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무용) 수상자] 김숙자 한성대 명예교수 “전통춤으로 세대를 아우르는 ‘마음의 흐름’을 잇다”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무용) 수상자] 김숙자 한성대 명예교수 “전통춤으로 세대를 아우르는 ‘마음의 흐름’을 잇다”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4.03.28 1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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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이수자…한영숙, 김진걸, 이매방 사사
‘링반데룽Ⅱ-불멸의 처’ 작품성 인정 받아 2009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선출
“전통보다 새로움이 강조되는 창작무용은 ‘한국무용’ 아닌 ‘현대무용’”
“춤의 절정서 표출되는 ‘민족 내면의 한(恨)’을 노래하다”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ㆍ진보연 기자] ‘미완의 개혁 군주’ 중 한 사람으로 통하는 고려 제31대 공민왕은 재위 중 원나라 배척운동을 통한 영토회복과 개혁정치를 폈으나 사랑하던 노국공주의 죽음 뒤 혼돈 속으로 빠져든 불운의 왕으로 평가받는다.

자주국가 다지기, 그리고 불발에 그치긴 했지만 과감하게 개혁의 기치를 올리는 등 숱한 치적에도 불구하고 원나라 출신의 왕비 노국공주가 죽은 뒤 걷잡을 수 없는 퇴락의 길을 걸었던 왕의 혼돈을 ‘링반데룽(Ringwanderung)’으로 표현한 작품이 있다. ‘링반데룽’은 산에서 안개나 폭우, 폭설 등으로 방향감각을 잃고 같은 지역을 맴도는 것을 말한다. ‘환성 방황’이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다른 길로 가려고 애를 써도 계속 제자리라는 뜻.

▲2008년 2월 <링반데룽_불멸의 처> 무대를 선보이는 김숙자 명인
▲2008년 2월 <링반데룽Ⅱ_불멸의 처> 무대를 선보이는 김숙자 명인

김숙자는 지난 1991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작품 <링반데룽>을 확장해 2007년 <링반데룽Ⅱ-불멸의 처>를 선보였다. 그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치명적인 사랑을 주제로 당시 고려사회의 가치관과 죽음을 초월하는 사랑의 의미를 전통성과 현대성의 적절한 조합으로 탄생시켰다. 이 작품을 두고 평론가 김태원은 ‘탄탄한 무용극적 구조와 양보 없는 사랑의 주제성’이라 말했으며, 김승연은 ‘한국 전통춤과 창작춤의 한 부분을 받치고 있는 김숙자씨가 자신의 대표작을 현대적으로 버전업한 이 작품은 무용극이 얼마든지 존재 가치가 있음을 보여줬다. 즐겁고, 아름답고, 내용이 쉽고, 감동을 준다’라는 평가를 남겼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자 한성대 명예교수인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이수자 김숙자 명인은 신무용 제2세대를 대표하는 한국무용가이다. 근대 전통무악의 거장 한성준의 예맥을 잇는 한영숙 문하에서 중고제 전통춤을 익히고, 신무용의 대가 김진걸에게 산조춤을 사사했다. 아울러, 김진걸의 산조춤 형식인 <내 마음의 흐름>을 재구성한 김숙자의 독무 <실심초>를 선보이기도 했다.

무용평론가 성기숙은 “오늘날 김진걸 산조춤의 미적 완결성은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을까? 눈과 귀를 열고 오감을 날세워 관찰하건대, 그 주인공은 바로 김숙자가 아닐까 싶다“라고 평한 바 있다. 산조춤의 명인이라고 불리우는 김진걸의 사사아래 처음 무용을 시작한 김숙자는 1960년 시민회관에서 무용인합동공연 무대를 경험하면서 두각을 드러낸다. 수도여자사범대학을 다니며 한영숙을 만나 승무와 살풀이 등을 배웠다. 이후 다양한 무대에서 춤꾼의 면모를 보였을 뿐 아니라 무용교육자로서 후학양성에도 힘썼다. 

김숙자의 춤의 경도는 견고한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견고한 기본기의 원천은 마이스터 한영숙과 김진걸로부터의 사사, 이매방, 김천흥에게 배운 전통춤을 학습한 데 기인한다. 흐트러지지 않는 단정한 맵시로 정갈하면서도 고야한 미적 감각을 과시한다. 가야금 선율을 타고 넘는 춤에서 정중동의 미학과 특유의 카리스마가 압권이다. 특히 맺고 끊는 춤사위의 경계가 뚜렷하며 온화함 속에 시원시원한 직선의 묘미 그리고 한국춤 어법에서 드물게 어깨선과 얼굴 시선 처리의 명료함이 돋보인다. 

한편, 더 춤 연구원 이사장이자 한성대학교 무용학과 명예교수인 그는 한성대 예술대학 예술대학장과 한울무용단 예술총감독을 역임했다. PAF예술상(2001), 대한민국 옥조근정훈장(2009), 교육인적자원부 교육부장관 표창장(2007), 서울시 문화상(2013) 등의 수상 경력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창작 작품으로 <인생유전(1980)>, <귀거래(1982)>, <화사(1986)>, <오열도(1988)>, <링반데룽(1991)>, <내림새여(1994)> 등이 있다. 과감한 극적 표현성, 삶의 유전과 순환성을 강조한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그의 창작춤 공연미학은 ‘상황적 무용극’이라 명명된다. 

또한 김숙자는 “전통예술을 하는 사람은 ‘예기자’이지, 창작을 하는 ‘예술가’가 아니다. 전통에 창작을 더해 발전시켜야 한다”라는 조동화 선생의 가르침을 착실히 이어왔다. 전통춤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춤 세계를 확고히 다진 김숙자는 우리 춤에 대한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며, 우리 춤의 계승과 발전에 큰 공헌을 해왔다.

해방 이후 교육과 창작를 병행한 대표적 한국무용가로 전통춤과 신무용을 전승하면서 동시에 한국창작춤의 독창적 예술세계 및 공연미학을 정립했다. 70년대 초반 아카데믹한 무용단체 학림회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1986년 대학 동인무용단체 한울무용단을 창단하여 제자들에게 활동 발판을 마련해줬다. 일평생 춤꾼으로 살아오며 전통춤과 신무용, 한국창작춤을 아우르는 예술적 성취에 존경의 마음을 보내며, 본지 서울문화투데이는 김숙자를 제15회 문화대상 무용 부문 수상자로 선정했다. 전통의 창조성을 내세우며 우리 춤의 한 축이 된 김숙자 명인을 만나 그의 춤을 이루는 것들을 함께 들여다 봤다. 

제15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수상을 다시 한번 축하드리며, 시상식 당시 전하지 못한 수상소감과 상을 받은 소회가 궁금하다.

현장에서 많은 수상자들이 말했던 것처럼, 안으로 들어와서 보니 밖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무거운 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대 수상자들을 보니 특히 그랬다. 이 상의 무게가 영광의 무게로 느껴지기도 한다. 수상 사진을 메신저 배경으로 설정해놨더니, 축하 인사도 많이 받았다. 

수상 소식을 접했을 때, 오랜 무용 세월이 스쳐 지나갔을 것을 텐데 어느 시기, 어떤 작품이 가장 먼저 떠올랐는가.

나와 함께한 모든 작품에 애정이 커서 하나를 딱 집어 고르기엔 어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특히 애착이 가는 작품 하나를 꼽으라면 ‘링반데룽Ⅱ-불멸의 처’라 하겠다. 먼저 선보였던 ‘링반데룽’(황순원 단편) 은 일명 환상방황으로 1991년에 공연된 작품이다. 그리고 ‘링반데룽Ⅱ- 불멸의 처’는 2007년의 작품으로 ‘불멸의 처’ 또한 환상방황이라 해석하여 ‘링반데룽Ⅱ-불멸의 처’ 로 컨셉을 잡은 것이다. 이 작품은 이원경 선생의 희곡으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 얘기이며 안효근 선생 대본이다. 이 작품은 2007년 문화예술위원회의 무대공연작품제작지원사업 선정작이고 대한민국예술원 우수예술발굴지원 사업에 선정된 작품이다. 이듬해 2008년에 앵콜 공연을 했다. 

아울러 이 작품은 다수의 평론가들로부터 의미있는 평을  받았다. 평론가 김태원은 ‘탄탄한 무용극적 구조와 양보 없는 사랑의 주제성’이라는 평을 남겼으며, 평론가 김승연은 ‘한국 전통춤과 창작춤의 한 부분을 받치고 있는 김숙자씨가 자신의 대표작을 현대적으로 버전업한 이 작품은 무용극이 얼마든지 존재 가치가 있음을 보여줬다. 즐겁고, 아름답고, 내용이 쉽고, 감동을 준다’라고 평가했다. 이 글을 아직까지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이유는, 창작자의 의도와 관람객의 감상이 정확히 일치하는 경험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된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여 더욱 애착이 크다. 이 작품은 언젠가 꼭 다시 무대에 올리고 싶었는데, 올해 10월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일부 장면이나마 선보일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쁘다. 과거 출연했던 제자들이 선뜻 출연을 결정해주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링반데룽Ⅱ- 불멸의 처’에 앞서 선보였던 ‘링반데룽’(1991)은 문예진흥원 창작활성화 지원작품에 선정된 작품으로 김태원 선생의 대본이다. ‘상황적 무용극’으로써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무용극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줬고, 한국 창작춤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현대적으로 바꿨다는 평가도 받았다. 같은 해 11월에 문예진흥원의 우수 레파토리 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부산, 대구, 여수의 순회공연을 했고, 3년 후인 1994년 재공연 됐다.‘상황적 무용극’으로써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무용극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줬고, 한국 창작춤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현대적으로 바꿨다는 평가도 받았다. 

▲제15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무용) 부문 수상자 김숙자 교수(가운데)
▲제15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무용) 부문 수상자 김숙자 교수(가운데)

14세 때 김진걸 문하에 입문하여 신무용 스타일의 한국춤을 체득했다. 처음 어떻게 춤을 시작하게 됐는지.

6.25 전쟁이 발발한 후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휴전이 된 후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학교에 다니는 부잣집 딸 아이가 예술제에서 족두리를 쓰고 부채춤을 추는 모습을 봤는데 너무 아름다웠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를 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뇌리에 박혔다. 하지만 집안이 어려웠기 때문에 그런 걸 넘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후 중학생이 됐는데, 옆에 있는 친구가 같이 무용을 하러 학원에 다니자고 하더라. 무용을 하고 배우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지, 어디의 누구를 찾아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소문만 듣고 돈암동으로 김진걸 선생님을 직접 찾아가게 된 거다. 김진걸 선생님은 신무용가로 자기 춤을 창안하여 추셨던 분으로서 그 시대의 창작 무용가셨다. 선생은 평생 산조를 무용 생활의 반려로 삼으셨고, 대표작‘내 마음의 흐름’은 1992년 명무로 지정됐다. 

나는 춤이 뭔지도 모르고 중학교 2학년 때 선생의 문하에 입문하여 산조춤을 배웠다. 움직임이 좀 익숙해지면서는 산조춤이 좋아서 그 춤을 즐겨 했다. 가야금 음율에 젖어 긴 호흡으로 알 수 없는 세계에 흠뻑 빠져들어 산조 춤을 추고 나면 전신이 후련하여 뭔가 한 거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반대로, 다른 춤을 출 때는 시답지 않았고 또 추고 나서도 춘 것 같지 않아 시간 때우기 식으로 대충 넘어가곤 했다. 오늘날 나의 춤집 형성은 그때의 산조춤에서 시작됐다.

이후 수도여사대(세종대 전신)에 입학하여 한영숙에게 전통춤을 체계적으로 익혔다. 명무로 꼽히는 한영숙을 사사한 것이 본인의 춤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김진걸 문하에서 춤집이 형성되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해에 당시 공보부 주최, 주관이었던 신인 무용 콩쿨에서 수상 하여 평가를 받은 상태였다. 그 후 수도사대 3학년 때 한영숙 선생님이 출강 나오시게 되면서 전통무용에 입문하게 됐다. 한영숙 선생님하고는 졸업 후에 깊은 인연이 없었지만, 선생님은 나만 보면 (전통무용) 공부를 다시 하라고 몇 년을 말씀하셨다. 내가 처음 춤을 배운 김진걸 선생님은 신무용의 대가셨지만, 전통에 약했던 것을 알고 해주신 말씀이셨다. 선생님이 부를 때 빨리 갔어야 했는데, 공부의 필요성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이후 대학원에서 (한영숙 선생님을) 뵙게 되어 살풀이춤, 승무 등을 공부하면서 춤의 지평을 넓혀 나갈 수 있었고 1988년에는 한영숙류 승무(중요무형문화재27호) 이수 평가를 받았고 살풀이춤과 태평무를 익혔다. 더불어, 이매방 선생께도 승무와 살풀이, 오고무 등을 배웠다. 마음먹고 열심히 공부해, 나의 바탕을 만들었다. 오늘날 전통과 창작을 함께 아우르는 나만의 춤을 창출ㆍ 병행하여 한국춤 현대화 작업으로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86아시안게임 문화예술축전작품 ‘화사’ 공연 장면
▲86아시안게임 문화예술축전작품 ‘화사’ 공연 장면

한영숙과 이매방의 가르침을 모두 받았다니, 두 선생의 춤은 어떻게 다른가.

우선 한영숙 선생님은 정경부인 같은, 기품있는 살풀이였다. 고고함과 함께 대쪽같은 이미지가 있었다. 지금은 춤의 형태도 많이 바뀌고 있지만, 이매방 선생님의 초기 춤은 이와는 반대에 있다고 생각했다. 고혹적이고 교태가 넘치는, 산전수전 다 겪은 자의 춤사위 같았다. 그래서 나의 취향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굳이 배우려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춤은 역시 보는 것과 하는 것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매방 선생님께 가서 춤을 배워보니, 내가 이전에 객석에서 바라봤을 때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감상을 줬다. 아주 진국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은 역시 춰봐야 아는 것 같다.

‘전통의 현대화’를 화두로 창작춤에 대한 깊은 사유를 이어왔다. 김숙자의 작품들은 ‘극적 표현’, ‘문학성’ 등이 특히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데, 창작춤 작업을 할 때 가장 중심에 두는 가치는 무엇인가.

무용 평론가 故 조동화 선생님께 받은 영향이 굉장히 크다. 오늘날 그런 분이 한 분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된다. 선생께서 “전통예술을 하는 사람은 ‘예기자’이지, 창작을 하는 ‘예술가’가 아니라고 하셨다. 전통예술을 제대로 익히되 창작을 고취시켜 무용계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하셨고, 그 가르침을 이어 지금에 이르게 됐다.

문학성과 철학성, 역사성과 종교성이 내재 된 삶의 진실, 자연의 아름다운 현상, 소설과 시 그리고 자연에서 영감을 얻는다. 일단 대본이 정해지면 시놉시스와 콘티를 논리적으로 탄탄하고 내밀하게 짠다. 움직임에서는 깊숙이 내재 되어 있는 인간 내면의 끈끈한 표출과 표현의 극대치를 위해 연극성과 장르의 구분 없이 마음이 요구하는 대로 다양성을 추구한다. 

<화사>(1986)는 천경자 화백에게 들은 실화를 이원경 선생이 대본으로 옮긴 작품이다. 86아시안게임 문화축전 출품작이었으며, 그 당시에 한국춤 현대화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최초의 시도였다. 그 당시 ‘춤’사에서 (춤 86, 11월) <화사>는 한국춤 현대화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최초의 시도로 문제작이었다고 보고 「김숙자의 화사를 생각함」 이라는 주제로 노대가들을 모시고 ‘이달의 좌담’을 진행했다. 좌담에서 ‘화사’는 현대무용이 가지고 있는 벽도 깨고 한국무용이 가지고 있는 벽도 깨어서 한국무용과 현대무용의 접근을 시도한 작품으로 가치가 있는 문제작이었다고 생각 한다며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셨다.  그 후 87년6월 작품 ‘귀거래’와 ‘화사’의 재공연 <김숙자 창작무용공연>이 있었다. 평론가 김태원은 “‘화사’는 인상적인 춤동작과 절도있는 끝맺음과 설화적이고 풋풋하며 애조띤 정서를 바탕에 깐, 서정적인 극장춤이었다”라고 평했다. 나는 이 작품에서 한국무용이 나가야 할 방향 제시를 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무용과 함께한 세월이 쌓일수록, 전통춤을 대하는 자세와 이를 통해 새롭게 탄생하는 창작 작품도 변화할 것 같다. 이 가운데 반드시 지키고 싶은 정체성은 무엇인가.

우리는 내면에 한(恨)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춤의 절정에 가서는 꼭 그게 표출되어야 한다. 우리 민족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신세계가 표현돼야 비로소 우리 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춤의 정체성은 한의 분출이고 따라서 한국 춤에서 한을 간과하면 생명력이 없다. 그걸 분출하기 위해서는 하단전부터 호흡과 집중력을 가지고 깊게 토해내듯 풀어줘야 한다. 가만히 서 있어도 진하고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것이 있다. 이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젊었을 때 창작만 시도했을 땐, 전통춤의 소중함을 몰랐다. 어느 정도 연륜이 쌓이면서 스스로 그걸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창작을 위해서는 우리 전통의 내재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시대가 변화하며, 장르 간 명확했던 구분이 조금씩 흐려짐을 느낀다. 교류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새로움을 선보이려는 시도는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럴수록 자신을 이루는 중심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지해야 한다. ‘한국 창작 무용’에서 전통보다 새로움이 더욱 강조된다면, 이는 더 이상 한국무용이 아닌 현대무용의 범주에 속하게 될 것이다.

▲김진걸의 산조춤 <내 마음의 흐름>을 재구성한 김숙자의 독무 <실심초>
▲김진걸의 산조춤 <내 마음의 흐름>을 재구성한 김숙자의 독무 <실심초>

딸 최원선 본(本)댄스컴퍼니 대표도 한국 춤의 길을 함께 걷고 있다. 지난 2021년에는 함게 <춤의 여정-맥을 잇다> 공연으로 한 무대에 서기도 했는데, 딸이 전통 무용을 하게 된 것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전통무용이 한국무용의 전부가 아닌데 일반적으로 그렇게 인식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딸도 한국무용가로서 전통무용을 포함한 현대창작, 신무용기의 춤까지 다양한 분야에 활동을 한다. 신무용기 이전에는 전통춤 하나뿐이었지만 조선말기 근세 시대에 새로 만들어진 신무용과, 현대 오늘 이 시대에는 한국 창작무용 이렇게 구분된다. 고로 지금은 전통무용, 신무용, 현대 한국창작무용 이렇게 구분돼야 할 것이다.

사실 나는 (무용을) 하다 보니 자기 회의도 많고 너무 힘도 들고 해서 안 시키려 했는데, 딸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무용이 하고 싶다고 해서 허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열심히 했다.

이처럼 딸도 무용을 오래 했지만, 한 번도 내가 가르쳐본 적이 없다. 엄마는 어디 있어도 엄마고, 스승이 (따로) 있어야 한다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다 이 공연 때문에 처음 같이 하면서, 참 많이 부딪혔다. 공연에서는 ‘살풀이’, ‘진도북춤’, ‘내 마음의 흐름(산조춤)’, ‘실심초(산조춤)’를 선보였다. 더불어 내가 그간 작업해 온 안무작 중 ‘내림새여’(1994), ‘화란춘성’(1993), ‘심연에서’(1996)와 딸이 안무를 맡은 창작신작 ‘조우’가 무대에 올랐다. 나의 춤 인생에 중심이 되어 주신 김진걸, 한영숙 선생님이 생전에 가장 많이 추셨던 ‘내 마음의 흐름’과 ‘살풀이춤’과 딸의 스승이셨던 박병천 선생님의 ‘진도북춤’을 통해 우리 사이에 흐르는 맥을 잇고자 했다. 나와 딸의 맥도 있지만, 우리 어른, 선생님과의 맥을 다시금 짚어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강조하는 자세와 태도가 있는지 궁금하다.

요즘 추세는 선조들이 남겨 놓은 춤 유산에 지나치게 매몰되거나, 반대로 창작에 지나치게 꽂혀 오히려 주체성을 상실한 채 자기도 모르는 무대를 만드는 경향이 있다. 정체성을 가지며, 쉬우면서도 예술성 짙은 내용으로 관객들의 ‘공감’을 이끄는 무대를 만들었으면 한다. 자기만 아는 얘길 무대에서 관객에게 1시간 이상 쏟아내는 것은 어떻게 보면 고문이다. 창작자가 느끼기에 아무리 차원이 높고 심오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보는 이들에게 와닿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공연예술은 미술 장르와 달라서, 현장에서 느끼지 못하면 휘발되고 만다. 그래서 시각적, 청각적 효과를 최대한 활용해 표현해야만 한다. 

제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가치관을 바로 세우고 의미 있는 일과 진실을 추구하며 보람 있는 삶을 살자.’ 이것이 요즘 나의 좌우명이다.

어떤 무용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나는 한국 창작 춤의 현대화로 새로운 흐름을 보여준 작가로 남을 것이다. 나의 분신과 같은 솔로 ‘심연에서’(1996)와 2001년 11월에 초연했던 산조류의 창작춤‘실심초’라는 작품이 있다. 2001년에 초연하여 지금까지 20회 가까이 공연한 작품이다. 이 춤은 성금연의 가야금 음과 안숙선의 구음 시나위에 맞춰 추는데,‘내 마음의 흐름’ 의 다른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성의 내면과 심리, 현실의 존재감을 산조 음율의 미학적 관점에서 그려진 작품인데 내 솔로의 대표작으로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