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 최영훈의 고택산조, 정선겸의 요정산조
[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 최영훈의 고택산조, 정선겸의 요정산조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4.03.2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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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2024산조대전은 ‘한갑득류 거문고산조’와 ‘박대성류 아쟁산조’로 시작했다. (3. 14 서울돈화문국악당) 한갑득(1919~1987)과 박대성은 처남 매부 사이. 한갑득의 아내가 박보아(1921~2013)고, 박보아의 남동생이 박대성(1938년생). 1950년대 여성국극의 최고 단체인 국극단 삼성(三星)의 음악감독이 한갑득이고, 별처럼 빛난 세 주인공이 박보아, 박옥진, 조양금이다. 

박대성은 진도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서울로 올라와 삼성국극단과 함께 생활하면서 10대를 보냈다. 여성국극단체에서 아쟁악사로 활약했다. 아쟁이란 악기가 여성국극과 밀접하지만, 특히 이번에 연주한 ‘박대성류 아쟁산조’는 여성국극 분위기가 참 많이 느껴졌다. 

거문고산조는 최영훈, 아쟁산조는 정선겸이 연주했다. 자기 세계가 분명한 두 연주가의 산조는 우리를 경험하지 못한 시공으로 신비롭게 안내했다. 마치 1960년대의 숨은 고수(高手)의 은밀한 명연주를 듣는 묘한 기분이었다. 두 사람에게선 예전 도제(徒弟) 교육의 장점이 느껴졌다. 스승이 어떤 가락을 일러주며 학습하라고 일렀고, 그걸 자기 스타일로 만든 ‘수련의 과정’을 통한 공력이 전달되었다. 

산조는 ‘장단놀음’이다. 몸에 내재(內在)한 가락을 장단의 틀 속에서 잘 풀어내야 한다. ‘보고 타는’ 최영훈은 국립창극단 최고의 베테랑임을 증명했다. 최영훈은 적절하게 고수를 쳐다보면서 호흡을 느끼고, 때론 고수의 호흡까지도 흡수했다. ‘감고 타는’ 정선겸은 아쟁과 활대에만 시선을 두었고, 단 한 번도 고수를 쳐다보지 않고 자신의 가락에만 몰두했다. 다 끝나고서 고수를 쳐다봤다. 가락과 장단이 마치 ‘밀당’하는 듯이 엇박(싱코페이션)이 많은데, 이태백 명고처럼 노련하지 않고서는 연주하기 매우 힘들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은 최영훈 vs.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정선겸 

산조는 가락을 이어가면서 전개한다. 이런 행위를 동사로 표현한다면 가락을 ‘뽑아낸다’고 하겠다. 최영훈은 가락을 버릴 줄 알았다. 가락을 ‘털어낼 줄’ 알았다. 최영훈은 순간순간 좋은 가락을 참 많이 만들고, 그걸 허공 속으로 날려 보낼 줄 알았다. 최영훈의 가락은 가히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은 담담함이 좋았다. 
이에 반해, 정선겸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당당함이 있다. 그의 연주력은 독선(獨善)에 기반한 듯 싶다. ‘혼자서[獨] 택한 최선[善]의 길’을 묵묵히 가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 바로 이게 나야, 어쩔래” 이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컴플렉스를 에너지화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고독한 자유로움 또는 배타적 안정감이 전달됐다. 

귀족적인 엘레지 vs. 서민적인 블루스 

산조를 흔히 재즈에 비유한다지만, 두 사람의 산조는 재즈風은 아니다. 자유로운 즉흥성으로만 얘기하는 걸론 부족하다. 그보다 깊은 내면이 확연하게 존재한다. 하나는 엘레지(Elegy), 또 하나는 블루스(Blues)다. 최영훈은 귀족적인 느낌, 정선겸은 민중적인 느낌이 강했다. 최영훈의 산조는 슬픔의 정조를 밑에 깔고 가면서도 ‘성찰의 품격이 전달되는 엘레지’였다. 정선겸의 산조는 뒤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한 시대를 그렇게 살아야 했던 한 예인, 그 시대의 박대성 혹은 이 시대의 정선겸을 보는 것 같았다. 불만을 해소하면서 ‘불안(不安)을 농축시킨 블루스’ 같았다.  

최영훈 산조를 고택(古宅)산조라 부르고 싶다. 풍류(정악)를 아는 지식인들이 모인 어느 고택에서, 산조의 명인을 초대해서 은밀하게 느껴보는 산조의 세계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1960년대, 서울 수송동의 어느 한옥에서 들리는 거문고산조가 저랬을 거다. 

정선겸 산조를 요정(料亭)산조로 부르려 하다. 주(酒)와 주(奏)는 불안심리를 떨치기에는 안성맞춤이라고 했던가? 부산 동래의 어느 고급스러운 요정에서 손님이 다 빠진 후 아쟁 악사가 스스로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자신을 위무(慰撫)하듯 연주하는 가락이 저랬을 것 같다. 

지금 서울과 부산에서 이런 가락을 듣는 일은 불가능하다. 한갑득류 거문고산조와 박대성류 아쟁산조를 연주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이렇게 시대적인 배경까지 느끼게 하는 연주는 거의 드물다. 그래서 이 두 연주자가 참 귀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