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욕정의 무릉도원을 그리는 이혁발의 ‘육감도“
[전시리뷰]욕정의 무릉도원을 그리는 이혁발의 ‘육감도“
  • 조문호 기자/사진가
  • 승인 2018.09.02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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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9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경북’

인사동 ‘갤러리 경북’에서 9일까지 열린다.

이혁발 작가의 ‘육감도’전이 ‘갤러리 경북’ 초대전으로 9월9일까지 열린다. “사람을 지탱하는 근본인 성욕을 외설로 보는 것은 권력자나 도덕 주의자들이 만든 음모다” 화가이자 행위예술가인 이혁발씨의 항변이다.

▲ 이혁발, 육감도-20151007,53x45,5cm,한지에 채색.

동국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는 작품을 손으로 하는 게 아니라 온 몸으로 한다. 화가, 행위예술가, 미술평론가 등 그를 지칭하는 직업만도 세 가지인데, 사진과 영상설치미술, 저술 작업 등 예능 분야의 팔방미인이다. 그래도 이혁발하면 행위예술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가 30년 가까이 물고 널어진 작업이 바로 성이다. 자신이 여자로 분장하여 보여 준 ‘색시미미’를 비롯하여, 정액을 그림 재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욕망을 통제하는 사회를 행위예술로 풍자하는 등 오로지 성에 천착해온 그의 작업들은 성의 즐거움에서 에로티시즘 미학을 찾으려 했다.

▲ 이혁발, 육감도20160903, 78.7x54cm.종이에채색. 2016.

가장 성스러운 인간 존재의 근원인 성이 음지에서 핍박 받은 지 오래다. 더구나 요즘은 미투 라는 회오리에 주눅 들어 말도 꺼내기 어렵게 되었다, 인간이 살아가는 최상의 가치가 돈과 권력에 휘둘리기 때문인데, 가장 좋아하면서도 노출을 꺼려하는 것 또한 성이다.

인간 존재의 모든 것이 원초적인 성에서 비롯되지 않았는가? 일단 성행위를 지칭하는 말부터 거슬린다. 섹스라는 영어는 그렇다 치고 성교가 뭐냐? 좀 더 육감적인 말은 빠구리다. 이 말이 사전에는 성교를 속되게 하는 말이라 적어 놓았다. 이런 것들이 성을 신성화하여 음지에 가두기 위한 발상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성이 돈과 힘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원시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음과 마음으로 함께 나누고 즐겨야 할 인류 최대의 가치다.

▲ 이혁발, 육감도20161012, 93x63cm.한지에 채색.

이혁발 작업을 주시해야 하는 것은 아무도 거론하지 못하는 일을 작품화 한다는 점이다. 사실상 성 문제를 계속적으로 작품 주제로 삼기에는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다. 작가가 음란한 사람이나 성도착증 환자로 몰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주눅 들지 않고 초지일관 뜨거운 감자를 공론화한 문제작가다. 1991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열 두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는데, 지금은 살고 있는 집 문패까지 ‘육감도’로 붙일 만큼 ‘육감도’에 전념하는 우리나라 대표적 에로티시즘 작가다.

▲ 이혁발, 육감도20161012, 93x63cm.한지에 채색.

‘성감도(性感圖)’가 연상되는 그의 최근 작업을 오랜만에 보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얌전해 진 느낌이었다. 육감도란 현실에서 이뤄졌으면 하는 이상적 공간, 지상 극락을 상징하며 육체적 쾌감으로 득도(得道)의 경지에 가고 싶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성적인 것에 대한 작가의 발칙한 상상력은 여전하지만, 생명과 영혼, 안식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성 행위를 상징하는 에로틱한 이미지들이 허공을 떠다니는데, 도상화 같은 초현실주의 화풍이다. 성의 기호화로 무능도원을 만들어 놓은 그림이 30여점, 콘돔과 비디오로 만든 설치미술 2점, 부채그림 30점, 도자그림80여점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개막일에는 ‘욕망과 국가의 통제’라는 제목의 퍼포먼스도 열렸다.

▲ 이혁발, 육감도20161012, 93x63cm.한지에 채색.

사진처럼 적나라한 성적 묘사가 아닌, 보면 볼수록 욕정이 꿈틀거리는 그런 명화가 보고 싶다. 볼 때마다 사람을 동하게 한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작품이 어디 있겠는가? 계산된 욕심에서 비롯된 성이 아니라 마음에서 끓어오르는 그런 욕정이 무성해야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 여겨진다. 성 자체를 욕으로 여겨 뒤로 감추려는 사고방식에 쐐기를 박고, 성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려는 것이 바로 이혁발 작업의 모토다.

작가 이혁발씨를 처음 만난 지가 20여년 되었는데, 그의 저돌적인 작가의식에서 일종의 동료의식 같은 것을 느꼈다. 일찍 보여 준 ‘색시미미’는 그만의 기발함을 느낄 수 있는 작업으로, 자신에 내재된 여성성을 보여주었다. 사람에게는 남녀 각각의 성애가 존재한다는 또 다른 반론이었다.

▲ 이혁발, 육감도20161012, 93x63cm.한지에 채색.

그 몇 년 뒤 ‘인사동 사람들’을 촬영하기 위해 만난 적이 있는데, 느닷없이 스타킹과 하이힐 등 여장을 준비해 와 당황하게 한 적이 있다. 마치 성 개방을 부르짖는 사회운동가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 전시 이후에는 안동으로 내려 가 잘 만날 수 없었는데, ‘신체발언’전이란 남성 알몸 촬영 프로젝트를 진행 중에 한 번 찾아간 적 있었다. 제법 쌀쌀하게 느껴지는 가을이었으나, 숲 속에서 벗고 선 그의 모습은 마치 타잔처럼 자유로웠다.

사실 인간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게 성이다. 성적 욕망은 사람을 지탱하게 하고, 살아가게 하고, 세상에 존재하게 하는 이유다. 남자가 돈을 벌고 지위와 권력을 얻으려는 것도 결국은 성적매력이 넘치는 여성과 결혼하고 싶은 욕망 때문일 것이다. 인류가 생존하는 동안 바뀔 수 없는 영원불변의 이치다. 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터부시하는 현실은 인간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결벽증 걸린 사회나 마찬가지다. 풍성하고 살맛나는 삶을 위해 음지의 성을 양지로 끌어 올려야 한다. 성행위 장면을 그린다고 해서 외설로 규정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예술과 외설의 차이가 뭐라고 보나? 예술이란 사람의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지, 속박하고 장식하는 치장이 아니다.

▲ 이혁발, 육감도20161012, 93x63cm.한지에 채색.

이혁발의 작품세계는 성으로부터 시작되고 성으로 완성된다. “성은 오묘한 진리이며, 성 속에 세계가 있다. 성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자기 몸도 사랑하게 되고 타인의 존재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러면 육체는 아름다워지고 따라서 정신도 아름다워지고, 세상도 아름다워진다. 성이 주는 축복은 가늠하기 힘들다“는 작가의 말이다.

미술평론가 오세권 교수는 “이혁발이 보여준 성에 대한 미술 표현의 담론은 국내 에로티시즘 미술사에 기록될 만한 근거들을 남기고 있다”고 말했지만, 인간 본능의 쾌락을 공론화시키는 사회 운동적 의미에 더 무게 두고 싶다.

이 전시는 인사동 ‘갤러리 경북’(02-737-8882)에서 9월9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