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 국악인에게도 특별했던 산울림소극장
[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 국악인에게도 특별했던 산울림소극장
  • 윤중강 평론가/연출가
  • 승인 2024.05.09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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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웅 선생님을 추모하며
▲윤중강 평론가/연출가
▲윤중강 평론가/연출가

연출가 임영웅(1934.10.13~2024.5.4)은 한국연극의 대들보였다. 대한민국 연극사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로 기억이 되겠지만, 이외에도 업적이 크고 넓다. 

1960년대, 라디오드라마와 뮤지컬연출가로서의 임영웅 

1960년대 초반 라디오연속극 전성시대에 서민들의 삶을 휴머니티 풍부하게 그린 작가 김영수 (1911~1977)와 콤비를 이룬 연출이 임영웅. 김영수의 라디오 대표작으로 영화로 만들어져서 크게 히트한 ‘새댁’(1962년, 이봉래감독)이 임영웅 각색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60년대 중반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대중에게 확실하게 알린 ‘살짜기 옵서예’(1966년 10월)의 연출도 임영웅. 처음엔 연출이 백은선이었으나, 그가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임영웅이 연출가로서 작품을 완성해 무대에 올랐다. 패티 김의 애랑 역할은 인기를 끌었고, 이듬해 김상희 주연의 ‘살짜기 옵서예’(1967년 2월)까지 임영웅 연출이다. 

임영웅의 숙부는 임원식(1919~2002)인데, 음악성은 이 집안의 내력이 아닌가 싶다. ‘브로드웨이 뮤지컬과는 다른 한국적인 뮤지컬’을 표방하면서 ‘꽃님이 꽃님이 꽃님이’(1967년 11월), ‘춘향전’(1968년 2월) 등 당시 대형뮤지컬 3부작을 모두 임영웅이 연출해서 화제가 됐다. 당시 흥행을 위해서 연예인의 기용은 어쩔 수 없었지만, 임영웅은 예그린 소속의 문혜란 나영수 장영애 김미정 등 성악 전공의 뮤지컬배우를 주목받게 해주었다. 

무대를 ‘넓게’ 보고, 배우를 ‘깊게’ 본 연극평 

기자 출신의 임영웅은 1963년과 1964년 경향신문에 여러 편의 공연평을 썼다. 연출가의 입장으로서 장치(장종선) 조명(고천산) 등에 관한 언급은 물론, 각각의 배우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평은 지금의 연극평론계가 참고해서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찍이 작고해서 지금은 거의 알지 못하는 윤계영 배우를 가리켜서 ‘바다냄새 풍겨주는 호연’이란 짧은 평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임영웅은 공연평에서 가장 두드러진 배우 한 명에겐 대개 진경(進境)이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격려하고, 모두가 주목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표시한다. 

임영웅의 초기 연출작으로 주목해야 할 작품은 환절기(1968년)와 환상살인(1969년). 당시 연극계는 아무래도 신파적인 요소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였는데, ‘차분한 분위기’를 견지하면서 추진력있게 풀어가는 임영웅을 가리켜서 ‘젊고 패기에 찬 연출가’라는 극찬이 중론이다. 

명창명인이 함께 했던 산울림소극장 

내가 임영웅선생님을 자주 뵌 것은 1980년대 중후반이다. 당시까지도 선생은 라디오드라마를 연출하셨는데, 선생 특유의 걸음걸이로 KBS 본관 5층 라디오드라마 녹음실을 향하는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이랬던 임영웅선생님과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었던 건, 산울림에서 국악공연을 하게 되면서. 

1985년 소극장 ‘산울림’이 개관했다. 그해 겨울, 산울림은 ‘FM명인전’이란 이름으로 닷새 동안 명인공연이 이어졌다. 당시 kbs-fm의 국악을 책임 진 한신평의 바람이 산울림을 통해서 이뤄진 거다. (1985. 12. 20 ~24.) 공간사랑 이후, 명인을 가장 근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격조가 있는 무대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정가의 홍원기와 김월하, 대금의 김성진, 거문고의 한갑득, 해금과 처용무의 김천흥, 가야금의 김죽파 명인의 무대는 20세기 소극장 국악무대의 성공작으로 기억된다. 

소극장 산울림은 가야금산조의 인간문화재 성금연명인의 고국에서의 마지막 무대였다. (1986. 6. 16) 하와이에 거주하는 성금연명인이 세 딸(지성자, 지미자, 지순자)과 연주했다. 네 사람은 각각 국내와 해외에 따로 거주했었는데, 이 무대에서 오랜만에 뭉쳤고, 이게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성금연 명인 서거 20주년 기념공연 ‘성금연 and’

나 또한 임영웅 선생님께 특별히 고마운 마음을 지닌 한 사람이다. 성금연 명인이 타계한 장소에서, 성금연의 가야금을 사랑하는 국악인 100인이 중심이 되어서 성금연명인 서거 20주년 기념공연 ‘성금연 and’를 할 수 있도록 임영웅선생님과 오증자선생님이 흔쾌히 장소 사용을 허락해주셨다. (2006. 7. 5) 이 무대에는 생전 성금연명인에게 가야금을 익힌 황병기명인과 이재숙명인을 비롯, 지성자, 지미자, 지순자뿐 아니라, 미국에 거주하는 지윤자까지 딸들이 함게 하면서, 명인의 삶과 예술을 제대로 살필 수 있는 값진 무대가 되었다. 

소극장 산울림이 대한민국에서 여성연극을 일으킨 메카임은 다 알 것이다. ‘목소리’, ‘딸들에게 보내는 편지’, ‘위기의 여자’,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를 통해서 박정자 배우, 윤석화 배우가 더 널리 알려졌다. 소극장 산울림 개관 20주년 기념공연 마지막 작품은 ‘윤석화의 정순왕후 영영이별 영이별’(2005년)이었다. 난 고맙게도 젊은 작곡가들의 좋은 작품을 바탕으로 해서, 이 작품의 음악을 맡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해서 임영웅 선생님께선 나를 문화계의 한 사람으로 인정해주시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있었음에도 공연을 볼 수 없었던 1960년대를 함현진 배우 등을 중심으로 해주었던 얘기가 떠오른다. 일개 관람객 수준에 불과한 내 지식과 정보를 인정하면서,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우리의 공연문화의 실체를 볼 수 있도록 말씀해주신 걸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국악계 사람이지만, 연극계 임영웅선생님께 많은 걸 듣고 배울 수 있었다. 이게 산울림극장 근거리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큰 행운이 아니었나 싶다. 

임영웅 선생님께서 영면하셨다. 그 곳에 먼저 간 ‘고도를 기다리며’의 배우 함현진, 김성옥, 김인태, 김무생과 오랜만에 해후를 하시겠지. 그리고 얼마 전 타계한 나영수 지휘자도 만나시겠지. 그리고 성금연 명인을 비롯한 국악계의 명창명인도 만나셨으면 좋겠다. kbs라디오 센터장을 지낸 한신평선생과는 서로 특유의 웃음으로 마음을 교환할 듯 싶다. 

지금까지 임영웅 선생님이 계시고, 소극장 산울림이 있어서, 나와 같은 사람도 배우고 즐기고 누린 것들이 참 많다. 내년은 ‘소극장 산울림 개관 40주년’, 임영웅 선생님은 안 계시지만, 임영웅 선생님은 분명 그 자리에 계실 거다. 다시 한번 임영웅선생님께 감사하면서,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