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 윤석남 작가 “너희가 이런 식이었어? 그럼 난 여자를 그릴게”
[Special Interview] 윤석남 작가 “너희가 이런 식이었어? 그럼 난 여자를 그릴게”
  • 이은영 발행인ㆍ이지완 기자
  • 승인 2023.11.29 12: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두서의 초상화에 충격...동양화로 변경, 초상화 그리기 공부
일제 강점기 이전 여성초상화 단 세 점밖에 없어 분노
‘여성’ 이야기를 하는 것, 내 당연한 사명,
그러나 여성이나 남성이라는 한계에 가두지 않길
정직하고 곧은 어머니, 가난 속에서도 자존 지켜줘
가정주부 월급 받으며 당당하게 작업 시작한 40대
잊히고 싶지 않아, 사람들에게 감동 주는 작가이고파
제 23회 이인성 미술상 수상, 대구미술관 《윤석남》展, 12월 31일까지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ㆍ이지완 기자] 《제 3회 제주비엔날레》에서 윤석남의 작품을 만났었다. 박능생 작가의 제주도 전경 <제주-탐라 여지도>와 함께 전시된 거대한 하트 모양의 설치물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였다. 이와 함께 김만덕의 서사를 담고 있는 드로잉도 함께 볼 수 있었다. 제주도에 대기근이 닥쳤을 당시 전 재산을 풀어서 제주 백성을 살려냈던 거상이자 의녀였던 김만덕의 의로움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윤석남 작가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여성주의 작가로 알고 있었다. 영화든, 소설이든, 미술이든 여성의 이야기는 언제나 부족하다. 그렇기에 마음 한편엔 항상 응원하는 마음이 있었다. ‘여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작업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윤석남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지난해 윤석남 작가의 이인성 미술상 수상 소식을 들으면서, 다시 한 번 윤 작가를 떠올리게 됐다. 윤석남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윤 작가가 마흔 살까지는 가정주부였고, 그 이후 미술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또한 처음에는 서양화를 했고, 설치 작업을 했으며, 이후 동양화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녀의 행보를 보면서, 언제나 개척하고 있는 작가라고 느꼈다. 그리고 강렬한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본지 이은영 발행인은 윤석남 작가를 떠올릴 때마다 박완서 작가를 떠올리게 된다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여성의 삶을 살고, 또 그 바탕을 통해 창작을 일궈낸 여성 작가들이었다. 이달 초 화성에 자리하고 있는 윤 작가 작업실을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겨울날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이어서, 추운 날씨였다. 윤 작가의 작업실은 융건릉 근처에 있는데, 큰 도로가 있는 지역은 아니었다.

화성에 윤 작가가 작업실을 마련하게 된 것은 1980년 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소설 『자유부인』을 펴낸 소설가 정비석 선생 덕분이었다. 60년대쯤 문인들이 하도 배를 곯고, 가난하다 보니, 돈을 조금씩 모아서 화성의 땅을 사기 시작했다. 거기에 윤 작가도 함께한 것이다. 땅을 조금씩 사서 나중에 이곳에서 집을 짓고 살자는 것이 문인들의 꿈이었고, 윤 작가는 이곳에 작업실을 마련하게 됐다. 2층으로 마련된 윤 작가의 작업실은 큰 수장고와 작업 공간으로 나뉘어져있다. 작업 공간에는 목판 작업도 했기에, 절단 기계도 찾아볼 수 있었다. 윤 작가의 작업실에선 나무와 먹 냄새가 나는 듯 했다.

층고가 높은 작업실에서 2시간 여 진행된 인터뷰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는 그의 이야기와 함께 40여년의 시간동안 작업을 이어온 윤 작가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여성주의’ 작가라는 칭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윤 작가는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게 당연한 일이었다고 답했다. 윤 작가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명이 아니었다면 그림그리지 않았다”라고 답하는 그의 태도와 이어졌다. 윤 작가는 무엇에 이끌리는 듯 작업을 해나가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고, 하나의 기사를 통해서 생명에 대한 사랑을 작품으로 풀어냈다. 그리고 윤두서의 초상을 만나 초상화 작업을 시작해, 현재 여성독립운동가 초상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윤 작가는 자신이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에서는 강인하게 밀고나가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큰 키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왠지 윤 작가는 커보였다. 그가 가지고 있는 열정과 의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 23회 이인성 미술상을 수상했고, 대구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소감을 듣고 싶다.

굉장히 마음에 드는 전시 중 하나다. 미술관에서 정성껏 준비해줬다. 전시회 한 것 중에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에 든다. 내 작업 중 꼭 보여줄 것을 선별해서 잘 보여줬다. 이정민 학예사가 담당했는데, 개인적으로 굉장히 흡족했고, ‘내가 작가하길 잘했구나’ 싶을 정도로 좋았다. 지금 대구미술관에서 열고 있는 전시는 내 작품 세계 전반을 아우르는 자리여서, 주제가 있거나 특별히 부각시킨 작품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여성독립운동가의 초상을 많이 선보일 수 있어서 감회가 새롭다.

▲윤석남 작가가 작업실 책상에 올려두고 있는 여성독립운동가의 작품스케치를 보여주고 있다. ⓒ서울문화투데이
▲윤석남 작가가 작업실 책상에 올려두고 있는 여성독립운동가의 작품스케치를 보여주고 있다. ⓒ서울문화투데이

윤석남 작가를 한국 여성주의미술의 시작이라고도 말한다. 이러한 호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처음에는 ‘여성주의’라는 말에 굉장히 거부감이 있었다. 무슨 주의라고 하는 것이 영 와 닿지 않았던 것 같다. 내게 ‘여성주의 작가’라는 호칭이 생기면, 내 세계의 일부분이 한정된다고도 생각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줄반장도 하지 않을 정도로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이런 나에게 어떤 ‘제목’이 붙는 것은 너무나 큰일이었다.

그런데 내 첫 번째 전시 주제가 ‘어머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아버지보다도 더 사랑했던 어머니의 이야기로 작업을 시작했다. 어머니의 일생을 시작으로 나는 여성의 이야기를 했다. 작품을 하는 데에 있어서, 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장 잘 아는 것을 해야 한다고 봤다. 그게 여성이었다. 나도 여성이고, 어머니도 여성이고, 이 땅 위에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내 자연스러운 방향이었다. ‘여성주의 미술’이라는 명명 이전부터 내게 ‘여성’의 이야기는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여성주의 작가’라는 것에 있었던 거부 반응은 작은 의미의 모성은 거부하고자 했던 마음과 같았다. 나는 엄마와 자식 간의 ‘모성’ 만을 얘기하는 것에는 거부 반응이 있었다. 모성을 포함한 ‘여성주의’에 대해 생각했다. 자연을 살리고, 전 지구가 함께 나아가는 삶을 택하는 것,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것, 이런 여성적 감수성이 ‘모성’이라고 본다.

여성은 아이를 낳는 존재다. 남성의 정자를 받아서 몸 안에서 10개월 동안 아이를 키워서 낳게 되는데, 이는 남성들이 상상할 수 없는 세계다. 이런 모성을 근간으로 ‘여성주의’라는 세계를 확장하게 됐다. 이 모성으로 지구를 살려야 하지 않을까, 함께 살아가고, 모두가 자유를 만끽해야하지 않을까, 그렇게 세계를 넓혀갔다. 궁극적으로 이런 방향으로 ‘여성주의’를 받아들이게 됐다.

▲윤석남, 우리는 모계가족, 2018, 한지에 분채, 70.5x47.5cm (사진=대구미술관 제공)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는가.

우리 아버지는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아는 한국 최초로 극영화를 촬영한 감독이자 작가인 윤백남이다. 그런 윤백남이 자기 집에 하숙을 들어오니, 어머니가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좋아하는 소설가이니까 말이다. 어머니는 정말 정직하고 바른 사람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우리 육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온갖 궃은 일을 다했다. 그럼에도 책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조금이라도 무언가 생기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눴다. 힘든 살림 중에서도 어머니는 남을 계속 도왔고, 우리 육남매의 자존을 지켜주셨던 분이었다. 며칠에 한 번씩 어머니는 과자를 사와서 같이 놀이를 하고 그것을 형제들과 함께 나눠먹을 수 있게 해줬다. 그런 어머니의 행동은 ‘너희들이 지금은 이렇게 가난하지만, 가난은 그렇게 큰 일이 아니다’ 이런 것을 의식적으로 가르쳐주신 방법 같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우리 육남매는 정말 우애가 좋았다.

어머니에 대한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하자면,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당시에 집에 조금 여유가 있었을 시절에 집에서 일을 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시골에서는 일하는 아이들하고는 절대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리고 항상 어머니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너는 저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지 마라’라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은 우리 집의 일을 도와주러 온 것이지, 너를 도와주러 온 게 아니라며 철저하게 가르치셨다. 그래서 식탁에서 밥을 먹고, 밥그릇은 우리 스스로가 치우게끔 했다. 그들은 우리 집의 일을 거들어주는 것이지, 네가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가르친 것이었다. 나는 정말 어머니를 존경한다.

▲윤석남 작가가 자신의 수장고에 보관된 목판 작품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울문화투데이

‘어머니’를 주제로 한 첫 전시를 보고 어머니는 어떤 말을 건네셨나.

어머니는 참 입이 무거운 분이다. 정말 한 마디도 안 했다. 그러나 표정으로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굉장히 흡족한 표정이었다. 사실 그 당시에 화가인 나 또한 내 직업에 대한 의식이 확고하지 않을 때였다. 전시를 열면서, 그냥 내 그림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지나고 와서 생각해보면, 그 큰 전시 작품들이 어머니 당신으로 시작됐다고 보지 않으신 것 같다. 그냥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일 것이라 본 것 같다.

마흔이라는 나이에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결혼을 하고 가정주부의 삶을 이어오고 있었는데, 어떤 시간들을 거쳤는지 궁금하다.

내가 그림을 시작한 날짜를 절대 잊지 않는다. 1979년도 4월 25일이다. 가정주부의 삶을 살다가, 화구를 사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집은 굉장히 가난했다. 그래서 나는 대학도 못가고 바로 일을 시작했다. 22살에 연애를 시작해서 28살 결혼을 했다. 작은 단칸방 하나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남편과 세 명이서 3년을 함께 살았다. 그때는 사글세 방 한 칸도 못 얻을 정도로 돈이 없었다. ‘굶지만 않으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살았던 시기였다. 남편이나 나나 둘 다 돈을 안 쓰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보니 한 3년 뒤에는 사글세방을 구하고, 조금 더 나아진 형편으로 가고, 그렇게 한강변 용산 쪽에 있는 복지 아파트 전세를 들어갈 수 있었다. 방 두 개가 있는 데였고, 5층이 제일 싸서 그곳으로 들어갔다.

결혼하고 나서도 내게는 항상 꿈이 있었다. 마흔 살이 되기 전에는 꼭 그림을 시작해야 된다는 꿈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었다. 그렇게 딱 40이 됐다. 남편과 나는 워낙에 검소하다보니까, 그때 굉장히 큰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었다. 60평짜리였고, 2층 아파트였다. 지금은 그런 아파트가 다 없어졌다. 특별히 그런 아파트를 택한 이유가 있었다. 작업실을 확보해야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딱 그 아파트로 들어가고, 남편에게 ‘나 작업할 거야’라고 말했다. 거기서 2년여 작업을 해서 선보인 것이 지금 아르코미술관인 옛 미술관회관의 《윤석남전》이었다.

남편은 어떤 분인가.

우리 남편과 나는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 학교 다닐 당시에는 몰랐는데, 사회에 나와서 알게 됐다. 원래는 문학을 할 줄 알았는데, 조선공학과를 들어가더니, 공학도가 돼서 살았다. 처음에는 직원이 13명밖에 없는 회사에 들어가서 고생을 좀 했다. 그리고 이후에 그 회사를 인수해서 잘 키워낸 사람이다. 남편은 굉장히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다. 우리는 딸이 하나있는데, 옛날엔 꼭 아들 하나를 낳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남편은 그런 게 없었다. 아들이든 딸이든 잘 낳아서 키우면 된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윤석남, 임봉선 초상, 한지에 분채, 210x94cm, 2023 (사진=대구미술관 제공)
▲윤석남, 임봉선 초상, 한지에 분채, 210x94cm, 2023 (사진=대구미술관 제공)

회화, 설치, 조각 등 매체를 넘나들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2015년부터는 채색 초상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어렸을 적에 무작정 그림을 시작했을 땐 동양화는 그림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림이라 치면 무조건 유화를 떠올렸다. 산수화나 인물화 같은 것은 알지 못했고, 한국화라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그러다가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 《초상화의 비밀》 기획전에서 ‘윤두서 자화상’을 보게 됐다. 크지도 않은 자화상을 보는 순간에 막 야단을 맞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윤두서가 “너 지금 뭐하고 있어!”라고 하며 소리를 치는 것 같았다. 전시를 한 3번 쯤 갔었던 거 같다. 나중에는 먹먹함을 넘어서, 눈물이 나고 그럴 것도 없이, 내가 너무 바보 같이 살았다는 그런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래서 돌아와서, 서양화 붓이라든가 물감은 싹 다 버렸다. 어느 지점에선 그렇게 성격이 괴팍한 면이 있다. 그렇게 동양화 재료를 사고, 동양화를 시작했다. 작품을 하기 전부터 꾸준히 서예를 해왔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기도 했다. 여기저기 다녀도 보고, 책도 보면서 동양화를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내가 혼자 작업해왔는데, ‘뭐 안 돼도 하다보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까지 동양화를 작업하고 있는데, 정말 감사하다. 80이 넘은 이제야, 이제는 정말 ‘내가 누구지’라는 질문에 답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됐다. 동양화를 시작하기 전까진 나는 한국인으로 살아온 것 같지 않았다. 서양에 부속된 조그마한 동양에 붙어서 꾸물꾸물 살면서, 그냥 서양을 쫓아가려 애썼던 것 같다. 하지만 동양화를 시작하고, 살아오면서, ‘나’로 제대로 살게 된 것 같다. 윤두서의 그 강렬함이 잊히지 않는다.

▲
▲대구미술관 《윤석남》展을 찾은 윤석남 작가 (사진=대구미술관 제공)

작업을 함에 있어, ‘나’의 존재 이유나 내가 가진 ‘사명’에 대한 생각이 많았던 것 같다.

‘사명’이 없으면 나는 그림을 안했다. 그림을 시작하기 전부터, 어려서부터 ‘왜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지?’ 그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가 없었다. 내가 태어난 것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하룻밤의 정사에 의해서 태어난 것이지, 내가 의식적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부모님의 의식도 아니다.

그런데 인간은 태어나면,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시키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아가게 한다. 그 과정이 수만 가지가 있는 것이다. 내겐 그것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여성 초상화’ 작업도 내겐 사명이었다. 나에게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윤두서의 초상화를 보고와선, 여성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길로 ‘조선의 초상화’가 담긴 총 3권짜리의 책을 샀다. 그것을 정말 열심히 봤다. 그런데, 그 3권의 책 중에 여성의 초상화가 단 한 장도 없었다. 조선에서는, 그 시대에서는 여성은 인간이 아니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눈으로 여성 초상화가 단 한 장도 없는 것을 확인하니,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도 왕비가 있었고 공주가 있었는데, 어떻게 단 한 장의 여성 초상화도 없는 것일까. 자료를 열심히 찾아보니 신라시대에 한 장, 일제시절에 세 작품정도 있었다. 어떤 여자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것 이외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너희가 이런 식이었어? 그럼 난 여자를 그릴게’라고 결심했다.

처음부터 완벽한 초상화를 그리긴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친구들로 시작했다. 내가 그림을 시작하고,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도와준 친구들 24명을 그렸다. 그렇게 시작해서 여성독립운동가 초상 작업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림이라는 것은 화가가 철저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그릴 수 없는 것 같다. 내가 남성의 세계를 알고 깊어도, 그건 안다고 말 할 수 없는 것 같다. 앞으로도 내 작업 안에서 남성이 등장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싶다.

처음엔 화가를 직업이라고 인정하기 어려웠다고.

그림은 내가 택한 내 직업이었다. 사명과도 같은 일이다. 그런데 작업을 시작하고, 이것을 직업이라고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곤 했다. 왜일까 생각해보면, 그림을 팔아서 먹고 살수는 없으니까, 직업이라고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은 작품을 팔아서, 내 삶을 일궈나가고 있다.

그림을 시작하고 초창기 20년 동안은 남편의 월급에 의존해 작업을 했다. 왠지 작업을 하면서 내가 당당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남편에게 “나 가정주부야. 가정주부도 월급이 있어. 170만원은 내 월급이야”라면서 뻔뻔하게 딱 그 돈으로 작업을 했었다. 그렇게 딱 선언을 하고나니 누가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남편은 속으로 비웃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내가 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당당하고 싶었다. 가정에서 내 노동으로 번 돈으로 작업을 하고 당당하고자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아마 그래서 연애를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사실 화가라는 직업은 화가가 될 때까지 누군가가 도와줘야 하는 직업이라고 본다. 그게 나라이고, 정부라고 생각한다. 젊은 작가들이 기본적인 토대라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대구미술관 《윤석남》展 <1,025: 사람과 사람 없이> 전시 전경 (사진=대구미술관 제공)

1,025마리의 개를 표현한 <1,025: 사람과 사람 없이>도 이번 대구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여성독립운동가’시리즈를 포함해서 정말 오랜 시간을 들여서 진행하고 있는 시리즈들이 있다. 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2008년인가, 신문을 보다가 이애신 할머니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됐다. 정말 목적도 없이 유기견을 돌봐오고 있는 사람이었었다. 정말 개를 좋아하는 분이었다. 그 기사를 보는 순간에 갑자기 내 삶이 너무 부끄러웠다. 이렇게 한 생명을 위해 헌신하고 살아가는 존재가 있는데, 나는 뭘 하고 있는 것인지 다시 돌아보게 됐다. 화가라고 하면서 뽐내고 돌아다닌 것은 아닌지 돌아봤다. 정말 그 수많은 유기견을 보면서, 개를 버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키우던 개를 어떻게 버릴 수 있는지, 그것은 자식을 버리는 일과 같다고 본다. 그래서 할머니를 기억하고, 그 개들을 기억하는 작업을 하고자했다. 5년이 걸린 작업이었다.

이후에 인물 초상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됐고, 지금도 계속 여성독립운동가 초상 작업을 하고 있다. 지금 70분 정도 했는데, 자료만 있다면 100분까지 하고 싶은 것이 정말 큰 소망이다. 이 다음은 또 무엇을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의 얘기를 할 것 같다.

여성독립운동가들 작업에 대한 얘기를 좀 더 듣고 싶다.

계속해서 작업하고 있다. 남아있는 자료가 정말 없어서, 여성독립운동가 책을 보고 계속 찾아가면서 작업하고 있다. 지금까지 김마리아, 김알렉산드라, 강주룡, 김옥련 등 70여 분의 작업을 했다. 작품 안에는 운동가와 관련이 있는 장치들을 넣고 있다. 예를 들어 독립운동가를 도와줬던 분의 초상을 함께 넣기도 하고, 그가 들었던 총도 함께 그린다. 김알렉산드라는 한국 이름이 김보경이라는 분이다. 서른 초반에 처형을 당했는데, 러시아 하바롭스크 아무르 강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 먼 타국 땅에서 그렇게 독립을 외치다 돌아가신 게 참 마음이 먹먹해진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여성, 그리고 어머니로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중년의 여성들이 있다. 그들에게 해주고픈 말이 있다면.

어떤 얘기를 쉽게 할 수 있진 않을 것 같다. 내가 살아온 과정 속에서 얘기를 한다면, 여성이라고 해서 내가 이거 하면 안 된다는 의식은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일이든 자기가 좋은 일이라면, 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은 얌전하고, 조신해야 하고 여성스러워야 한다는 그런 걸 어렸을 적부터 배운다. 특히 내 세대에서는 너무 당연한 것이다. 이것은 여성뿐 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말하고 싶다. 그냥 한 명의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라고, 모두 그렇게 살길 바란다. 자신의 모습을 여성이나 남성이라는 한계에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업실에서 사진 촬영에 응하는 윤석남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작업실에서 사진 촬영에 응하는 윤석남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지금의 내가 40살의 윤석남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림 시작 잘했어. 나는 그때의 네가 존경스러워. 포기하지 않고, 그냥 했다는 것이 윤석남 나에게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야.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모르고 그 이유를 계속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발견한 이후에는 어떻게든 그 길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되든 안 되든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나아가는 것, 그것이 중요한 일이다.

앞으로 전시 계획이 궁금하다.

앞으로는 전시를 안했으면 좋겠다. 수장고에서 작품이 들어가고 나가는 것이 힘들다. 작업만 계속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올해 내가 85세인데, 앞으로 얼마나 더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곤 한다. 나는 오래 살고 싶다. 그냥 사는 것은 원치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계속 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목숨이 붙어있는 일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어떤 작가이고 싶은가.

‘여성주의 작가’라는 것을 거부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날 한정시키는 말이 아니다. 끊임없이 기운이 있어서 하나라도 더 작업을 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잊히고 싶지 않다. 잊히는 것은 슬플 것 같다. 그래서 끊임없이 내 작품이 다른 이를 환기시키고, 내 작품이 그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얘기를 듣는 작가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