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최우수상 수상자] 양대원 작가 “미술은 동시대 사람들과 중요한 논점에 대해 이야기해야”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최우수상 수상자] 양대원 작가 “미술은 동시대 사람들과 중요한 논점에 대해 이야기해야”
  • 김연신 기자·이은영 발행인
  • 승인 2025.03.27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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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함 반대편의 그림들로 따뜻함 이해하게 하고 싶어
진실, 전쟁, 빈곤, 회의, 실존 등…개인부터 사회까지 확대되는 관점
작품 속 캐릭터 ‘동글인’, 분자 구조와 암세포 이미지서 출발
페르소나와 가면 이미지는 인간의 모습과 가장 흡사해
문자도는 형태 가진 새로운 의미의 새로운 단색화
요즘 화두는 현대인의 ‘돈’에 대한 사랑…물음표 던지는 작업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 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일제강점기의 시인 홍사용은 망국의 한을 시로 승화시켰다. 100여 년이 흘렀지만, 그의 시는 식민지 시대의 비애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양대원 작가
▲양대원 작가

양대원은 붓을 든 홍사용과 같은 작가다. 그는 “작품을 통해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거란 기대와 그러한 영향력을 가진 예술가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하며, 오늘날 전쟁과 같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소통하는 것을 예술가의 의무로 강조한다.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의 대표작품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은 시위를 일으킨 시민들을 향해 폭력 진압을 하는 프랑스군을 그려낸 그림이다. 당시 진압으로 수천 명이 사망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인 피카소 역시 반전 화가로서 잘 알려져있다. 피카소의 반전 작품 중 대표작인 ‘게르니카’와 더불어, 1951년 작품인 ‘한국에서의 학살’은 한국전쟁을 소재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기도 했다.

양대원 작가 역시 전쟁을 오랜 시간 모티프로 삼았다. 그는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미술은 동시대의 사람들과 중요한 논점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고야처럼 따뜻함과 반대편에 있는 그림들을 그려 따뜻함을 이해하게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양대원 작가는 진실, 의심, 중독, 사랑, 이별, 전쟁, 빈곤, 회의, 실존 등을 주제로 개인적인 관점부터 사회로 확대된 관점까지 작품에 녹여내왔다. 초기에는 개인적인 고립과 소통의 갈망을 다루었고, 후에는 인간관계와 사회적 탐구를 통해 세상에 대한 관찰을 확장했다. 

▲양대원 작가
▲양대원 작가

작품에 등장하는 고유한 캐릭터인 ‘동글인’은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일종의 장치로 기능한다. 동글동글한 분자 구조와 암세포의 이미지에서 출발한 ‘동글인’은 현대인의 초상이다. 검은 풍선처럼 안이 텅 비어있는 것이 페르소나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인간상과 닮아있다. 작가가 평소 좋아하던 카를 융(Carl Jung)의 철학과 ‘페르소나’ 개념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30여 년 동안 회화에 대한 시적인 해석과 재료학적인 변혁을 끊임없이 시도해온 그는 지난 1월,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미술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본지 서울문화투데이는 수상자 인터뷰를 위해 남양주시 덕소읍에 위치한 양대원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 제 16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미술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소회와 근황을 듣고 싶다.

최근에 주변 작가들이 상을 많이 받게 되면서 “양 작가도 상을 받아야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이 무언가 잔상처럼 남아있었는데, 이렇게 상을 받으면서 홀가분해졌다. 주변에 적극적으로 알리지는 않았지만 전속 갤러리(맨션나인)에서 홍보를 해줘서 축하 전화도 많이 받았다. 

한국 작가에게 50대는 굉장히 힘든 시기다. 미술 시장이 젊은 작가들 위주로 흘러가기에 중견 작가들은 전시가 많이 없어 외로워진다. 60대가 되면 죽고 싶어지고, 70대가 되면 포기하는 작가들이 선배 작가들 중에서도 많다. 50대라는 지점에서 이번에 받은 상이 굉장히 힘이 됐다. 

요즘은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모교인 세종대학교 내부에 있는 세종뮤지엄갤러리에서 4월 30일부터 3주 동안 개최될 예정이다. 

▲지난 1월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전하는 양대원 작가.
▲지난 1월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전하는 양대원 작가.

- 사비나미술관에서 여러 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시상식에서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님과 맨션나인 이영선 대표님께 특히 감사드린다”라고 밝혔는데, 사비나미술관과의 인연이 궁금하다.
 
2000년, 금호미술관서 열린 전시를 관장님께서 보시고 연락이 왔다. 당시에는 사비나미술관이 아닌 갤러리 사비나였는데, 그때부터 인연이 되어 2001년에 첫 전시를 하고 이후 새로운 작업을 할 때마다 계속 전시를 가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작업이 관장님의 취향과도 잘 맞았던 것 같다. 관장님께서는 시사성이 있는 작품을 좋아하시는데, 내 그림도 그런 면에서 관장님의 취향이었구나 싶다. “그냥 그리면 그게 그림이지 무슨 예술이냐”라는 게 관장님의 가치관이다. (웃음) 피카소가 유명해진 것은 전쟁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고, 나 또한 그에 동의한다. 

관장님께서 예술가의 자세나 대중에 대한 이해 등에도 해박하신 덕에 조언도 많이 듣고 스승처럼 여겼다. 30대에 작품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을 많이 해주셨다. 돌이켜보면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 1993년 세종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이후 1996년 동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부모님의 반대로 미술 대신 화학 전공을 선택한 후, 혼자 작업을 해 온 과정이 순탄치 않았을 것 같다. “그림이 아니라 예술을 배웠다면, 다른 전공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 같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 때는 미술을 단순하게 ‘그림 그리는 행위’로만 인식했다. 그렇기 때문에 화학과를 가도 그림을 그리면 되지 않나 싶었는데, 입학 후에 회화과 학생들이 사생하는 모습을 보고 엄청난 질투심을 느꼈다. 예술 서적을 통해 철학적인 이야기를 접하고, 철학의 한 부분으로 예술을 알아야겠다 싶어 대학원을 가게 됐다. 화가보다는 예술가가 되고자 했다. 그나마 잘 하는 것이 그림이니 화가가 된 것이고, 예컨데 글을 잘 썼다면 문학을 했지 않았을까. (웃음)

그래도 기초 학문인 화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모든 학문은 한 길로 통한다는 말처럼 큰 도움이 됐다. 현대미술에서 재료학은 큰 의미가 없어졌지만 타블로(tableau) 작업을 하는 작가들에게는 재료가 아직도 유효하다. 화학을 공부하며 완전히 순수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수하다’는 것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개념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닌가. 재료를 순수하게 다루려면 어마어마한 시간이 필요하고, 사실상 재료를 다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양화의 경우, 옛날에는 장인처럼 재료를 직접 만들어 쓰기도 했는데 그렇게 하면 그림 그리는 시간보다 재료에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되고, 그림 그리는 것은 그저 행위로 끝나게 된다. 예술이란 어떠한 영감이 찾아왔을 때 주변에 있는 것이 흙 뿐이라면 흙을 가지고도 즉흥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 물질을 오랜 시간 고착시킬 수 있다면 회화가 되고, 입체적으로 만들면 조각이라는 생각도 들고, 화학이 이렇게 근원적인 것들을 이해하는 밑바탕이 되었던 것 같다.

▲양대원 작가
▲양대원 작가

- 기존의 전공을 포기하고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텐데.

옛날의 가난과 오늘날의 가난은 의미가 다른 것 같다. 오늘날에는 가난이 천형처럼 혹은 죄처럼 받아들여진다면, 그 때의 가난은 좀 더 보편적인 것이었기에 불편함을 잘 모르고 지냈다. 대학원 졸업 후에는 재료를 마음껏 못 사니까 돈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기도 했지만, 그림 그리는 것이 내 업이라 여겼기에 다른 일을 겸업하기도 싫었다. 그냥 아껴 쓰며 그림에 집중했던 것 같다. 

- ‘동글인’이라는 독특한 캐릭터가 작품에 등장한다. 언뜻 보면 호박이나 공, 가면과 같이 보이기도 하는 독특한 용모의 캐릭터다. 작가 자신의 페르소나와 같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동글인’의 의미와 탄생 과정이 궁금해진다.

동글인은 사실 화학을 전공하면서 자주 접했던 분자식(molecular formula)과 동글동글한 분자 구조에서 시작됐다. 사람도 그렇게 동글동글한 분자 구조의 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상상하며 그걸 표현해보고 싶었고, 표현방법적으론 동양적인 재료와 화학에서 가져온 이미지 등을 혼합해서 동글인의 이미지를 탄생시키게 됐다.

2000년도까지는 개념적 이미지로서 그림을 그리다가, 그림을 예술화시키는 과정에서 새로운 나만의 사람 형상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나만의 상징을 만들고 싶었다. 초창기에는 살아있는 유기물의 형태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사람의 형태로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진화가 되었다. 

당시 분자 구조처럼 사람의 구조를 형상화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출산한 후배 병문안을 갔다가 우연히 병원 1층 로비에서 암세포 사진 전시를 보게 됐다. 사진 속 암세포의 모습은 징그러우면서도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듯한 형태처럼 느껴졌다. 내가 생각하는 인간 세상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씩 형태가 변형이 되어 지금의 이미지가 됐다. 

지금의 동글인이 상징하는 건 현대인이다. 겉으로 보면 세련되고 건장해 보이지만 정작 마음은 텅 비어있는 검은 고무 풍선과도 같은, 그런 현대인을 상징하는 인간상이다. 동글인의 얼굴에 쓴 가면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가면을 바꿔치기 하는 “변검마술”과 같다. 결국 진짜는 존재하지만 진짜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나온 이미지다.

▲의심-흔들림 Doubt-Falterer
▲의심-흔들림 Doubt-Falterer

- 작업의 방향성과 변화 양상이 궁금하다.

작업스타일이 초기방향(인두질작업)과 다르게 바뀌고 난 후의 전시 작품에 대해 이명옥 관장님께서 지지해주셨고, 몇 점 팔리기도 했다. 팔리는 그림이 어떤 그림인지 몰라서 그걸 염두에 두고 그리진 않았다. 만약 알면 그걸 그렸을 거다. (웃음) 대학 수업을 할 때도 다들 ‘아! 팔리는 그림 그려야하는데’해서 ‘너 그럼 팔리는 그림을 그려봐라’ 하면 못 그린다. 쉬운 일이 아니다. (웃음). 

단편적인 그림이 아닌, 책으로 치면 장편 소설을 구상하고자 했다.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 시작했다면 그다음은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서, 그 다음은 내가 아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또 지금은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작품을 통해 생각을 알리고, 대답을 듣고 싶은 마음이다. 

작업은 작가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사회, 정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의미의 전쟁이 나를 변화시킨다. 아프카니스탄 전쟁 당시 전쟁과 권력을 주제로 작업을 오랜 시간 했다. 연합군이라는 조직이 세계 평화라는 미명 하에 평화유지군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은 석유전쟁이었다. 무언가를 가장한 이 사태가 너무도 폭력적이라고 느껴졌다. 미국 주도 하에 일어났던 일이기에 작업에도 성조기, 군복 등의 모티프가 자주 나타났던 것 같다. 사람 하나하나 안에 도사리고 있는 폭력성들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따뜻함과 이해의 반대편에 있는  그림들을 그려 따뜻함을 이해시키고 싶었다. 고야처럼 말이다. 미술은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동시대의 사람들과 중요한 논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작품의 큰 주제는 “사랑LOVE”이다. 이전 작업에서 나타난 동글동글한 요소(동글인)들이 사회 안에서 혹은 외부적으로 움직이는 것들을 표현했다면, 지금은 작품의 전체적인 주제가 사랑, 정확히 말하면 “LOVE”란 단어다. 조형적으로 그 단어를 배합하여 사람의 형태를 만들고 있다. 작품 내용은 사랑인데, 작품에 나타나는 머리 부분의 금색 동그라미는 ‘돈’을 상징한다. 돈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돈을 사랑하는 현대인을 무조건 비판하기보다는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돈을 사용하는 방법이 중요한데, 돈의 통로가 일방적이거나 강압적인  방식은 위험하다고 본다. 근작은 현대인들의 돈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 “작품을 통해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거란 기대와 그러한 영향력을 가진 예술가만이 살아남지 않을까 싶다”라고 언급한 적 있다. 요즘은 어떠한 변화를 기대하고 있는지.

이전에는 권력과 죽음이 주제였다면, 이제는 돈과 죽음을 주제로 삼고 있다. 왕정시대에는 땅이 권력이었다면, 지금은 돈이 곧 권력이다. 모든 원인이 다 가짜고, 결국 진짜 원인은 돈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한테 꿈을 물어보면 ‘건물주’라고 대답하곤 한다. 요즘은 돈이 희망이고 꿈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예술가가 이에 대한 책임의 지분은 10프로는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돈에 대한 물음표를 던지는 것이 숙제인 것이다. 돈을 향해 무작정 달려나가 죽음으로 빠질 것인가, 혹은 사유를 통해 돈을 다른 매개체로 만들것인가. 이것이 요즘 작업의 화두다.

조형적인 완성도도 있어야겠지만 그 내용에 어떤 사유를 담고, 이를 사회로 확대시키고.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할 수 있는 여러 조건들이 있을 텐데, 그러한 조건을 갖추며 성장해나가는 게 숙제라고 생각한다. 

▲LOVE-pray2, 105x74cm, 2024, 광목천위에 한지,아크릴,토분,아교,커피,린시드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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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화가지만, 한지와 토분 등 동양의 재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동서양의 융합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지, 또 그동안의 재료 기법의 변화 양상에 대해 듣고 싶다.
 
대학 재학 중이던 80년대에는 민중미술이 대세였는데, 이후 90년대 미술은 운동으로서의 미술이 아니라 미술 그 자체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당시 독창성이 우선시됐는데, 내용의 독창성이나 사조의 독창성보다는 재료에 대한 독창성이 가장 쉬웠기 때문에 재료에 대해 많이 고민했던 것 같다. 당시 대회에서 상을 받은 작품들은 대부분 재료가 독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중에 해외에 내 작업을 선보일 때 한국의 재료와 색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고, 한지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 오방색을 더하고 디자인을 일 년 정도 공부했다. 재료 뿐만 아니라 동양과 서양이라는 개념을 뒤섞고 싶었다. 동글인도 그 과정에서 화학에서 가져온 이미지를 더해 탄생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재료를 시도하고 고르는 데 약 10년이 걸렸고, 일정한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된 건 약 15년 정도 된 것 같다. 이전 작업들은 재료 면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다. 

- 2002년 대만 “Taipei Artist Village”, 2012년 프랑스 노르망디 “Usine Utopik”, 2012년 인도 “Sandarbh Artist Workshop” 등 해외 레지던시 생활을 몇 차례 해왔다. 노르망디 체류 이후로는 작품이 원색적인 요소보다는 모노크롬(monochrome)으로 나아갔다고 알려져있는데, 어떤 경험이 작업에 영향을 미친 건지 궁금하다.

당시 40대 중반이었는데, 작가 생활을 하다 보면 그 즈음에 번 아웃이 한 번씩 온다. 내가 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맞는지,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 레지던시를 찾아봤다. 어찌저찌 연결이 돼서 이민 가듯 짐을 싸서 갔다. 머무르던 곳은 프랑스 북서부 지역의 시골 마을이었는데, 전쟁의 흔적 등 평소 궁금해 하던 것들에 대한 이미지가 많았다. 그림도 어느 정도 팔렸고, 세미나도 하고 어떤 면에서 보면 오히려 압박이 없었다는 점에서 한국에 있을 때보다 나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일이 터져 일 년 만에 다시 돌아가게 됐다. 아쉽기는 했지만, 그곳에서 했던 작업들이 힘이 되었고 돌아가서 그려야 할 그림이 많았기 때문에 개운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힘을 많이 얻어왔고, 앞으로 어떻게 작업을 진행할지 확신이 생겼기 때문에 돌아와서도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생겼다. 더 강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됐던 것 같다.

검은색을 쓰게 된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어딜 가든 새로운 걸 하고 싶기도 하고, 재료가 없으면 땅에 그리자는 마음가짐으로 프랑스에 갈 때 재료를 가지고 가지 않았다. 개인전이 2주 후에 개최될 예정이었는데, 당시 머무르던 곳이 시골 지역이라 재료를 주문하면 받는 데 한 달이 걸린다길래 찾다 보니 검은 페인트가 눈에 들어왔다. 말하자면, 색이 없어서 모노크롬이 된 거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웃음) 

▲Night-island, 200x148cm, 2024, 광목천위에 한지,아크릴,토분,아교,커피,린시드유
▲Night-island, 200x148cm, 2024, 광목천위에 한지,아크릴,토분,아교,커피,린시드유

- 2020년 사비나미술관 《빅데이터가 사랑한 한글》展, 2022년 헝가리에서 개최된 《윤동주가 사랑한 한글》展, 2023년 주튀르키예한국문화원 《사랑-한지, 한글》展 등 한글 관련 전시에 몇 차례 참가했다. 본인의 그림을 “추상문자풍경”이라고 설명했는데, 언어와 문자를 적극적으로 시각예술과 결합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진다.

프랑스 레지던시 시절, 프랑스인들은 영어를 안 쓰다 보니 소통이 어려웠고 그림으로 보여줘야겠다 싶어 문자의 형태로 그림을 그렸다. 예를 들자면 프랑스어로 사랑을 뜻하는 ‘amour’의 문자 형태로 그림을 그리는 식이다. 보통 한국 사람들이 문자도(文字圖) 하면 떠올리는 것은 서예일텐데, 서예의 어떠한 느낌을 담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중국어와 한글로도 작업을 해보면서 문자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게 됐다. 

- 박영택 미술평론가는 “양대원에게 미술이란 자신의 삶에서 연유하는 모든 문제를 시각적으로 해명하는 차원에 놓여있는 듯하다”라고 말한다. 특히 ‘해명’이 함의하는 것이 궁금해졌다. 

오래전부터 알던 분이셔서 그런지 박영택 평론가의 평론을 보고 ‘나에 대해 많이 안다’는 인상을 받았다. 마음에 드는 글이었는데, 당시에도 해명이라는 단어에 꽂혔다. 지금 생각해보면 해명보다는 ‘따뜻한 시선’에 가까운 것 같다. 나는 작업실에 앉아 이야기를 하지만 여러가지에 관심이 많고,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지는 않겠지만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걸 작업을 통해 시각적으로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어떠한 재료나 필체만으로도 작가가 인식이 되는 단계에 이르고, 그 작가만의 형식이 구축되고 나서는 이제 내용이 들어갈 차례다. 그 내용에는 내 마음속에 요동치는 것들이 들어가게 된다. 해명이라기보다는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게 아닐까. 예술가로서 옆 나라에서 전쟁이 나도 나몰라라 하는 것은 무관심이라고 느껴진다. 

▲양대원 작가의 작업실 책장 한 켠에는 문학과 지성사 시집들이 놓여 있다.
▲양대원 작가의 작업실 책장 한 켠에는 문학과 지성사 시집들이 놓여 있다.

- 눈물, 가면(페르소나), 칼, 계단, 국기, 섬 등 상징적인 소재를 자주 활용해왔다. 2021년에 운중화랑에서 개최된 전시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전시 제목은 홍사용의 시를 인용하기도 했다. 작품이 가진 함축성이 시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주로 일상의 어떤 부분에서 모티프를 얻는가.

시에서 영감을 많이 얻었다. 시를 워낙 좋아하고, 회화와 가장 비슷한 예술이 시라고 생각한다. 은유적인데, 때로는 직설적이다. 문학과지성사 시집을 좋아해서 서점에 가서 제목이 맘에 드는 걸 사서 읽고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회화를 단련시키는 데 도움이 많이 돼서 주변에도 추천한다. 나중에는 직접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면 된다고. (웃음)

- 가면이 작품에서 특히 자주 등장하는데, 가면 작업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가면은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과 가장 흡사하다. 융의 철학을 좋아하는데, 그 중 페르소나라는 개념에 완전히 꽂혔다. 또, 영화  <변검>(1995)을 보고 너무나 많은 그림들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속도감 있게 변하는 그림들을 그렸는데 거기에 의미나 개념적인 것을 넣고 싶었고, 미국 레슬링이 떠올랐다.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가면을 쓰고 겨루기도 하는 모습이 허구적이면서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변검의 심각하고 무거운 이미지와 미국 레슬링의 가볍고 인스턴트적인 이미지들, 그게 섞여서 이러한 이미지가 나왔다. 

▲의심-나르시시즘, 2009
▲의심-나르시시즘, 2009

- 앞으로의 장기적인 계획이나 도달하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세계적인 작가가 되고 싶다는 목표도 있고, 결국 대중과 만나는 건 갤러리이고 영향력이 큰 갤러리일수록 발언의 범위가 넓어질 수 있기 때문에 큰 갤러리에서의 전시도 목표하고 있다.

동시에, 몇 년 전부터 시각예술가로서 공익적인 측면이 뭘지 고민하고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면 어느 지점에 이르면 그것에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어떻게 보면 꿈을 이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대가가 공익적인 측면이다. 공익적인 걸 생각할 나이, 단계가 되었다고 느낀다. 

-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내 꿈은 가난한 화가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게 진짜 화가 같았다. 이명옥 관장님이 최근 피카소에 대한 글을 쓰셨는데, 피카소가 “나는 부자지만 가난하게 작업하고 싶다” 라고 하는 말이 너무 와닿았다. 멀리서 보면 빈곤해보이고 가난해보이는 게 열정이라는 생각과 함께 깊게 와닿았다.

어떤 메시지를 줄 것인지가 나에게는 가장 중요하다. 젊었을 때에는 자의적인 측면이 많았다면, 지금은 내 생각을 이야기하고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다음 작업을 준비하는 식이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까지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본질적인 것들은 외치고 가야 하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