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 다비트 라일란트, 편안한 템포와 적절한 밸런스로 드라마 몰입시켜
소프라노 이혜정 등 고른 역량으로 열연, 최현영 쳄발로 즉흥연주 돋보여

유쾌하고 재미있었다. 관객들은 미소와 함께 드라마에 몰입했고,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22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국립오페라단의 <피가로의 결혼>은 큰 성공이었다. 아름다운 음악과 재기발랄한 연출이 만나 시너지를 이룬 무대에 관객들은 크게 만족했다.
귀족과 하인이 동등해지는 세상을 예고한 <피가로의 결혼>은 오페라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바람둥이 백작은 결혼을 앞둔 하녀 수잔나에게 흑심을 품고 ‘초야권’을 부활시키려 하는데, 수잔나와 새신랑 피가로, 그리고 백작부인이 힘을 합쳐 백작의 위선을 폭로하고 사과를 받아낸다는 줄거리다. 이 오페라가 초연된 1786년 5월 1일은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기 불과 3년 전이었고,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은 <피가로의 결혼>에서 시작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코믹 오페라의 최고 걸작’으로 인정받은 이 작품은 연출자의 해석에 따라 새로운 맛을 더해 왔는데, 이번 공연은 무대를 현대로 옮겨놓은 파격적 연출을 선보인다는 예고와 함께 궁금증을 더해왔다.
뱅상 위게의 연출은 예상보다 도발적이지 않았다. 원작의 무대는 18세기 후반 세비야지만 1930년대 유럽의 패션 회사로 옮겼고 백작은 사장, 백작 부인은 유명 디자이너, 수잔나는 수석 디자이너, 피가로는 잡일을 도맡아 하는 직원으로 설정한 게 전부였다. <피가로의 결혼>은 수많은 등장인물이 자기 입장과 이해관계에 따라 얽혀서 갈등하기 때문에 스토리 구조가 매우 복잡하다. 여기에 연출자의 새로운 해석이 덧칠되면 자칫 이해하기 어려운 프로덕션이 되지 않을까 우려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원작의 흐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작위적인 장치가 없었기 않았기 때문에 관객들은 편안하게 드라마에 몰입할 수 있었다.
뱅상 위게는 기자회견에서 “한국에서의 연출은 유럽에서의 연출과 다를 수밖에 없다”며 “영화 <기생충>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한 공간 안에서 사장 부부와 피고용인들이 함께 살며 갈등하는 구조는 <기생충>을 연상시켰고, 2층 건물의 각 방을 무대로 활용한 게 <기생충>의 영감이라는 걸 관객들은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그의 연출은 디테일의 액션과 동선에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했다. 1막 첫머리에서 피가로와 수잔나가 차를 마시며 대화하고 2막 피날레 7중창에서 피가로가 사장과 부인에게 스테이크를 서빙한 것은 프랑스 연출가답다는 느낌을 주었다. 1막 케루비노가 수잔나의 치맛폭 속에 숨고 2막 수잔나가 장롱에서 나올 때 발레 <코펠리아>처럼 자동인형 흉내를 낸 것은 애교 있는 연출이었다. 2막, 장롱에 숨어 있던 케루비노가 2층으로 올라가서 유리창으로 뛰어내리고 4막 수잔나가 탑 모양의 구조물에 올라가서 노래한 것은 건물 구조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연출이었다.
3막 마르첼리나와 바르톨로가 피가로의 어머니, 아버지였음이 밝혀지는 대목, 4막 사장이 부인에게 용서를 비는 대목 등 예기치 않은 대반전이 이뤄지는 순간 관객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3막 판사 쿠르지오의 과장된 말더듬이 연기도 웃음을 자아냈다. “피가로는 2천만원을 갚든지, 아니면 마르첼리나와 결혼하라”며 권력의 비위를 맞추는 그의 모습은 요즘 탄핵 국면에서 한국의 일부 법률 전문가들이 보여준 안쓰러운 행동을 떠올리게 했다. 1막 피가로의 아리아 ‘더이상 날지 못하리Non piu andrai’에서 피가로가 케루비노를 가학적으로 대하는 연출은 공감이 어려웠고 3막에서 4막으로 넘어갈 때 바르바리나가 너무 일찍 등장하여 카바티나 ‘잃어버렸네Lo perduta’를 밝은 곳에서 부르는 등 사소한 진행 미스가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 오페라를 “단두대가 필요치 않은 유머와 욕망의 혁명”으로 정의한 연출자의 의도가 잘 살아난 프로덕션이었다.

피에르 요바노비치가 디자인한 산뜻한 무대는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회전무대를 활용하여 1막 수잔나의 방, 2막 백작 부인(디자이너) 작업실, 3막 백작(사장)의 방, 4막 소나무가 있는 뒷뜰의 순서로 ‘미친 하루’를 아침부터 밤까지 보여준 것은 기발한 발상이었다. 심플한 디자인의 배경에 조명을 가해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었는데, 3막의 색채감이 가장 빛났다. 요바노비치는 20세기 초반 유럽 패션 스타일에 저고리, 매듭 등 한국 전통의상 요소를 가미한 개성있는 의상을 선보였다(이용숙 <피가로의 결혼 리뷰>, 연합뉴스 2025년 3월 21일 참조). 2막, 소년 케루비노를 여장시키는 장면과 3막 소녀들 틈에 숨어있던 케루비노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남자 옷과 여자 옷이 잘 구별되지 않은 것은 좀 아쉬웠다.
음악은 이 오페라 해석의 ‘표본’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모범적인 연주였다. 지휘자 다비트 라일란트는 서곡과 모든 넘버에서 자연스런 템포를 유지했고, 적절한 밸러스로 청중들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일부 매니아들은 “두드러진 개성을 찾을 수 없고 밀고당기는 디테일이 부족해서 밋밋하다”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일반 관객들 입장에서는 오롯이 드라마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준 친절한 연주였다.

출연 성악가들은 고르게 뛰어난 기량으로 훌륭히 제몫을 해냈다. 이 오페라의 주인공은 단연 수잔나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2막, 4막의 아리아는 물론 6곡의 이중창에 모두 등장하여 피가로와 대화하고, 마르첼리나와 다투고, 케루비노의 탈출을 도와주고, 백작(사장)을 거짓으로 유혹하고, 백작부인(디자이너)이 구술하는 편지를 받아쓰는 등 시종일관 맹활약한다. 22일(토) 수잔나를 맡은 소프라노 이혜정은 목소리는 가녀린 느낌이지만 활달한 연기와 풍부한 표현력으로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케루비노는 이 오페라에서 가장 흥미로운 역할이다. 사춘기 소년을 메조 소프라노가 맡는 ‘바지 역할’로, 등장할 때마다 청중들을 웃기며 양념 노릇을 톡톡히 한다. 라헬 브레데는 어색한 사춘기 소년의 동작을 훌륭히 연기했고, 특히 2막 아리아 ‘사랑이 뭔지 아는 그대여Voi che sapete’를 섬세한 감정으로 노래하여 따뜻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피가로의 바리톤 김병길은 1막 아리아 ‘더이상 날지 못하리Non piu andrai’, 백작(사장)의 바리톤 양준모는 3막 아리아 ‘내가 한숨지을 때 저 천한 놈이Vedro mentre io sospiro’, 백작부인(디자이너)의 소프라노 홍주영은 3막 아리아 ‘아름다운 날은 가고Dove sono’를 멋지게 불러서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레치타티보 세코의 반주를 맡은 쳄발로 최현영과 첼로 장혜진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최현영은 베이스 음만 표시돼 있는 원본 악보를 바탕으로 즉흥연주를 해 냈다. 때로 익살스런 표현까지 가미하여 등장인물의 감정 흐름을 살려내는 연주자의 순발력이 놀라웠다. 이 오페라에서 쳄발로 연주가 들리는 대목은 실내악 느낌과 함께 따뜻한 분위기가 살아나는데, 내가 앉은 A열 쪽에서는 소리가 좀 작게 느껴져서 아쉬웠다.
자막은 더 다듬을 여지가 있어 보였다. 4막 바르바리나와 피가로의 대화 내용 등 여러 장면에서 코믹한 뉘앙스를 쉽고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해서 관객들의 공감을 일으키는데 실패했다. 오페라 라이브 공연에서 자막은 무대에 버금갈 정도로 중요하므로 음악만큼이나 신경을 써서 제작해야 할 것이다. 또 하나, 다양한 소품을 활용했는데 TV 드라마처럼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면 모를까, 커다란 무대 위의 소품이 잘 보이지 않아서 연출 의도가 잘 살아나지 않았다. 무대 양편에 대형 LED 모니터를 설치하는 걸 진지하게 검토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3막 결혼식 장면에서 합창단은 간단한 율동을 곁들였다. “노래하자, 찬미하자, 지혜로운 백작(사장)님을! 모욕적인 악습을 폐지하여 연인들에게 순결을 선물하셨네!” 합창단은 커튼콜 때 이 장면을 다시 한번 선사했고 청중들은 박수를 치며 즐겁게 호응했다. 오페라 극장에서 모처럼 무대와 객석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이채훈 <모차르트 평전> 저자, 음악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