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 서울시발레단 창단 사전공연에서 본 세 작품
[이근수의 무용평론] 서울시발레단 창단 사전공연에서 본 세 작품
  •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4.05.09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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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4월의 마지막 주말, 창단을 넉 달 앞둔 서울시발레단(Seoul Metropolitan Ballet)이 ‘봄의 제전’이란 제목 아래 작품 3개를 공개했다(4.26~28,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 서울시발레단은 2010년 국립현대무용단 창단 이후 14년 만에 설립되는 국공립무용단이고 국립발레단과 광주시립발레단에 이은 세 번째 국공립발레단이다. 창단 사전공연 성격으로 관객들을 만난 프로그램은 유희웅의 ‘NO MORE’. 이루다의 ‘BOLERO 24’, 안성수의 ‘ROSE’였다.

‘NO MORE’는 유희웅(유희웅 리버티홀 예술감독)의 올해 신작 초연이다. 서울시발레단 시즌 무용수로 선발된 남윤승, 박효선 외에 광주시립발레, 서울발레시어터, 스페인국립발레, 한예종 등을 거친 강다영, 조희원, 김향림, 이은수, 강영호, 최목린 등 8명의 남녀 무용수가 무대에 섰다.

무대 인사를 하듯 한 명씩 차례로 걸어 나와 무대 앞에서 Monday,Tuesday...Friday를 순서대로 외친다. 지리하게 반복되는 청년들의 일상에 대한 우울한 표현일 것이다. 검정색 레오타드, 비슷한 체형의 무용수들이 조명이 모아진 무대 중앙의 서클 안에 한 덩어리로 서 있다. 심장의 박동같이 빠른 드럼 박자에 맞춰 현실을 탈출하듯 두 팔을 하늘로 높이 뻗어 올리며 발산하는 에너지가 의외로 강력하다. 그 에너지가 무대를 넘어 객석으로 전이되며 25분 공연을 긴장감으로 채워준다.

에너지의 원천은 그들이 키워온 꿈이며 의지며 파워지만 그 안에 현실에 대한 불만과 좌절을 응축하고 있다. 각자도생이 탈출구일까, 원이 흩어지며 몸들도 흩어진다. 그러나 그들이 부딪치는 녹록지 않은 현실의 장벽에 좌절한 채 자리에 널브러져 일어날 줄 모른다. 그렇다고 끝은 아니다. 주섬주섬 다시 일어서는 그들, 무엇이 그들에게 다시 시작할 용기를 주는 걸까. ‘NO MORE'는 발레라기보다 현대춤에 가깝다. 발레의 우아한 도약이나 아름다운 라인보다 직선 위주 강력한 동작이 주를 이룬다. 그렇지만 그들은 토슈즈를 벗어 던지지 않는다. 컨템퍼러리발레가 컨템퍼러리댄스와 구별되는 경계선이다.

유희웅은 한예종과 국립발레단 출신의 정통 발레리노지만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춤동작을 만든다. “처음 무대에 섰을 땐 꿈이 있고 야망이 있었다.” “지금은 춤추는 시간이 즐겁다. 춤추는 자신에게서 행복을 찾는다.”라고 말하던 그의 모습을 무대에서 본 적이 있다.(Life of Ballerino, 2018) 자신의 안무관을 작품에 주입해 무용수들을 일으켜 세우는 메시지가 내게 울림을 주었다. 

메시지전달과 볼거리, 그리고 고전의 현대화

이루다(블랙토무용단)의 ‘BOLERO 24’엔 볼 것이 많다. 그녀의 상징색이 되다시피 한 검정색 바탕에 흰색 선이 들어간 의상이 산뜻하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미디어아트 영상을 무용수들의 날렵한 체형과 결합하여 눈 돌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경쾌한 무대를 만들어낸다.

작품의 주제는 시간이다. 작년에 초연한 ‘BLACK BOLERO'를 ‘BOLERO 24’로 수정하여 시간의 의미를 작품에 담았다. 서울시발레단이 창단하는 2024년, 낮과 밤의 교차로 완성되는 하루 24시간, 1년의 24절기, 반복되는 어둠과 빛, 음양의 대비를 그녀는 무대에 형성된 서클과 직사각형 도형을 비추는 감각적인 조명을 통해 표현한다.

뮤직비디오를 보는듯한 무용수들의 섬세한 발레 동작과 현란한 미디어아트의 결합은 볼레로 음악을 시각화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녀의 춤에서 메시지를 찾을 필요는 없다. 25분간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무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하려 애쓰지 말고 그냥 보아라.’ 이러한 답변의 의미를 실연을 통해 보여준 독특한 춤 언어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안성수의 'ROSE'(35분)가 마지막 작품이다. 2009년(장미-봄의 제전), 2018년(봄의 제전)에 이어 2024년의 ‘ROSE'에 이르기까지 스트라빈스키 음악이 공통적인 영감의 원천이다. 서울시발레단 시즌 무용수 김소혜, 김희현, 원진호를 비롯한 일곱 무용수 모두가 지칠 때까지 일사불란한 군무로 신에게 바쳐질 제단을 준비한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주술적인 검정색 분위기와 스트라빈스키 음악의 격렬함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던 무대였다.

차례로 보여준 세 작품을 통해 서울시발레단이 지향하는 미래를 예측해본다. 30대(이루다), 40대(유희웅)와 5~60대(안성수)를 아우르는 폭넓은 세대를 관객층으로 춤추겠다는 것, 600석 규모의 중 극장(M시어터)이 그들(Metropolitan Ballet) 춤의 주 무대가 될 것이라는 예상, 그리고 기교보다 힘을 바탕으로 AI 기술을 활용하면서 클래식발레(로맨틱발레와 드라마발레를 포함하여)와 컨템퍼러리댄스의 중간지점에서 컨템퍼러리발레의 영역을 확고히 세우겠다는 것이다. 작품의 주제가 메시지전달, 볼거리, 고전의 현대화 그 어느 것이든 나는 이에 동의한다.

공연장을 나서는데 세종대로 건너편 교보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외벽에 걸린 이달의 시구절이 석양빛을 받으며 빛나고 있었다.
“그대가 밀어 올린/꽃줄기 끝에서/그대가 피는 것인데/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