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 영화가 된 여성국극, <선화공주> <왕자 미륵> <햇님과 달님> <가야금>
[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 영화가 된 여성국극, <선화공주> <왕자 미륵> <햇님과 달님> <가야금>
  • 윤중강 평론가/연출가
  • 승인 2024.11.13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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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평론가/연출가
▲윤중강 평론가/연출가

드라마 ‘정년이’로 여성국극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여성국극이 부활할 것인가에 대해선 의문이 들지만, 여성국극이 1950년대 최고 흥행물로서 당시 여성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는 사실은 알린 것은 매우 큰 성과다. 여성국극은 1960년대 초반 영화산업의 육성과 함께 몰락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에 제작된 사극영화는 대개 이미 여성국극에서 인기를 끌었던 소재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여성국극 <햇님과 달님> vs. 영화 <햇님왕자와 달님공주>

영화 <햇님왕자와 달님공주>(1962년, 장일호 감독)는 여성국극 최초 히트작 ‘햇님과 달님’(1949년)을 똑같이 영화로 만들었다. 국극과 영화의 배역을 비교하면 이렇다. 박귀희와 최무룡이 해님왕자(월지국 부마), 김소희와 김지미가 달님공주(월지국 공주), 김연수와 도금봉이 샛별이(시녀), 정유색과 황정순이 월지국의 여왕, 박록주와 최남현이 해님왕자의 아버지 역할이었다. 여성국극의 주역이었던 김소희가 음악에 참여했고, 송범무용연구소의 군무가 등장하나, 필름은 아쉽게도 유실되었다. 

<가야금의 유래>, 국극에서 연극으로, 연극에서 영화로 

한국전쟁기, 부산으로 피난한 유치진은 <가야금>이란 국극 대본을 완성한다. 이런 대본은 이후에 연극 또 영화로 이어졌다. 1951년, 부산 동아극장에서 초연한 여성국극 <가야금의 유래>는 전쟁 전부터 부산에 정착한 박성옥이 맡았다. 그는 <햇님과 달님>에서 연주를 담당했는데, 월북한 조상선의 뒤를 이어서 여성국극의 음악에서 큰 역할을 했다. 가실왕은 박귀희, 배꽃아기는 김소희가 맡았다. 햇님달님의 콤비가 중심이 된 또 하나의 히트작이다. 

가야금명인은 우륵 역할은 신숙으로 전해진다. 신숙은 후세에 널리 알려지지 못해 아쉽다. 경상남도 함양출신으로, 가야금도 출중한 분이다. 1930년대 오케레코드 소속으로 ‘오케실연음악회’에서 임방울과 짝을 이뤄서 공연했다. <가야금>에서 아쟁 악사로 참여하게 된 사람이 전황이고, 그는 여성국극의 안무자로서 여러 작품에 참여했다. 

환도 후 1954년, 시공관과 평화극장에선 연극 <가야금의 유래>가 상연되었다. 가실왕은 김동원, 배꽃아기는 최은희, 우륵은 이해랑이 맡은 극단 신협 작품으로, 음악은 나운영(작곡가)이었다. 이 작품은 1964년 영화로 만들어졌다. 우륵 역할을 황병기가 맡는다는 얘기도 있었으나, 황병기는 영화음악만을 담당하였다. 우륵 역할은 김진규, 가실왕은 신성일, 배꽃아기는 최지희였다. 

여성국극 최고 흥행작, 한국 최초 컬러영화가 되다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한 이야기는 <선화공주> 이 작품의 원작자는 월북한 조명암(조령출, 1913~1993). 해방후 국악인들이 모여서 민간단체인 국악원(대한국악원)을 만들었다. 이 때 국극(창극)이 몇 편 만들어졌는데, 당시 시민들이 가장 좋아한 작품이다. 국악원 산하 ‘국극사’ 2주년 작품이었는데, 1948년부터 1949년까지 크게 히트했다. 최초의 선화공주 역할은 신숙이 맡았다. 이 작품은 여성국극 시대를 맞이하면서, 여성국극 <선화공주전>으로 인기를 끌게 된다. 이 때는 선화공주보다 서동의 인기가 대단했는데, 서동(맛동) 역할의 최고의 인기인은 박귀희(1921~1993). 

영화 <선화공주> (1957년, 최성관 감독)도 서동(마동방)역할은 박귀희로 이미 정해졌다. 전주의 영화자본으로 만든 영화로, 우리나라 최초 16mm 컬러영화로 알려졌다. 당시 전주에 거주하던 신쾌동(거문고 명인)이 영화음악에 참여했다. 당시 극장무대에서 인기를 끈 김근자가 선화공주역할을 맡았고, 쇠돌이 역할은 김희갑 배우였다. 이 작품을 계기로 김희갑과 박귀희는 평생 예술적 동지로 활동해서, 박귀희의 큰 공연에서 김희갑이 사회를 맡기도 했다. 

국극배우 김경애를 ‘일목장군’으로 불렀던 이유

여성국극 <왕자 미륵이>(1955년)하면, 김경애를 떠올린다. 임춘앵 문하에서 수학했다. 임춘앵의 대역으로 유명했고, 임춘앵의 상대역을 하기도 했다. 여성국악단 임춘앵에서 독립한 김경애는 ‘새한국악단’을 이끌었다. 1955년 최고의 히트작으로, 조 건 작, 이원경 연출, 박동진 작곡이다. 여성국극 3대 작가로 조건, 김아부, 고려성을 꼽을 수 있다. 

국극배우 김경애는 <마의 태자>와 <왕자 미륵이>가 대표작이다. 여성국극에선 <왕자 미륵이>가 제목이지만, 눈에 안대를 가리고 나온 김경애 인기가 대단해서 일목장군(一目將軍)으로 통했다. 그래서 당시와 훗날, 이 작품을 <일목장군>이라 부르기도 한다. 영화 <왕자 미륵>(1959년, 이태환 감독) 또한 여성국극을 바탕으로 각색한 작품으로, 방수일이 주인공이다. 

과거의 정서 x 지금의 감각 = 새로운 여성국극 

이외에도 여성국극과 연관된 영화는 더 있다. 영화 <대춘향전>(1957년, 김향 감독)은 여성국극단 삼성을 이끈 인물이 영화사를 차려 제작한 작품이다. 박옥진 박옥란 조양금 조양녀가 주역을 맡았다. 이외에도 태창영화사가 만든 영화 중에도 여성국극과의 연관되는 영화가 있다. 태창영화사의 김태수 회장의 아내는 김경수. 그는 여성국극단 ‘진경’을 이끈 김진진과 겸경수 자매의 동생으로, 여성국극에서 남성 역할로 크게 인기를 끌었다. 

1950년대의 여성국극, 1960년대에 영화로 만들어진 여성국극 소재의 한국영화는 그 시대의 작품으로 마침표를 찍을 작품은 아니다. 이것에 새로운 시각이 더해진다면, 이 시대의 흥행물로서 손색이 있을 수 있다. 여성국극은 ‘과거의 정서’와 ‘지금의 감각’이 잘 어우러질 때, 새로운 흥행물로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있다. 그 시절 여성국극을 ‘민족오페라’라고 불렀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