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어둡게 빛나는 환상, '스플렌디즈'
[공연 리뷰] 어둡게 빛나는 환상, '스플렌디즈'
  • 강다연 기자
  • 승인 2015.08.22 05: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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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음울한 그늘과 파괴적인 에너지를 굳이 밝고 건전하게, 다수가 용인하고 권장하는 방법으로 변환시키지 않는 부류가 있다. 그들은 삶의 그늘을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 껴안는다. 덕분에 사회가 정한 틀에 적응하지 못하고 계속 어긋난다. 장 주네가 그런 작가다.

연극 '스플렌디즈'는 장 주네의 '사랑의 찬가'라는 26분짜리 필름으로 시작한다. 동성애와 관음증, 새디즘 등을 다루고 대담한 성기 노출까지 있어, 당시엔 공공장소에서 정식으로 상영될 수 없었다. 무성영화라 말 한 마디 없어도 장면장면이 그의 희곡 대사처럼 어둡고 탐미적이다. 지금 기준에도 여전히 매력적이고 촉촉한 미남이 성적 판타지로 등장하고, 남성의 성기가 꽃이나 총으로 은유 된다.

▲ '스플렌디즈' 공식 포스터

영화에 나오는 죄수는 옆 칸 다른 죄수에게 닿고 싶은 간절함에 몸부림친다. 하지만 벽을 사이에 둔 두 죄수에겐 '피라모스와 티스베' 같은 애틋한 교감은 없다. 좁은 감방은 일방적인 뜨거운 상상과 충족되지 못한 축축한 욕망으로 터질 것 같다.

좁은 감방을 엿보는 경찰관과 관객

이어지는 '스플렌디즈' 무대 배경은 고급 호텔의 복도다. 그런데 감옥처럼 문 사이가 다닥다닥 붙은 답답한 구조다. 경찰에 포위돼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도 감옥과 비슷하다. (오히려 더 험악하다) 벽면엔 '사랑의 찬가' 한 장면이 투영돼, 두 작품의 유사성을 암시한다. 실제로 작가가 '스플렌디즈'를 쓴 지 2년 후에 제작한 영화가 '사랑의 찬가'다. (물론 감옥에 있었던 경험이 장 주네의 감성에 큰 영향을 미쳤기에, 다른 작품에서도 '감옥'은 그에게 중요한 테마이긴 하다)

인질극에 실패해 곧 경찰에게 죽게 될 갱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생의 마지막 몇 분을 남겨두고 억눌렀던 욕망을 표출한다. 뒤늦게 동료에게 성적으로 이끌렸다고 고백하는 멤버가 있는가 하면, 평소 여자처럼 치장하며 살고 싶어하던 멤버는 이제서야 노골적으로 드레스를 칭송하고, 갱단에 합류한 경찰은 그동안 지켜왔던 질서와 도덕을 부정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비굴하게 살아남기보단 끝까지 저항하다 우아하게 죽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겐 "비겁해질 용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연출가 프레데릭 노지시엘은, 오랜 시간 감옥에서 지내며 다른 사람과 동떨어져 글을 썼던 장 주네가 사면 이후 오히려 박탈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주네는 절도, 위조, 동성애 등으로 반복해서 투옥됐다 결국 종신형을 선고 받았으나, 콕토, 사르트르, 피카소 등이 프랑스 대통령에게 청원해 풀려났다) 그리고 갱단의 무모함에 이끌려 인질극에 참여하지만, 결국 갱단을 배신하고 혼자 살아남은 경찰관이 장 주네의 분신이었을 거라 추측한다. 작가가 감옥 안에서 글로 풀어낸 상상의 세계를, 출소와 함께 모두 파괴해버린 데서 스스로를 배신자라 느꼈다는 것이다. 이는 '사랑의 찬가'에서 끝까지 관찰자로 남게 된 관음증 경찰관의 위치와도 비슷하다.

유미적 상상과 폭력적 현실

공연은 영어로 진행되다, 마지막 경찰관의 독백 씬에서 프랑스 어로 바뀐다. 덕분에 직전까지의 모든 일이 실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마치 경찰관 혼자 꾼 꿈처럼 허무하게 사라져버리는 느낌이다. '사랑의 찬가' 마지막 장면에서, 두 죄수의 마음이 통하는 설정으로 끝나지만 그게 실제 상황인지, 여전히 일방적 상상인지 모호한 것과도 유사하다.

한 무대에 오른 두 장르(영화와 연극) 모두에서 폭력의 어둡고 쓴 미학(좋아하든 아니든 간에 그런 세계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과 너무 달아서 삼키기 힘든 꿀처럼, 황홀함이 지나쳐 음란하기까지 한 아름다움이 공존한다. 하지만 장 주네가 상상한 것은 영화 장면이나 연극 대사로 표현된 것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고, 훨씬 더 아름다웠을 거다. 그걸 온전히 통역할 방법을 찾지 못해 답답해한다는 게 느껴졌다. 마치 감옥에 갇혀, 욕망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죄수처럼.

공연 예매 페이지엔 시놉시스를 재밌는 헐리우드 갱스터 영화처럼 묘사했지만, 실제론 부조리극, 서사극이다. 뚜렷한 스토리도 없고 치밀한 심리 묘사도 없으며, 대사들이 서로 연결된다는 느낌도 없다. 햇빛의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그림자처럼 순간순간 변하는 "이미지"로 다가올 뿐이다. 극을 이해하려 애쓰기보단 그저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게 감상의 한 방법이다.

서사극 연출에서 대부분 그렇듯 배우들은 대사할 때 억양을 죽이고, 시선은 상대 배우가 아니라 객석으로 던진다. 몇몇 장면을 제외하곤 움직임도 거의 없다. (바로 그 몇 장면으로 판단컨대 몸을 잘 쓰는 배우들이었다) 무대 전환도 없고, 조명도 단조로우며, 시작과 끝 부분에 흐르는 빌리 할러데이 목소리 외엔 음향효과도 거의 없다. 영화 '사랑의 찬가'는 음향이 아예 없어, 옆 관객의 꼬르륵 소리까지 잘 들린다. 공연 전체가 정적이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회의적인 영어 번역

덕분에 대사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는데, 원어인 프랑스 어로 공연했다면 알아듣진 못해도 시적인 느낌이 더 잘 살지 않았을까 싶다. (미국인 배우들과 작업하기 위해 대본을 영어로 번역했다고) 한글 번역도 썩 잘되진 않아서, 관객으로서 영어 대사를 귀로 듣는 동시에 눈으론 무대와 자막을 번갈아 대조하며 극을 따라가기가 다소 버거웠다. 

이 프로덕션의 첫 투어 국가가 한국이라,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한 연출가는 관람 소감을 적극적으로 듣고 싶어 했다. 관객들도 늦은 시각까지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22일(토) 오후 3시 공연이 끝난 후에 한 번 더 '아티스트와의 대화'가 마련된다. 문의: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