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 뮤지컬 '서울의 달' 이다윗 작가에게
[윤중강의 뮤지컬레터] 뮤지컬 '서울의 달' 이다윗 작가에게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16.12.30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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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뮤지컬 ‘서울의 달’을 보았습니다. 아쉽습니다. 대본을 비롯해서 연출(노우성), 작곡(최종윤), 편곡(김성수), 무대디자인(정성주) 조명디자인(원유섭)까지 특별히 부족한 것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관객의 입장에서 작품을 보면서, 충족되는 것이 적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뮤지컬은 동명의 드라마에 바탕을 두고 있지요. 82부작의 드라마 ‘서울의 달’을 2시간 정도의 뮤지컬 ‘서울의 달’로 압축하느라 애쓰셨지요? 당신의 작가로서의 역량과 노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당신은 이미 이런 ‘압축’을 잘하는 작가로 정평이 있습니다. 당신이 작가로 참여한 뮤지컬 <친구>(201는 영화 <친구>(2001)를 압축했죠. 영화 ‘친구’가 조폭을 중심으로 한 남성적 마초적 드라마라면, 뮤지컬은 이런 상황 속에 숨겨있는 내면의 상채기를 잘 드러내려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위대한 캣츠비'(2015)도 ‘순정’이라는 키워드를 통해서, 좋은 작품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아쉽게도 뮤지컬 ‘서울의 달’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뭔가 하나에 ‘모이지는 기운’이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드라마 ‘서울의 달’은 1994년의 드라마입니다. 당시의 도시서민들의 삶을 잘 그려냈습니다. 뮤지컬 ‘서울의 달’의 가장 큰 ‘오판’은 이를 2016년으로 옮긴 겁니다. 왜 그러셨나요? 이건 프로그램북을 보니, 연출(노우성)의 제안이었더군요. 이게 잘못 낀 첫 단춥니다. 끝내 공감을 얻어내지 못한 출발점입니다. 

뮤지컬 ‘서울의 달’의 주인공 ‘홍식’의 직업은 ‘제비’입니다. 그 때는 그런 직업이 일반적 관심이 대상이었겠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그 때는 ‘홍식’과 같은 캐릭터는 상경해서 서울사람에 당하고 산전수전 겪은 후에 제비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홍식이라면 그런 삶의 방식을 택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됩니다. 

연출을 비롯해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많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오히려 ‘희망이 있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 때는 ‘꿈’이란 것이 존재했지만, 오히려 지금은 서울사람조차 꿈꾸기 어렵다는 얘기를 하려하는 의도도 압니다. 그렇다면, 그런 얘기는 다른 대본과 다른 방식으로 풀어야했습니다. 

이렇게 현재로 옮긴 ‘서울의 달’은 힘을 잃고 있습니다. 우선 주인공들의 사랑법이, 예전과 지금은 무척 다릅니다. 20년 전의 연애 대사를 그대로 옮긴 무대는 때론 우습기만 합니다. 연애의 감정은 예나 이제나 달라지는 게 없다지만, 연애의 방식은 시대마다 ‘트렌드’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아쉬움은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하기에 ‘저럴 수 있다’ 혹은 ‘저랬었다’라고 짐작할 수 있거나, 회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으로 온 그들은,  이미 이 시대의 대표적인 혹은 독특한 사랑법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느낌입니다. 

‘서울의 달’이란 작품을 오늘날의 시점으로 옮겼지만, 그것의 공감대가 확 떨어진 이유는, 서울시뮤지컬단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서울시뮤지컬단은 그 이름에 걸맞게 수준의 단원들이 포진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간의 서울시뮤지컬단의 작품을 꾸준히 지켜보면서 늘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들의 연기나 노래를 잘하거나 못하거나를 떠나서, 서울시뮤지컬단은 ‘당대의 트렌드’는 아니란 생각입니다. 그것이 좋다거나 그렇지 않거나를 떠나서, 종종 80년대와 90년대의 뮤지컬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어쩌면 이번 서울뮤지컬단의 ‘서울의 달’은 그 당시를 배경으로 했으면, 이해가 되고 용인이 되는 게 더 많았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서울시뮤지컬단이 그려낸 1994년을 그렇게 노래하고, 그렇게 춤을 추고, 그렇게 대사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거나, 오히려 더욱더 공감을 폭을 넓힐 수도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작품을 다시 원래 ‘서울의 달’의 시대로 되돌려줬으면 하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런 대사, 그런 연기, 그런 노래에 공감의 폭이 넓어질 겁니다. 그리고 지나온 그 시대에 바치는 헌가(獻歌)로서의 시대적 의미도 있을 겁니다. 

이 뮤지컬의 또 하나의 맹점은, 여러 인물이 등장을 하지만, ‘홍식’의 비중이 너무 높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쉽게도 이번 홍식을 맡은 이필모 배우가 뮤지컬무대의 현장에서 2시간동안에 에너지를 쏟아가며 노래와 연기를 하기에는 아직은 무대경험이 많은 배우가 아니라는 것이 객석에서도 알게 된다는 점입니다. 

나는 당신의 능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영화 시나리오에서 출발한 당신은 어쩌면 감독의 요구에 누구보다도 현명하게 대처하면서, 감독이 만들어낼 수 없는 대본을 만들어내 줍니다. 하지만, 이런 요구조건의 수용이 오히려 작품(대본)의 중심을 잃게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아울러 영화 이상으로 뮤지컬에서도, 크레이에티브팀’의 중요성을 새삼 깨답습니다. 이번 뮤지컬이 개별적으로 봤을 때는 부족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전체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이유가 전체적인 스텝이 하나의 ‘크레에이티브팀’으로 보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뮤지컬 ‘서울의 달’은 여러모로 아쉬운 작품입니다. 왜 그럴까요? 현명하고 능력이 있는 이다윗작가는 더 많은 걸 알겁니다. 그리고 이 다음 작품에선, 그런 우를 범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극본을 응원합니다. 


뮤지컬 ‘서울의 달’ (2016. 12. 10~ 12. 25 세종문화회관 대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