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10월의 늦은 저녁, 작은 선술집에서 있었던 일.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10월의 늦은 저녁, 작은 선술집에서 있었던 일.
  • 윤이현
  • 승인 2023.11.04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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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10월의 늦은 저녁엔 구기동의 작은 선술집에 있었다. 작지만 동네 주민들의 발길이 제법 이어지는 곳이다. 우리 역시 이곳에서 종종 술자리를 가졌다. 친구와 나는 잘 구워진 닭구이와 몇몇 안줏거리를 주문하고, 미리 나온 하이볼을 홀짝였다. 분위기 좋은 금요일 밤이었다. 몇몇 커플들이 술잔을 두고 사랑 어린 눈길을 보내고 있었고, 주황빛의 전등이 가을바람에 잔잔하게 흔들리며 근사한 분위기를 흩날려 주었다.

와 스피커네!”

이리저리 선물을 둘러보느라 정신없는 친구 표정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런데 마치 두꺼운 종이컵이 구겨지는 느낌과도 비슷했다. 뭐랄까 조금 뚝딱거리는 미소랄까.

초 불기 전에 꼭 소원 빌어야 해. 알지?”

왜 이렇게 감성적으로 변했냐고 묻는 친구 앞에서 나는 머쓱하게 웃었고, 퇴근길에 찾아온 작은 케이크를 꺼내어 초를 붙였다. 그렇게 우리는 고요한 불빛 앞에 두 손을 맞대고 소원을 빌었다. 어느새 주문한 음식들이 빈 구석 없이 생일 테이블을 메꾸고 있었다. 그 사이에 몇 번의 술잔이 넘실거렸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취기를 빌려 어렵고 중요한 몇몇 말들을 쏟아내었던 기억만이 있을 뿐. 그리고 저 멀리서 한 취객이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장면이 떠올랐다.

꼬박 일 년이 지나, 우리는 같은 술집에 들렀다. 조금 달라진 것이라면, 이번엔 같이 만나서 왔다는 것과 내가 대학생이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닭구이와 오꼬노미아끼 그리고 조금 느끼할까 싶어 매콤한 음식 몇 가지를 주문했던 것 같은데……. 안주가 많으니 술은 일부로 도수는 높되 배는 부르지 않은 것으로 골라두었다.

자 이번엔 바디 크림

역시나 그 애는 입은 웃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그치만 이제는 안다. 우리는 삐끄덕대는 방식으로 사랑을 있는 힘껏 표현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이번에 주문한 케이크는 초코 시트 위에 주홍빛 버터크림이 발린 것이다. 감각 좋은 사장님이 넣어주신 예쁜 초도 동봉되어 있었다. 불을 붙였고, 기쁜 마음으로 초를 불었다. 못본 새 쌓인 서로의 이야기가 더해져 호흡 좋은 술자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많은 말이 오갔던 것 같은데, 이번 역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불과 어젯밤의 일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래도 모든 순간이 좋았다고는 말할 수 있다. 우리 안엔 언제부턴가 함께하는 순간에 대한 교조적 믿음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행복이 감정의 영역인 줄 알았는데, 일종의 정의였던 거지. 거대한 사건이 우릴 덮치지 않는 한은 행복한 거야. 그걸 여태 몰라서 불행하다고 믿었었나봐.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었거든.”

10년 전의 우리는 어땠었나. 학교에서 만나면 짓궂은 장난을 쳤었지. 쉬는 시간마다 매점에서 불량한 것들을 먹었고 말이야. 야자가 있는 날엔 치킨 가라아게 도시락을 사 먹었던 기억이 나. 네가 분식집에서 종종 시켜먹던 그 참치 김치찌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맛이었어. 비록 입 밖으로 말하진 못했지만. 그때는 뭐가 그렇게 즐거웠는지, 얼굴만 보면 웃음이 나왔다. 지금보다 더 명랑하지만 깊이 없는 그런 웃음을 자주 지었다. 그렇게 실컷 농담을 따먹고 집에 돌아가는 길엔 어딘가 슬퍼져서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그림이 너무 그리기 싫어서 울기도 했고, 때로는 엄마가 무서워서 울었다. 이 모든 것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다는 게 가장 슬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애에게도 나와 비슷한, 아니 어쩌면 더 크고 깊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서로 그런 마음을 나눴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내색할 수 없었기에 그때만큼은 밝고 가벼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처음부터 깊지 않아서 길고 단단한 인연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미련 없었던 삶에 가장 큰 미련과 아쉬움이 되어버린 존재, 다음 생이 있다면 우연히라도 마주치길 소망하게 되는 우정을 함께 만들어온 친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어제 술자리에서 했던 말처럼, 행복은 깨달음의 영역이라는 것을 나 역시 올해가 되어서야 배웠으므로. 고생 끝에 낙이 오는 게 아니라 행복은 그저 늘 우리 곁에 있었다는 것을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알게 되어서 여전히 아쉬운 마음이다.

어쩌다 우리의 웃음이 이렇게까지 어색하고 구겨진 느낌이 되어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해에는 좀 더 나은 표정을 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 부끄러운 진심을 아무렇지 않게 전하는 조금 더 뻔뻔하고 사랑스러운 인간이 되기를, 친구의 촛불 앞에 작게나마 빌었던 건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