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 백광익 작가 “오름위에 부는 바람....제주 예술혼과 정신 표현”
[Special Interview] 백광익 작가 “오름위에 부는 바람....제주 예술혼과 정신 표현”
  • 이은영 발행인‧이지완 기자
  • 승인 2022.04.13 1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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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문화예술의 밀알을 꿈꾼다”
일생에서 4년 이외에 제주도를 떠난 적 없는, 제주 원주민
기매, 부적, 오름…배운 적 없지만, 자연스레 아는 정서‧행위
제주도 사람은 오름에서 태어나고 묻혀…자연의 이치
그림으로 한반도 아우르고파, 《한라에서 백두》전시 기획 중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이지완 기자] “말이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태어나면 한양으로 보내라”는 옛말이 있다. 매서운 기후와 자연의 힘이 큰 제주도가 사람이 살기에는 척박한 땅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의 제주도는 다르다. 우리나라 관광의 중심지이자,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보고(寶庫)로 손꼽히곤 한다. 시간이 흐르고, 한 세대가 저물면 지역이 가진 정체성도 바뀌어 간다. 그럼에도 가끔씩 만나게 되는 제주도 출신의 작가들은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를 풍기곤 한다.

제주도는 천혜의 자연을 품고 있지만, 제주 4‧3사건 등 치유되기 힘든 역사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제주도를 거점으로 삼고 있는 작가들의 그림 속에는 아름다움과 슬픔, 담담함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듯하다.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정서가 있는 것이다.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백광익 작가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백광익 작가

백광익 작가는 제주도에서 나고 자라, 제주대학교를 졸업하고, 제주에 터전을 잡아서 작가 생활을 하고 있다. 자신을 ‘제주도 원주민’이라고 소개하는 그는 제주의 분위기를 한껏 머금고 있었다. 백 작가는 지금 제주 서쪽인 대정읍 일과리에 작업실을 두고, ㈔제주국제예술센터를 운영하며 이사장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의 최근 작품은 제주 오름이 주된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오름으로 오기까지 백 작가는 제주도의 향토색 짙은 소재인 기매, 부적 등을 화폭 안으로 가져왔었다. 그 흐름에 대해서 작가는 ‘배운 적은 없지만, 뇌리에 박힌 것’이라고 얘기한다. 백 작가는 어린 시절 만나고 봤던 제주도 민속신앙을 토대로 발화를 시작하다가, 최근에는 제주의 자연 그 자체로 시선을 옮겨왔다.

▲오름위에부는바람, 혼합재료 100-50 2021년작
▲오름 위에 부는 바람, 혼합재료 100-50 2021년작

백 작가는 인터뷰 내내 ‘우리 제주도 사람’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제주도 안에서만 통용되는 정서, 분위기, 문화, 언어들이 대화 곳곳에 깔려있었다. 제주도가 더욱 잘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그의 말에는 ‘제주도 사람’의 순수한 열정이 강직하게 빛났다.

자신의 작품 세계를 독보적으로 구축한 작가이지만, 백광익은 제주에서 명문고로 손꼽히는 오현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오래 재직했다. 교직 생활 끝에는, 교장으로도 부임해 삶의 오랜 시간을 학생들과 동고동락 했다. 자신의 작품 얘기를 할 때와 달리 교직에 있었을 당시의 이야기를 푸는 백 작가는 작가가 아닌 교육자로서의 모습도 단단하게 보여줬다.

백 작가는 그가 그려내고 있는 자유로운 바람과 오름처럼 제주 이곳저곳을 아우르고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제주도의 자연, 역사, 그가 걸어 온 발자취는 어디로 뻗어나갈지 알 수 없었고, 그 원동력이 어디인지도 쉬이 찾을 수 없었다. ‘제주도’라는 지역이 그의 가장 큰 중심이었다. 지난 4월 초 제주시 대정읍에 위치한 백광익 작가의 작업실이자 이사장을 맡고 있는 (사)제주아트센터 에서 그를 만났다.

‘오름 위에 부는 바람’ 시리즈 작품으로 오기까지 기매, 부적 등 제주의 향토성 짙은 소재를 계속 작품으로 표현 해왔다. 작품들의 변화 계기와 방향은 무엇이었나.

나는 항상 나를 ‘제주도 원주민’이라고 소개하곤 한다. 미술 교사로 처음 부임했던, 경북 영덕에서 4년 간 살아본 것 이외에 제주도를 떠나 본 적이 없다. 이렇게 제주도에서만 살다보니, 이 곳 제주도 생활 자체에 내 행위가 젖어들었다.

제주도가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옛날에는 더욱 척박했고 문화예술 쪽에서는 거의 불모지와 다름없었다. 이런 제주도에서 나는 대학도 나오고, 어렸을 적부터 계속 그림을 그려왔다. 그 과정 속에서 항상 ‘우리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라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자주 떠올렸다. 내 대학 전공은 ‘서양화 전공 미술 교육과’이지만, 항상 우리 것 중에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고, 이 제주도에는 현대미술 추상의 소재가 될 것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느꼈다.

가장 처음, 작품 소재로 택한 것은 제주 동자석(제주의 묘에 놓인 석물, 동자(童子)의 모습을 하고 있다)에 낀 이끼, 부적에 낀 이끼들이었다. 그 이끼는 육지 지방의 것이 아니고 우리 제주도에만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이끼에 세월이 끼어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끼에 묻어 있는 세월을 단색화로 표현하면서 중앙(서울)에서 인정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리 부모 세대의 어떤 한 맺힌 이야기들이 내게 와 닿고, 뇌리에 박히게 됐다.

이후 설치 미술 쪽으로 기매, 귀양풀이 등을 소재로 동적인 이야기를 많이 담았다. 귀양풀이는 제주도에서 장례를 지낸 날 밤에 치르는 굿이다. 어느 날 유서도 없이 바닷가에서 돌아가신 양반의 혼을 재연하는 무당의 짓거리를 나름대로 표현하려 노력했다.

이 다음이 ‘오름’이다. 한 30년 정도 오름을 주요 소재로 택해 표현하고 있다. 제주도에서 한라산을 모태로 잡았을 때 오름이 한 360여 개 존재하는데, 이 오름과 이어져 있는 우리 생활의 이야기를 ‘제주도 원주민’으로서 표현을 하려했다. 이러한 고찰과 시간들이 현재 제주도의 대기(大氣)를 가져와 작품으로 표현하는 지금으로까지 자연스럽게 흘러오게 했다. 작품 할 때, 어떤 다른 소재를 가져와 작품에 넣기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동네 ‘제주도’의 이야기를 접목시키려 해서 그런 향토적인 방향이 나타난 듯 하다.

▲작업실에서 작품을 살펴보는 백광익 작가
▲작업실에서 작품을 살펴보는 백광익 작가

백광익 작가 작품을 찾아보면 ‘기매’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사전에서도 잘 검색되지 않는 단어인데, ‘기매’는 무엇인가.

육지에서 보면 마을 초입에 성황당 나무에 새끼줄을 치고, 어떤 천 같은 것을 늘어놓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주도 지방에서 그것과 비슷한 형상을 가진 것을 ‘기매’라고 칭한다. 제주도는 1만 8천 신(神)들을 모시는 풍습이 있고, 각 마을마다 이 신을 모시는 당(堂)이 존재한다. ‘기매’는 이 당에 신의 표식이나 어떤 행위를 위해 늘어놓은 천이나 종이를 뜻한다.

고 심우성 민속사학자가 얘기하는 넋전(죽은 자의 넋을 받는 종이 인형)과 같은 것인가.

넋전과 비슷한 것이다. 넋전과 같이 꼭 인물의 형상을 하진 않았지만 어떤 표식과도 같은 것이다. 넋을 기리기도 하고, 바람을 기다리며 하늘에 인간의 뜻을 전하는 하나의 영매와도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해운업을 하시다 보니, 보통 영등할머니(가정과 마을에서 모시는 바람신, 風神)가 들어 올 때 집에서 제를 올리곤 했다. 내가 굉장히 어릴 적이었지만, 그 때 제를 올리는 어른들이 한지를 다 접어서 가위질을 하고 다시 펼쳐서 늘어뜨려 기매를 만들던 것을 기억한다. 가위질을 한 종이를 펼치면, 다이아몬드 모양이니 여러 모양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 행위들은 누구한테 배운 것이 아니고, 제주에 살고 있는 그들의 머릿속에 이어져오던 것이다. 나 또한, 제를 올리거나 기매를 만드는 행위를 누구한테 특별히 배우지 않았다. 그렇지만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물려받을 수 있었고, 작품에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중앙에서는 그런 제주의 풍습이 때 묻지 않은 순수한 표현 방법이라고 봤던 것 같다.

백 작가에게 오름은 어떤 존재인가.

우리 제주도 사람은 오름에서 태어나서, 오름에 가서 묻힌다. 그게 자연의 이치다. 오름은 아주 먼 윗세대부터 존재했고, 나는 그냥 이 오름에 빌붙어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끔은 내게 이 오름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어떤 작품을 했을까, 작품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제주도 사람들은 오름이 어머니의 품과 같다고도 말한다. 그런 느낌이 어디서 왔는가 생각해보면 ‘곡선’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화산폭발로 형성된 지역에서 이렇게 곡선의 형태를 가진 지형은 전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제주도의 오름이 정말 특별하다고 볼 수 있다. 이 특별함이 더욱 잘 느껴지는 때는 노을이 지고, 해가 질 때다. 그 시각에 오름을 보면 어떤 여인이 옆으로 누워있는 것으로 보이고, 또 어떤 때는 여자의 앞가슴으로도 볼 수 있다. 내게는 오름의 곡선을 볼 수 있는 다양한 시각이 형성돼 있다.

나는 오름을 볼 때, 하늘에 떠 있는 드론의 시각으로 본다. 일반 사람들은 오름을 ‘368개다, 몇 개다’라고 숫자를 명명하지만 나는 한 3만 개의 오름을 봤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오름의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름은 언제나 무궁무진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작품에서 항상 그 모습을 표현하려 노력하고 있다.

▲오름 위에 부는 바람, 혼합재료65-31 2021년작
▲오름 위에 부는 바람, 혼합재료65-31 2021년작

작품을 보면, 오름과 바람결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눈에 띤다. 또, 여인과 집이 반복해서 등장하기도 한다. 각각의 표현에 의미가 있는가.

예전에 러시아에서 전시를 했을 적에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림 속 여인이 어떤 의미냐는 질문이었는데, 그 때, 기다리는 여자의 마음을 담았다고 답했다. 그 마음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여인 곁에 불꽃처럼 번지는 저런 표현들은 어떤 폭발력 같은 것을 담은 것이다. 조금 명징하게 설명하자면, 제주도의 억새풀이나 이름 모를 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풀의 형태로 제주도가 가진 탄력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빨간 길 같은 표현은 용암이 흐른 자리를 뜻한다.

‘집’의 표현은 내 특별한 경험으로부터 시작됐다. 내가 여기 대정읍에 작업실을 둔 지 만 8년이 돼가고 있다. 한 번은 작업실로 오던 중, 석양 속에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歲寒圖)를 봤다. 석양 속에 있는 소나무를 볼 때였는데, 그 순간 ‘아, 우리 추사선생도 이곳을 지나면서 이 소나무를 보고 세한도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구나’하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곧장 작업실로 와 소나무를 단순화시키고, 세한도에 있던 집을 내 나름대로 재해석해 표현해봤다. 그 이후로 단순화 시킨 소나무나 집을 자주 소재로 사용하게 됐다.

김원민 미술평론가는 백 작가 작품에 윤동주 시 이미지가 자주 겹쳐진다고 말한다. 작업할 때 특별히 영감을 받는 것이 있는가.

제주도의 서쪽인 대정읍 일과리로 작업실을 옮기면서, 밤하늘의 별을 세고 작품 안에 별을 담다 보니 좀 더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이미지와 닮아가지 않았는가 싶다. (웃음)

미술평론가분들은 작품 사진을 보고 글을 작성하기도 한다하는데, 나는 평론가 분들에게 항상 제주에 직접 와서 내가 그리는 것을 직접 봐달라고 말한다.

작업을 할 때, 지금 이 사각형의 화폭에 한 땀 한 땀 칼질을 하고 물감을 집어넣을 때, 조금 건방진 얘기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무아지경에 빠진다. 어떤 의식을 갖고 움직인다기보다 ‘행위’ 그 자체를 반복한다. 칼질을 하고 색깔을 집어넣고 하는 그 일련의 행위가 평론가 분들에게 전달되길 바랐다.

이 행위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오름은 점점 더 단순화되고, 이름 모르는 풀들을 그림 가장 앞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작품을 할 때 항상 내게 와 닿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고, 표현하려 노력한다. 나는 물감이 말랐다고, 작가가 작업을 안 하는 것은 생각을 하지 않을 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세상과 대화를 하고 생각을 열어, 물감을 메마르게 두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제주국제예술센터 마당에 전시된 백 작가의 설치 작품
▲제주국제예술센터 마당에 전시된 백 작가의 설치 작품

추사 김정희 선생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추사 선생에 대해 특별히 연구를 한 것은 아니고, 그 분이 이 척박한 땅에서 고생하면서 당신이 갖고 있는 어떤 학문적인 이야기를 우리 제주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해주고, 공부를 시켜줬다는 데에 고마움을 갖는다. 그런 추사 선생의 뜻을 우리 후세가 본받으면서, 기려야한다고 항상 생각한다. 여전히 그 뜻을 기리는데 부족함이 많다고 느끼며, 특히 이쪽 대정으로 작업실을 옮기고는 추사 선생을 위한 활동을 많이 하려 노력하고 있다.

노력이라는 것은 지금 대정에 있는 후세가 추사 선생을 역사적으로 재조명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지금 제주도에 추사 선생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가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대정읍에는 ‘제주 추사관’이라는 공간이 있다. 그런데 그 곳에는 진품이 전시 된 것이 없다. 진품도 없이 폼만 잡고, 대중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저렇게 번듯하게 지어둔 건물에 1년에 몇 십 명이나 올까 말까다. 또, 1년에 한 번씩 추사 무슨 행사를 하는데, 누가 관심을 갖고 찾아오거나 그러질 않는다. 그냥 주위에 있는 이들이나 한 번씩 들려보는 정도다. 그것이 과연 추사를 알리는 일인가 싶다. 이곳 대정에 진품명품에도 나오는 고서(古書) 감정위원인 김영복이 살고 있다. 가끔씩 나와 만나곤 하는데, 만날 때마다 하는 이야기가 이 작업실 옆 공간에 ‘추사 김정희 유물관’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다. 그 이가 많은 유물을 가지고 있고,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진행을 해보고 싶기도 하다.

그런 일들은 사실 제주도를 운영하고 있는 높으신 분들과 소통이 잘 되고 협의돼야 진행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일을 추진하는 이들이 많이 없다. 언젠가 한 번은 추사 선생 기일에 추사의 작품을 좀 대여해 와서 제주도립미술관 차원에서 전시를 열어보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보험료도 잘 책정되지 않고 행정을 책임지고 집행할 사람이 없으니 모두 흐지부지 됐다. 아쉬운 점이 많다. 사실 제주도가 문화예술의 중심인데 말이다.

어떤 점에서 제주도가 문화예술의 중심지라고 보는가.

우리나라 6‧25 동란이 민족으로는 엄청난 비극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시기의 제주도가 문화예술로는 가장 활발한 때였다. 모든 사람들이 아래쪽으로 피난을 내려오면서 제주도에 많은 작가들이 머물렀다. 이중섭, 장리석, 김창열 선생 등 많은 이들이 제주로 내려왔다. 장리석 선생님은 요 앞에서 풀빵 장사를 하시기도 했다. 그리고 홍종명 선생이 있다.

홍종명 선생이 우리 제주도에 정말 많은 영향을 끼친 작가기도 한데, 왜냐하면 제주 오현중학교의 미술교사였다. 그 분에게 영향을 받은 이들이 제주 미술의 1세대들이고, 나는 그 제자들에게 그림을 배웠다.

▲인터뷰에 답하고 있는 백광익 작가

제주 미술사의 산증인 같다.

가끔씩 제주도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 곳을 찾아오곤 한다. 그 때마다 나는 내가 보고 기억한 것들을 전해준다.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기록은 71년도부터다.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전시를 시작한 때였다. 그 후 76년에는 ‘관점 동인’을 만들어서 현대미술을 시작했다. 강광 선생, 강요배, 고영훈 작가들이 함께 했었다. 그렇게 동인을 하면서 서울과 교류도 하고, 전시도 하며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림으로 자리 잡고 지금 이곳까지 오게 됐다.

작가면서, 교사였고, 제주 명문 사립학교 교장도 역임하셨는데, 예체능계 과목 교사로서는 이례적이다. 호랑이 선생님이셨다고 알려졌다.

28년 간 낮에는 교사로 살았고, 밤에는 작가로 살았다. 그림을 그리면서 교편을 잡았을 때, 가장 걱정한 것이 ‘교사로서 작가냐, 작가로서 교사냐’라는 정체성의 고민이었다. 절충을 해야 했다. 작가로서 교사라면 학생들에게 미안했다. 그렇다고 교사로서 작가냐, 그것 또한 내게 해답은 아니었다. 그래서 교편을 잡은 28년 간 집에 들어가질 않았다. 낮에는 애들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밤새도록 그림을 그렸다.

이 생활을 얘기하면, 다른 양반들은 내게 ‘미쳤다’는 소리를 했다. 집에 처자식이 있지만, 우리 집 아이들은 거의 결손 가정 아이들과 같았다. 아들 하나 딸 하나 있는데, 다들 착해서 자기 길을 찾아간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완전한 교사이지 못한다는 마음에 학생들에게 더욱 잘했던 것 같다. 학교에 있으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국영수를 가르치기보다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가르치고자했다. 그래서 1년에 한 번씩 국토순례를 운영했다. 전교생을 대상으로 선착순을 받아서, 학생들의 두 발로 국토를 밟게 해줬다. 그리고 백두산에도 데리고 가서 한라산의 흙과 물을 합토, 합수시키는 경험도 시켜줬다. 아직도 가끔씩 제자들이 와서 그때 얘기를 하곤 한다.

▲국제아트센터 내에 있는 백광익 작가 갤러리
▲국제아트센터 내에 있는 백광익 작가 갤러리

제주국제예술센터를 설립하고 비엔날레 개최, 젊은작가들을 위한 레지던스 운영 등을 하면서 제주 예술을 알리기 위해 강단 있는 삶을 걸어왔다.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인터뷰하는 내내 얘기했던 것이다. 내가 나고 자란 이 제주도를 문화예술 중심지로 더욱 잘 알리는 것이다. 내 이름을 알리고 싶으면 신문에다 맨날 광고를 내든 어떻게든 할 수 있다. 하지만, 제주도라는 지역을 문화예술의 중심지이자 그 역할을 하기 위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각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제주도를 알리기 위해 전시도 하고 홍보도 했다. 제주비엔날레도 추진했었다. 그런 시간들을 거져 지금은 작업실로 쓰고 있는 이 공간에 더 많은 이들이 찾아와서 소주도 마시면서 같이 어우러졌으면 좋겠다. 제주도와 이 곳이 우리 그림 그리는 사람의 천국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지금 큰 전시를 준비 중에 있긴 하다. 제주도에서 《한라에서 백두》(가칭)라는 대규모 전시를 열어볼 생각이다. 교사 시절 제주의 흙과 물을 떠서, 백두의 흙과 물에 합했다. 이제는 그림으로 합(合)을 만들어보고 싶다. 정권이 바뀌지 전에는 좀 가능성이 보이는 일이었는데, 지금은 사실 어떻게 진행될 진 잘 모르겠다.(웃음)

어떤 이들은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하냐고 묻기도 하는데, 내게 답은 하나다. 내가 제주도 사람이고, 이것이 내 낙(樂)이기 때문이다.

올해 전시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5월에 남산에 있는 uhm갤러리에서 전시가 예정돼 있고, 그다음에는 제주도에 있는 대형 갤러리에서 좀 큰 작품을 위주로 선보이려 한다. 지난 3월에 화랑미술제에 참여했고. GS타워더스트릿갤러리 전시까지 포함하면, 올해는 총 3개의 초대전을 선보이게 된다.

 


작가 프로필

■ 주요 경력
개인전 40회 한국(서울, 부산, 광주, 제주), 미국(뉴욕), 중국(북경, 천진)
단체전 및 초대전 (360여 회)
심사.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
부산, 경기, 제주도, 대구삼성, 행주, 한밭, 단원 미술대전 심사위원

■ 작품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경남 도립미술관, 제주도립 미술관,제주도청, 제주도의회, 제주시청, 제주종합청사, 기당미술관, LG그룹, 해태크라운그룹, 라온그룹 등

■ 수상
78년창작미협공모전 문예진흥원장상(대상)
제주도 미술대전 최우수상
녹조근정훈장, 대통령표창, 문화체육부장관 표창(3회)
2016년 KPAA(한국전업작가회)수상 • 제1회 현산미술상(광주)

■ 전) 경력
오현중·고등학교 교장 • 사) 한국미술협회 제주도 지부장, 지회장
사) 한국미술협회 이사 • 사)대한민국 남부현대미술협회 부이사장
제주도립미술관 운영위원장 • 제주프레비엔날레 운영위원장
제주국제아트페어 운영위원장 • 부산청년비엔날레 운영위원
대전 트리엔나래 커미셔너 • 제주도 환경영향 평가위원, 제주시 건축미관 심의위원

■ 현) 경력
(사) 한국미술협회, 부산 혁 동인, 제주 전업작가회
(사) 제주국제예술센터 이사장, 동아옥션 전속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