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현대, 김창열 작고 3주기 개인전 《영롱함을 넘어서》
갤러리현대, 김창열 작고 3주기 개인전 《영롱함을 넘어서》
  • 김연신 기자
  • 승인 2024.04.2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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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6.9, 갤러리현대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작고 3주기를 맞아 평생에 걸쳐 물방울을 탐구해온 작가, 김창열의 개인전이 열린다. 갤러리현대는 김창열 개인전 《영롱함을 넘어서》를 6월 9일까지 개최한다. 

▲2010년 전시 당시 갤러리현대를 찾았던 김창열 작가. Courtesy of Kim Tschang-Yeul Estate and Gallery Hyundai.
▲2010년 전시 당시 갤러리현대를 찾았던 김창열 작가. Courtesy of Kim Tschang-Yeul Estate and Gallery Hyundai.

김창열이 좇아온 물방울, ‘일루전(Illusion)’

“예술의 본질은 결국 일루전(Illusion)일 텐데, 이것을 재검토해 보려는 게 나의 예술입니다.” 
– 김창열(1976)

김창열 화백은 1971년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물방울을 선택한 이후, 물방울(Illusion)과 물방울이 존재하는 표면(Real)의 관계를 통해 예술의 본질을 평생에 걸쳐 재검토해 왔다. 전시 제목 《영롱함을 넘어서》는 처음 물방울을 대면했던 그 순간의 영롱함을 화면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 온 작가의 조형적 의지의 표상이자,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1970년대 물방울을 또다시 뛰어넘어야 했던 50년간의 미적 여정을 의미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수행에 가까운 물방울을 통한 예술의 본질, 즉 일루전(Illusion)에 대한 도전과 이를 통해 당도하고자 했던 조형적 아름다움을 살펴보고자 한다. 

1969년 뉴욕에서 파리로 예술의 터전을 옮겨 간 김창열 화백은 파리 근교의 마구간에서 생활하던 중 1971년 어느 아침 재활용 하기 위해 물을 뿌려둔 캔버스에서 물방울을 발견하게 된다. 1976년 현대화랑 개인전을 앞두고 11년 만에 고국에 온 김창열은 미술평론가 이일과 동료 작가인 박서보와 나눈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물방울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한다. 

“캔버스를 뒤집어놓고 직접 물방울을 뿌려 보았어. 꺼칠꺼칠한 마대(麻袋)에 매달린 크고 작은 물방울의 무리들, 그것은 충분히 조형적(造形的) 화면이 성립되고도 남질 않겠어. 여기서 보여진 물방울의 개념, 그것은 하나의 점이면서도 그 질감(質感)은 어떤 생명력(生命力)을 지니고 있다는 새로움의 발견 이었어. 점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감도(感度)라 할까, 기적으로 느껴 졌어.”

- 「뿌릴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주며 여운이 남는...작가와 같이 말하는 물방울의 비밀, 좌담-김창열, 이일, 박서보」, 『공간』,1976년 6월호 -

1972년 살롱 드 메(Salon de Mai)에서 그의 물방울이 처음 소개된 이후 초현실주의 시인인 알랭 보스케(Alain Bosquet)는 김창열의 물방울이 ‘최면의 힘을 갖고 있다.’(「김창열의 물방울」, 『콩바(COMBAT)』, 1973년 6월 18일 자 기사)라고 평했고, 박서보는 1974년 김창열 화백의 작업실에 방문해서 마주했던 물방울 작품에 대해 ‘집에 들어섰더니 사방의 벽이 온통 물방울로 가득 찼더군. 흘러내리면 집에 홍수라도 날만큼 말이야. 아이 하나쯤 익사할 것만 같던데.’(『공간』 대담. 1976)라고 말한 바 있다. 김창열 화백은 실제 같아 보이지만 철저하게 조형화된 물방울을 마(麻)천, 모래, 신문, 나뭇잎, 그리고 한자 등 실제 위에 놓음으로써 실재와 가상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중성화를 끊임없이 시도했다.

▲김창열, 물방울, 2012, 캔버스에 유채, 162 x 112 cm. Courtesy of Kim Tschang-Yeul Estate and Gallery Hyundai.
▲김창열, 물방울, 2012, 캔버스에 유채, 162 x 112 cm. Courtesy of Kim Tschang-Yeul Estate and Gallery Hyundai.

갤러리현대, 15번째 전시

갤러리현대는 1976년, 프랑스 파리에서 활약 중인 김창열 화백의 초대전을 통해 그의 물방울 작품을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한 주역이다. 이후 화백의 마지막 전시가 된 《The Path》(2020)까지 열네 번의 전시를 함께하며 반세기 동안 소중한 인연을 이어 왔다. 

이번 전시는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김창열 화백의 열다섯 번째 개인전으로, 물방울을 통해 예술의 본질을 탐구해 온 작가의 조형 의식을 재조명하기 위해 기획됐다. 전시에는 마대 위 물방울이 처음 등장하는 1970년대 초반 작품부터 2010년대 제작된 근작까지 김창열 화백의 예술 여정을 회고할 수 있는 주요 작품 38점이 소개된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그간 ‘수행’, ‘성찰’, ‘회귀’ 그리고 전쟁으로 죽어간 많은 영혼에 대한 ‘레퀴엠’ 등 서사를 품은 은유적인 언어로 읽히고 해석되어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아 왔던, 김 화백이 예술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반세기 이상 묵묵히 고심하며 실험한 물방울의 다양한 표현과 그것이 놓인 표면과의 관계, 즉 조형 언어의 여정을 살피고자 한다.

▲김창열 《영롱함을 넘어서》 전시 전경 이미지, 1층 (사진=갤러리현대)
▲김창열 《영롱함을 넘어서》 전시 전경 이미지, 1층 (사진=갤러리현대)

1층 전시장에서는 1970년대에 김창열 화백에 의해 발견되고 선택된 물방울이 시간과 중력을 초월하며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김창열은 1971년 물방울을 오브제로 선택한 이후 50년의 기간 동안 물방울이라는 한 가지 소재를 탐구해 왔다. 1970년대에 나타나는 물방울들은 대체로 실제 물방울이 캔버스 위에 맺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초기의 이 물방울들은 실제처럼 영롱하게 그 빛을 발하며, 중력을 거스른 채 존재감을 드러내며 맺혀 있다. 작가는 이러한 물방울의 표현을 두고 ‘초사실주의’라고 말해왔다. 이 시기의 물방울들은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김창열 화백의 독창적인 조형언어로 구축된 구도로 캔버스 화면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2층 전시장에서는 중력과 시간을 거스르며 영롱하게 맺혀 있던 물방울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단순히 맺혀 있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표면에서 흐르고 흡수되며, 물방울이 갖는 다양한 물리적인 형상을 선보인다. 전시작 〈물방울〉(1979)에서는 물방울들이 화면 한가득 맺혀 있으며, 그중 일부는 흡수되고 일부는 화면 위에 맺혀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 어느 물방울은 수직으로, 어느 물방울은 대각선으로, 각자 다른 중력에 이끌리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언뜻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물리법칙을 따르고 있는 물방울의 모습이다. 한편 〈물방울 CSH27-1〉(1979)에서는 물방울의 점도가 달라진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같은 물방울이지만 끈적하면서 밀도 있는 느낌을 보이는 이 물방울들은 작가가 다양한 물방울의 성질들을 연구하고 고민한 흔적을 보여준다.

한편, 한지 작품들에서는 동양의 전통 사상을 작품에 녹여내려 했던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붓으로 천자문을 여러 번 겹쳐 쓰면서 빼곡한 글씨와 한지 특유의 질감이 어우러져 독특한 느낌을 자아내는데, 어릴 적 먹으로 글씨 연습을 하듯 천자문을 가득히 적는 내용적 측면과 더불어, 재료적 측면에서도 해외 생활을 오랫동안 해 온 와중에도 자신의 본질을 잊지 않으려는 작가의 의지 또한 주목해 볼 만하다.이처럼 70년 후반과 80년 이후의 작품들에서 작가는 한 화면에서 물방울들의 점도와 흐르는 속도를 서로 다르게 하거나, 혹은 중력을 다르게 적용하거나, 아니면 다양한 재질 위에서의 물방울들을 통해 사실인 듯 보이나 철저하게 조형화된 화면을 보여 준다.

▲김창열, 회귀 S.H. 9016, 1990, 캔버스에 한지, 먹, 아크릴릭, 195 x 161.5 cm. Courtesy of Kim Tschang-Yeul Estate and Gallery Hyundai.
▲김창열, 회귀 S.H. 9016, 1990, 캔버스에 한지, 먹, 아크릴릭, 195 x 161.5 cm. Courtesy of Kim Tschang-Yeul Estate and Gallery Hyundai.

지하 전시장에서는 1980년대 이후 제작된 ‘회귀(Recurrence)’ 시리즈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회귀(Recurrence)’ 시리즈의 한자는 작가에 의해 선택된 표면이다. 김창열의 작품 안에서 글자와 물방울의 결합을 처음으로 보여준 것은 1975년의 신문에서부터이다. 1975년에 선택된 신문은 물방울을 놓을 실제적 의미로 선택되었으나, 이후 그는 물방울이 놓을 표면으로 한자 즉 천자문과 도덕경 등 우주 만물의 원리를 담고 있는 언어를 선택한 것이다. 

‘회귀(Recurrence)’ 시리즈 안에서도 작가의 다양한 변주와 실험이 존재한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 작가는 수많은 물방울을 연구하면서 이를 더 완벽하게 담아낼 수 있는 지지체를 찾는 실험에 몰두했다. 글자를 비롯한 다양한 표면과 물방울이 상호 작용하는 다양한 연출들을 살펴보면 작가가 가졌던 수많은 고민과 치열함, 조형 언어에 대한 끊임없는 실험을 엿볼 수 있다. 물방울은 표면의 글자를 확대하거나, 가리거나, 혹은 지워내기도 한다. 글자 표현 방식에 있어서도, 글자 위에 색을 칠한 후 글자 부분만 뜯어내는 기법을 사용하거나, 글자 부분만 비워놓고 색을 칠하는 등 다양한 기법 실험을 관찰할 수 있다. 〈회귀 DRA97009〉(1997)에서는 물방울 옆에 먹으로 글자가 지워져 있는데, 이는 마치 물방울의 그림자처럼 기능하며 제3의 공간을 형성하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는 평면이 아닌 표면 위에 물방울들을 놓고, 표면과 글자, 글자와 물방울과의 관계를 탐구하며 다차원적인 화면 구성을 시도한다. 

갤러리현대 관계자는 “이번 전시는 오랜 기간 거장으로 사랑받아 온 작가의 3주기 회고전을 기념하여 다양한 소장가들의 작품을 한곳에 모았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라며, “전시를 통해 김창열 화백의 영롱한 물방울이 가진 깊이와 다채로움, 그 눈부신 아름다움이 가진 큰 울림을 더욱 명징하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