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정동길에 새겨진 100년의 발자국, <모던정동>
[공연리뷰] 정동길에 새겨진 100년의 발자국, <모던정동>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4.05.0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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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갈망하던 1920년대 ‘모던걸’, 무대에서 살아 숨쉬다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 시청역 2번 출구를 나와 걷다 보면 마주하는 풍경은, 실시간으로 100년이란 시간을 느끼게 한다.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개화기 때 지어진 서양식 건축물, 유서 깊은 학교와 교회 그리고 그 사이사이 놓인 키가 다른 빌딩들. 현대를 살며 과거를 공유할 수 있어, 정동길은 언제나 그 정취를 느끼며 느릿하게 걷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국립정동극장 예술단 <모던정동> 공연사진
▲국립정동극장 예술단 <모던정동> 공연사진

국립정동극장 예술단의 신작 <모던정동>은 이러한 정동길의 생명력을 고스란히 무대로 가져왔다. 현대의 인물 ‘유영’이 100년 전 정동으로 타임슬립해 당대의 모던걸 ‘화선’과 ‘연실’을 만나는 이야기를 담은 연희극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 원각사의 복원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 국립정동극장과 근대 역사문화의 출발지인 ‘정동’ 지역의 특성을 살려 개발됐다.

무채색의 의상을 입은 단원들이 무대 중앙에서 후~ 하고 객석을 향해 바람을 두세 번 불어넣으면, 생기를 얻은 것처럼 무대에 알록달록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오가고 극이 비로소 시작된다. 

현실에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유영은 100년 전 정동으로 시간 이동을 한다. 유영 역의 조하늘 단원의 실감 나는 표정 연기와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움직임 덕에, 관객들은 ‘타임슬립’이라는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에도 쉽게 극에 몰입했다. 

1920년대 일제 강점기로 배경이 바뀐 직후부터, 엄청난 볼거리들이 쏟아진다. 권번 기생들의 의상은 봄날의 꽃밭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아름다운 색감과 바람에 날리는 듯한 질감으로 생기를 더했다. 여기에 단원들의 정교한 안무와 캐릭터를 살리는 연기력은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를 자아냈다. 

근대 가요 ‘사의 찬미’, 신민요 ‘봄맞이’ㆍ‘처녀총각’, 만요 ‘그대와 가게되면’ 등의 음악도 적절하게 배치됐다. 이와 더불어, ‘흥’과 ‘신명’을 돋우는 연희자들의 연주는 암울한 시기에도 놓지 않았던 선대 예인들의 기개와 그 속에 숨겨진 한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국립정동극장 예술단 <모던정동> 공연사진
▲국립정동극장 예술단 <모던정동> 공연사진

정동극장 예술단 단원들은 한국 창작춤부터 찰스턴 스윙, 신민요춤, 레뷰 댄스까지 다양한 장르의 춤을 선보이고, 객원 배우 윤제원과 소리꾼 김유리는 때로 만담꾼처럼, 때로 변사처럼 화려한 말솜씨로 소리풍경으로서 극의 서사를 이끌며 감동과 웃음을 모두 책임졌다. 

다만, 극의 초반 주인공인 유영이 갑자기 왜 100년 전인 1920년대로 가게 됐는지 개연성이 부족했으며, 현대의 인물 유영과 과거의 인물 화선이 만나자마자 갑자기 절친한 사이가 되는 갑작스러운 전개도 어색함이 느껴졌다. 

더불어, 극의 후반부 조각들 위로 보이는 정동의 과거 모습을 보여주는 연출은 앞서 보여줬던 세련된 연출에 감탄한 것을 잊을 만큼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흑백 영상을 보여주며 소리풍경들이 역사를 읊는 장면은 억지 감동을 유발하는 듯하여 오히려 이질감이 들었다. 어려운 시기 선조들이 겪었던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ㆍ춤ㆍ연희로 극복했던 강인함은 이미 단원들의 무대로 충분히 표현됐기에, 주입식 감동 서사는 생략하는 것이 더욱 작품을 완벽하게 만들 것 같다. 

극은 시작과 마찬가지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하며 끝난다. 과거와 현대가 함께 공존하며 숨이 섞이는 공간이라는 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연출이, 마지막에 가슴을 묵직하게 눌렀다. 현란한 몸짓으로 곳곳을 누비던 단원들이 독립투사가 되어 무대에 누워 마지막 숨을토해내자 객석의 관객들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비언어적 표현이 훨씬 깊숙하게 와닿을 때가 있다. 특히 공연에서는 더욱 그렇다. 눈과 귀가 즐겁고, 여기에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한국인만 느낄 수 있는 민족의 정서까지 더해진 공연이었다. 공연을 보고 나와 집으로 가는 동안, 일부러 정동길을 평소보다 느리게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