에 있어서 SNS는 내게 대단히 효과적인 수단이다. ‘이제 당신의 일상을 보고 싶지 않다라는 표시이자, 인연 종료의 마침표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문자나 전화로 구태여

나 이제 네가 싫어졌으니 다시는 연락하지 말았으면 해.”

라고 해야 하는 에너지와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매개인가.

인연을 줄이고 난 뒤부터 내 삶은 조금 다른 패러다임을 맞이했다. 이제는 모임에 불러주는 이가 없어졌다. 술자리로 가득했던 주말은 지루함을 견뎌야 하는 시간으로 전락했고, 점차 동창들의 소식으로부터도 멀어져만 갔다. 그 사이, 친구 누구누구는 결혼했고, 어떤 이는 멀리 유학을 떠났다더라라는 소식을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통해 들을 수 있을 뿐.

동시에 우리 엄마는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매우 열심히 하신다. 최근에는 급기야 틱톡커가 되었다. 간간이 김치 담그는 영상을 편집해서 올리기도 하고, 우리 집 반려묘의 사진이나 꽃 사진 정도를 띄워놓기도 한다. 저번엔 엄마가 취미로 파김치 담그는 영상을 올렸는데, 댓글이 하나 달렸다. ‘이 아줌마는 대체 뭘 올리는 건지 모르겠네.’ 엄마는 돋보기를 쓰고 한동안 그 댓글을 읽었다. 혹여나 엄마가 상처받진 않았을까 걱정됐으나, 그녀의 다음 말은 예상 밖이었다.

다음엔 깍두기 조리법 영상을 올려야지.”

그러더니 의연하게 무 한 상자를 주문하고 있었다. 매일 새로운 팔로워들과 소통하는 것, 그들에게 자신의 요리 실력을 뽐내는 일이 요즘 엄마의 유일한 낙이 되었다. 우리 모녀는 외모를 제외하고는 이토록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릴 때 나는 즉흥적인 엄마가 싫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먹지도 않을 음식을 만들어 놓는 것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계획하고 먹는 것을 좋아하지만, 엄마는 먹는 일마저도 그때그때 달랐다. 봄이면 마당에 1년도 가지 않을 꽃들을 잔뜩 심는 것도 말이다. 우리 집은 언제나 포화상태였다. 사람도, 물건도 늘 넘쳐났다.

나는 기질이 예민한 아이였기 때문에, 세상살이에 불만이나 불편함이 많았다. 늘 변수에 취약했으며, 고요하고 정돈된 공간에서야 가까스로 평온함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엄마는 늘 지나치게 갑작스럽고 화통하고 시끄러운 사람이었다. 어디에 있어도 쉽게 사람을 사귀고, 일을 만들어 내는 그런 사람.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우리 엄마였던 거다.

 

나에게 새해란 다짐하지 않고 별 의미 없이 지나가는 시간 가운데 하나지만, 올해는 비워진 공간을 무엇으로 채워봐야 할지 고민해야겠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계속 자신에 대한 설명서를 채워가는, 동시에 마음의 무언가를 비워가는……. 마치 오래 방치한 방을 치우며 잊고 있던 물건을 발견하고, 또 낡은 것을 곱게 정리해서 보내주듯 한바탕의 소동이 필요한 것이다. 천천히 두들기다 보니 어느덧 가득 찬 이 화면처럼, 부족하지만 완성된 한편의 글처럼 내 삶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올해 초에 끄적여 본 글 일부다. 나는 엄마와 다르게 여전히 많은 것을 비워가고 있다. 방도 깨끗하게 치워두었고, 꼭 필요하지 않은 건 사는 걸 미루거나 없이 살아도 좋다는 생각이다. 불러주는 이가 없어 쓸쓸했던 주말은, 온전한 쉼으로 가득해졌으며, 죽도록 부어대던 술 대신 주말 아침엔 엄마가 냉장고에 채워둔 재료로 밥을 지어 먹는다. 사람을 좋아하는 가족들과 달리, 나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집 뒤뜰에 혼자 나가 요가를 한다. 나에게 비움이란 타고난 예민함을 부드럽게 다듬는 과정이자, 자기 사랑의 일부인 셈이다. 수시로 픽픽 쓰러졌던 날들에 비해 몸이 튼튼해진 것을 보면, 나에겐 이런 삶의 방식이 제격인 듯하다.

그러나 내가 놓친 부분도 있었다. 사람마다 체형이나 체질이 다르듯, 삶의 방식도 제각기 다른 것을 그동안 너무 간과하고 살았을지 모른다. 엄마 눈에 나는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냉소적인 막내딸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녀가 내 삶의 방식을 특별히 지적한 적 없었던 것처럼, 나 역시 올해는 엄마의 삶을 조금 더 이해해 보고 싶다. 지금도 매주 영상을 올리고 있는 엄마와 매일 팔로워를 하나씩 지워가는 나의 삶은 모두 존중받을, 다름의 문법 안에 있기 때문이다.

더하기와 빼기, 둘 중 무엇이 옳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각자가 원하는 기호를 자기 삶에 적용하면 그뿐. 그래야 다양하고 풍성한 세상이 된다는 것을. 불필요한 것들에 대한 정리는 가감 없이 하되,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와 존중으로 빼곡하게 채워지는 산뜻한 봄날을 만들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