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질하러 가서 ‘뭐’하시오?
도둑질하러 가서 ‘뭐’하시오?
  • 이소영 기자
  • 승인 2008.12.13 23:3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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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디쓴 여운 남기는 통렬한 웃음이 있는 ‘늘근도둑이야기’

시대를 관철하는 사회적 발언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기막힌 코미디로 풀어낸 작품.

‘늘근도둑이야기’

촌철살인 풍자의 맛을 적절하게 작품에 녹여내는 이상우의 대표작이다. 1989년 초연을 시작으로 그 후로도 몇 차례나 당시의 사건, 사회·정치적 현실 등 시대를 풍자하며 공연해왔다.

2008년 1월, 한 해의 시작에 프로그래머 조재현의 연극열전2 두 번째 작품으로 선택돼 연장과 연장을 거듭하며 지금까지 오픈런(관객이 작품을 보러 오는 동안은 계속 공연을 이어간다는 의미)하고 있다.

새 대통령 취임 특사로 풀려난 전과 18범의 더 늘근도둑(김원해)과 전과 12범의 덜 늘근 도둑(정경호)의 인생 마지막 한 탕. 별 다른 도구 없이 망치만 들고 얼떨결에 어느 장소로 잠입한다. 도둑들은 자신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관객들도 덩달아 상황파악하기에 바빠졌다.

장소 파악을 위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한 도둑들은 갑자기 관객들을 그림으로 몰고 가기 시작한다. 관객에게 역할을 주면서 자연스럽게 관객들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놀림 당하는 상황에 맞닥뜨린 관객들은 순간 당황하다가 서서히 자신들의 존재를 다양한 미술작품 중 하나로 받아들이고 공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게’ 된다.

시종일관 드러나지 않는 ‘그 분’의 미술관이라는 사태파악이 끝나고 이제 뭘 훔치나 조마조마하며 기대하지만 도둑들은 모두 잠들길 기다리자며 시간 때우기에 들어갔다.
도둑질하러 온 도둑이 가방에 술은 웬 말인지 한잔만, 한잔만...도둑질도 하기 전에 술에 취해버린다.

사회에서 엄청난 힘을 가진 ‘그 분’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돈도 없고 빽도 없어 무력한 도둑들의 입에서 정치인과 부자, 세상을 비판하는 소리가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 어수룩함을 맛깔나게 연기한더 늘근도둑역의 김원해
그런데 어수룩해보이던 도둑들, 무식하다 하찮게 볼 일이 아니다.
알고 보니 이들의 어수룩한 말투는 청문회나 기자회견 등에서 유명 인사들이 보여준 뱅충맞은 말솜씨로 엉터리 답변이나 말 돌리는 실력을 빈정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술이 더해지니 더 이상 세상 무서울 게 없어지고 역대 대통령들을 옆집 친구 부르듯 하며 정부와 사회 문제를 안주 삼아 맛깔 나는 풍자가 통렬하기 짝이 없다.

뉴스를 통해 많이 비춰졌던 시대의 문제들, 사회에 느꼈던 불만과 안타까움을 슬쩍 던지기도 하고 조목조목 따지고 들기도 하며 바른 말만 하니 미워할 수가 없다.

비정규직 문제, 자신들의 별과 동등하게 취급해버리는 대통령 별, 신정아와 그녀의 백마탄 왕자이야기, 중국 멜라민 파동, 에버랜드 홍여사 사건 “점잖게 계세요, 관공서예요~”를 남발하고, 검찰청 휠체어 사건을 빗대 “도둑질하고 경찰서 갈 때마다 휠체어 타고 갈 껄.. 그럼 다 보내주던데”

관객들은 백배공감하며 킥킥 대고 눈물을 찔끔거리며 자지러지다가도 일순간 목구멍에 쓰디쓴 술을 들이부은 것처럼 이내 웃음을 거두게 된다.

잠시간 씁쓸함을 느끼고 있자니 과거에 이름 없는 천민들이 장터에 모여 우스꽝스러운 탈을 쓰고 위선적인 양반을 조롱하며 모진 억압과 삶의 질곡, 부조리한 현실을 웃음으로 승화시킴으로써 고달픈 삶에 대한 위안을 얻었던 그 시절에 와 있는 듯했다.

기본적으로 작품성을 갖춘 원작의 탄탄함도 있지만 시의적절한 현 사회문제를 풍자하는 연출력, 단출한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두 배우의 구수한 입담과 능청스런 연기. 이 삼박자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  즉흥적인 대사로 재미를 더 해준 덜 늘근도둑역의 정경호
특히 빠르게 전개되는 두 배우의 연기 리듬도 늘어짐 없이 절묘한 앙상블을 이루고 망치나 휴지 등 간단한 소품으로 웃음을 이끌어내는 배우의 능력은 이 작품을 더 돋보이게 한다.

또한 미술작품이 되었다가 잔에 술을 채우기도 하고 유명인사가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관객을 작품에 끌어들이고, 호응을 유도하려는 즉흥적인 대사도 잘 녹아들어 스토리를 이끄는 힘이다.

풍자에 대한 무게감을 줄여 다양한 세대가 함께 즐기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실제로도 함께 본 관객들은 다양한 연령대로 그만큼 누구나 공감하는 시대의 문제를 담아내고 쉽게 풀어서 이해가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늘근도둑이야기’는 동일한 설정의 작품이라고 해도 그 때 그 때마다의 사회적인 이슈에 따라 ‘뼈 있는 농담’으로 꾸준히 느낌이 달라지고 있어 볼 때마다 또 다른 풍자의 맛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소재가 넘쳐나는 만큼 우리 시대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기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뱅충맞다 : 똘똘하지 못하고 어리석다(큰말 빙충맞다)

서울문화투데이 이소영 기자 syl@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