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수상자] 홍지윤 작가 “규정할 수 없는 작가가 되고싶다”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수상자] 홍지윤 작가 “규정할 수 없는 작가가 되고싶다”
  • 이은영 발행인·김연신 기자
  • 승인 2025.01.15 16: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달 16일까지 금호미술관서 전관에 걸친 전시 선보여
‘화려한 경계, 선비지향, 어머니’…작업 설명하는 키워드
무거움과 가벼움, 동서고금, 아날로그와 디지털 융합
최초의 ‘수묵영상’작품 발표…‘퓨전 동양화’ 장르 개척
문학적 모티브 적극적 수용…시서화 전통 현대화
색동꽃에는 ‘노자’적 정신이 담겨있다
예술은 혼돈 속에서 나온다…답 가지면 개진되지 않아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선언과 함께 탄생한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는 다학제간 협력, 폴리매스 등의 화두에 주목, 다른 것들을 배척하기보다는 다원주의가 만들어낼 새로운 에너지에 대한 기대를 품는다. 

▲어머니의 의상실을 재구성한 전시공간에 선 홍지윤 작가
▲어머니의 의상실을 재구성한 전시공간에 선 홍지윤 작가

홍지윤은 모더니즘이 머무르던 시기에 태어났지만 누구보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작가다. 매체를 넘나들며 차이를 적극적으로 횡단한다. 경계를 화려하게 넘나들며 하나의 원 안에서 연결하고 관계 맺으며 순환하고자 한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와 같은 시・공간적 구분에 얽매이지 않는다. 먹을 아크릴로 대체해 기운생동하는 획을 긋고, 오방색을 팝아트적 해석으로 변용하며, 회화 작품에 단테와 윤동주의 시구를 얹는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시간도 자유로이 가로지른다. 회화를 디지털로 재현하는 대신, 이를 뒤섞은 작업을 구현하거나 아이패드로 먼저 그림을 그리고 캔버스로 옮기는 방식으로 시간을 역행하기도 한다.

작가는 동서고금의 인문을 통한 그의 작업을 ‘관계지향적 융합과 순환’이라 칭한다. 홍지윤의 전시에서는 회화 뿐만 아니라 영상, 설치, 사진, 디자인, 음악, 시, 공공미술,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다분야를 아우르는 그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느껴볼 수 있다. 

▲별 꽃 아이 Satrs Flowers Children, i-pad drawing, 2023
▲별 꽃 아이 Satrs Flowers Children, i-pad drawing, 2023

홍지윤의 회화는 슈베르트의 악보나 윤동주의 시, 단테의 ‘신곡’ 등과 결합해 새로운 공감각을 형성한다. 신작 <별, 꽃, 아이>는 단테의 ‘신곡’에서 천국과 가장 가까운 현실의 모습이 ‘별, 꽃, 아이’라고 표현된 것에 영감을 받아 이를 시각화했으며, 윤동주의 ‘서시’ 시구를 화폭에 담기도 했다. 문학적 모티브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동양의 시서화(詩書畫) 전통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융합하고 현대화한 작품들이다. 작가는 “나의 고전적인 낭만은 인문과 만나 시어(詩語)가 된다”라며, “작업은 시, 서, 화(詩, 書, 畵)로 이루어진 고전적인 동양화의 요소를 현대의 다중매체에 담는 것”이라고 말한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요요마의 실크로드 프로젝트처럼 크로스오버에 큰 관심을 두고, ‘퓨전 동양화’라는 장르를 개척했다. 어떻게 하면 동양화가 현대에 걸맞는 호소력을 지닐 수 있을지 고민하던 와중 2000년대에 접어들어 동양화와 기술 매체를 접목하기 시작한 것에서 출발했다. 그렇게 미술계보다는 기술・디자인 분야에서 이름이 먼저 알려지기 시작해 얼마지 않아 최초의 ‘수묵영상’ 작품을 발표, 삼성, LG, 홍콩의 선훈카이 등 국내외 대기업과의 협업과 강연으로 경계를 확장했다. 2003년 발표한 수묵 영상 작품 <큰 새, ‘붕棚’>은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를 주제로 존재의 사유를 다루며 동양철학을 영상 매체로 생동감있게 펼쳐낸다. 그렇게 홍지윤의 고유명사였던 ‘퓨전 동양화’는 현대에 접어들어 일반명사로 자리 잡게 됐다. 

▲Welcome to Paradiso, 320x320cm, acrylic on canvas, 2024
▲Welcome to Paradiso, 320x320cm, acrylic on canvas, 2024

동・서양화의 차이를 뒤섞은 작업의 중심에는 ‘색동꽃’이 있다. 오방색을 현대적으로 변용한 화려한 색채의 ‘색동꽃’은 작업의 기호이자 상징이 되어 동서고금을 가로지른다. 작가는 색동꽃에는 ‘노자’적 정신이 담겨있다고 말한다. 둥근 형태의 꽃의 중심에 동양의 정신과 형식을 두었으며, 그 모습은 작가의 ‘둥근 사유’와도 닮아있다.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색동꽃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광화문에 미디어 파사드 형태로 송출되기도 했다. 광화문을 배경으로 미디어 작품을 선보인 작가로는 최초다.

팝아트를 닮은 색동꽃의 화려한 색채에 영향을 미친 모티브는 독일에서의 생활, 그리고 어머니의 기억이다. 작가는 그의 작업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화려한 경계, 선비지향, 어머니’, 이렇게 세 가지를 꼽는다. 작가에게 어머니는 작은 세상이었다. 1975년, 의상 디자이너였던 그의 어머니는 ‘스왕크’라는 이름의 의상실을 운영했고, 여섯 살의 그는 화려한 자궁 속과 같았던 그곳에서 자라났다. 작가는 화려한 의상실의 이미지로 박제된 과거의 시간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고전주의 서양미술 화집과 장대천의 산수화 화집, 이오니아식의 석고장식과 흰 페인트를 칠한 기둥, 영국제 체크무늬 모직, 마호가니 색 코린트식 부조로 장식한 목재 장식장, 쇼윈도우의 유화그림과 이젤과 희고 긴 마네킹들, 유리창에 번지는 한낮의 풍경과 그녀의 목소리 등이 나의 작은 세상이었다.” 30대 때 방문한 독일의 풍광은 어렸을 적 접하던 서양화집의 이미지들과 꼭 닮은 모습으로 색채에 대한 열망을 다시금 일깨웠다.

▲《홍지윤 스타일》展 지하 1층 전경.
▲《홍지윤 스타일》展 지하 1층 전경.

작가의 예술세계가 배태됐던 이러한 영감의 산실은 시공간을 오늘의 서울로 옮겨와 재현된다. 지난달 29일부터 금호미술관에서는 전관에 걸친 초대전, 《홍지윤 스타일》展이 개최되고 있다. 작가의 동양적인 사유의 지점으로부터 다원주의적으로 확장하여 전개해온 30년간의 작업을 돌아보는 전시다. 지하층에서 3층에 이르기까지, 각 층은 다채로운 색과 얽매이지 않는 형식으로 각각 다른 매력을 품은 작품들을 선보인다. 지하층은 어머니와 의상실의 기억을 재구성한 설치 작품으로 채워 지금의 ‘홍지윤 스타일’을 만든 기억의 파편들을 감각해볼 수 있다.

금호미술관에서 홍지윤 작가를 만나 전시장에 펼쳐진 작가의 다채로운 사유와 그의 예술세계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홍 작가는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제16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미술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어 그 의미가 더욱 뜻깊은 인터뷰였다.

- 제16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미술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상의 의미와 소회를 듣고싶다.

올해는 1995년 1회 개인전을 한 이후 작업한지 30년이 되는 해다. 이 상은 예술의 기쁨 뒤에는 반대의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시점에 큰 용기가 될 것 같다. 그리고 또 한편, 앞으로의 30년에는 어떠한 모습의 홍지윤이 기다리고 있을지 흥미진진 하기도 하다. 그 또한 눈부시게 화려하고 불편하고 보드라운 다면체이길 바란다.

서툴고 부족하지만 늘 지켜봐 주시고 등 떠밀어 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이 상을 받게 된 것 같다. 서울문화투데이와 심사위원 분들께 다시한번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수많은 훌륭하신 작가님들을 대신한 이 상은 격려의 의미도 있지만, 그만큼 수상자에 대한 책임감을 전재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깨가 무겁다. 앞으로도 좋은 작가로 바르게 정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홍지윤 스타일》 전시가 개최되고 있는 금호미술관 전경
▲《홍지윤 스타일》 전시가 개최되고 있는 금호미술관 전경

- 지난달 29일부터 금호미술관 전관에서 초대전 《홍지윤 스타일》이 열리고 있다. 시도 쓰고, 글씨 작업도 하고, 퍼포먼스 작업도 해오며 늘 바쁘게 지내왔는데, 요즘의 일상과 소회를 듣고 싶다.

내 나이에 이렇게 전관에 걸쳐 전시를 하는 게 감사한 일이라 작품을 보여주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대단하신 원로 작가분들이 많은데, 부끄러울 따름이다. 감사한 만큼 어려움도 많았고 한 가지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한다는 게 용기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근육이 붙을 때까지 노력하면서 자기검열을 해나가려고 한다. 

또,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회화가 너무 좋아졌다. 앞으로 회화에 집중하면 내가 모르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성장 과정에서 미술 뿐만 아니라, 책, 무용(발레), 음악(클래식) 등을 자주 접했으며 현재 다원주의에 큰 관심을 두고 작업에도 반영하고 있다. 그야말로 팔색조의 매력을 갖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작가인데, 처음에는 시대와 충돌하는 지점도 있었을 것 같다.

내 안의 ‘나’가 하나가 아니라 몇 개 더 있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막연히 알고 있었고, 화해하는 과정이 어려웠다. 

내가 자라온 시대와 시간은 모더니즘의 시대였기 때문에 한 우물만 파고, 시류를 따라야 했기에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은 나 자신에 대한 딜레마와 죄책감이 있었다. 세상이 돌아가는 방향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 같아서 많이 힘들기도 했고, 내 별은 다른 곳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동양미학과 현대미술을 함께 공부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잘한 선택이었다. ‘예술의 종말’을 선언하며 예술계의 포스트모더니즘 포문을 연 철학자이자 미술 비평가, 아서 단토(Arthur C. Danto)를 공부하면서 내가 누구보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작가임을 알게됐다. 내 감각 체계에는 공감각이 기본적으로 내장되어 있는 것 같다. (웃음) 작가로서 이 사실에 용기를 얻어서 이 시기인 2010년대 초반, 현재 전시중인 대표작들이 많이 나왔다.

▲나의 베아트리체 Il mio Beatrice,160x160cm, acrylic on canvas, 2024
▲나의 베아트리체 Il mio Beatrice,160x160cm, acrylic on canvas, 2024

- 스스로를 ‘퓨전 동양화’ 작가로 명명한다. 2013년, 퓨전 동양화의 학문적 근거를 담론화 하기 위해 「자작시를 통한 다원적 융합과 현대 동양화의 변용」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발표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2014년 서울문화재단 지원으로 퓨전동양화의 전개와 진보를 제시한 『아시안 퓨전』을 출간했다. ‘퓨전 동양화’에 큰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듣고 싶다.

‘퓨전동양화’는 본질로부터 변질된 것이 아니라 동양적으로 개념화된 실험 동양화다. 시대정신과 다중매체를 통해 진화했다. 시작 당시 ‘퓨전 동양화’는 내 작업을 칭하는 고유명사에서 현재 보통명사가 되었다.

전통의 현대화에 관련된 이슈도 계속 있어왔고, 어떻게 하면 동양화가 호소력을 가지고, 동양화 전공 작가로서 자리매김을 확실하게 할 수 있을지 늘 고민했다. 동양화의 감각적인 색이나 형태 등도 동양화가 가진 성향에 비해 호소력이 없다고 느꼈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로서 어떻게 호소력을 갖고 자리매김을 확실하게 할 수 있을지 연구해왔다.

알다시피 나는 음악과 문학 등에도 관심이 많은데, 1998년에는 음악과 인문학을 공부한 동양인 첼리스트 요요마(Yo-Yo Ma)의 실크로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음악을 매개로 동서양의 문화를 잇는 프로젝트다. 실크로드 프로젝트가 음악에서 크로스오버가 잘 적용된 사례라면, 미술에서는 어떠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을지 생각했다.

▲《홍지윤 스타일》展 전경
▲《홍지윤 스타일》展 전경

또, 당시 서강대 어학당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었는데, 영어 선생님께서 동・서 비교문학을 연구하시던 분이셨다. 당시 비교문학이라는 분야가 흥미롭게 느껴졌고, 동양과 서양을 병치하는 생각의 훈련을 이어나가게 됐다. 

시대 변화와 새로움의 상징적 언어이기도 했던 ‘밀레니엄’을 준비하던 세기말은 문화계 전반이 변화와 새로움을 희구하며 무거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주류였다. 이후 2006년에 발간되어 사회적 선풍을 일으켰던 이어령의 저서 『디지로그』에 나온 ‘비빔밥의 비유’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융합을 화두로 회화와 영상을 융합하며 이른바 ‘퓨전 동양화’를 진행하고 있던 나에게 확신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퓨전 동양화’의 방식에 있어서 ‘시서화일체’라는 전통적 사유체계가 현대의 ‘하이브리드’, ‘융합’, ‘퓨전’의 의미와 상통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순환’의 고리를 동양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지점에서 스스로 동양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자각을 명백하게 할 수 있었다.

‘퓨전 동양화’는 동양화에 기반을 둔 동시대 미술로 다중융합 작업과 협업, 교육활동, 출판 등을 내포한 다원적 형태다. 초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매체 융합에서 2014년 ‘아시안 퓨전’ 출간 이후 동서고금의 인문과 다중 매체와의 융합으로 확장되고 있다. 대부분 미술관기획전의 대형 설치 작업은 미술관 전시와 미디어파사드 작업과 함께 공공미술과 기업과의 협업을 아우른다.

▲《홍지윤 스타일》展 전경.
▲《홍지윤 스타일》展 전경.

- 최초의 ‘수묵영상’ 작품을 발표, 삼성, LG, 홍콩의 선훈카이 등 국내외 대기업과의 협업과 강연으로 경계를 확장했다. ‘동양화가’로서 작품에 처음 기술을 도입할 때에는 생소했을 법도 한데,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새천년, 2000년에 이르니 어머니께서 컴퓨터를 배우는 게 어떨지 제안하셨고, 얼마지 않아 병환으로 인한 재활 운동을 위해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에 모셔드리게 됐다. 어머니를 모셔다드리던 어느날, 연대 정문에 ‘디지털 할리우드’라고 써있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2000년 일본의 디지털 컨텐츠 크리에이터 육성기관인 디지털 할리우드와 연세대학교가 협업하여 설립한 디지털 인재 교육기관을 홍보하는 문구였다. 당시 국내 최초로 3D 애니메이션을 공식 교육 과정으로 가르치는 아카데미였다.

어머니의 추천으로 등록을 하고 전혀 다른 세상을 봤다. 당시 동양화단은 다소 보수적인 성향이 있었고 속된 말로 ‘줄서야 하는’ 상황이 익숙했는데, 여긴 전혀 딴판이었다. 수직적 사회가 수평적 사회로 변모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술 비전공자들, 디자이너들과 새로운 작업을 해나가다 보니 기술・디자인 분야에서 먼저 알려지고, 미술계에는 이후에 알려지게 됐다. 최초의 수묵 영상 작업도 그 무렵에 나왔다. 

2002년에는 아르코 작가 지원 제도가 처음 출범했는데, 총 8번 선정되어 지원을 받았다. 미술계에서 원했던 텍스트와 내가 만드는 텍스트가 일치했던 것 같다. 말그대로 동시대적인 작업이었던 것이다.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홍지윤 작가의 모습.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홍지윤 작가의 모습.

- 동양화를 전공하게 되기까지의 과정과 학부 생활부터 박사과정에 이르는 학업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중학교는 예원학교를 다녔지만, 고등학교 때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대학에서는 심리학이나 철학을 전공하고 싶었다. 그러나 좋은 학교를 가기에는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고, 그렇다고 나쁜 학교를 가고 싶지는 않아서 그림을 다시 그려볼까 생각을 했다. (웃음) 어렸을 적부터 수채화를 잘 그렸고, 수채화와 마찬가지로 물로 하는 작업인 동양화를 하는 게 어떨지 선생님의 제안에 동양화를 하게 됐다. 이후 대학을 가고,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동양화의 가치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학부 시절 초반은 민중미술 후기였다. 당시 한국 미술은 다 쓰러져가는 공사판을 그리던 시기인데, 당시 기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나와는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웃음)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한국적인 것은 이런 것만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방한 기개가 담긴 북한의 칼춤도 있고, 화려한 불교 미술도 있지 않은가.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사람들은 나를 이단아 보듯 봤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내 안에 있던 길에 대한 확신이 생겼고 그 과정에서 점차 힘을 얻게 됐다.

대학원에서는 남천 송수남 선생님께 많이 배웠다. 목차만 봐도 공부가 된다는데, 당시 선생께서 책 심부름을 자주 시키시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선생께 그야말로 ‘책 읽는 법’을 배웠다. 연구실에서 연구만 하게 하셨는데, 그 때 작은 종이에 그려나간 그림들이 후에 “화선지 위의 시간” 이라는 책이 됐다. 

동양화를 공부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에 익숙해졌다는 말이다.
또 시적 사유란 보여지는 것 너머의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이다.
이것을 흔히 은유라고 하며 이것의 중심, 그리고 더 쉬운 표현은 동양적이라는 말이다.
나에게 이는 미술적 지향이었기 때문에 자작시에 이를 담고 시서화의 개념을 차용하게 했으며 현대미술의 텍스트적, 개념적 측면의 자리에 이를 병치하게 했다. 2024.09.21.

- 홍지윤 작가의 2024 작업일기 中 '시점, 時點' 일부 -

▲《홍지윤 스타일》 전시 전경
▲《홍지윤 스타일》 전시 전경

- ‘색동꽃’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색동꽃은 전체 작업의 성격을 일괄하고 있다. 내용과 형식의 일치를 드러내는 은유의 아이콘(icon)이면서 사의적 팽창을 위한 모험의 메타포(metaphor)”라고 밝힌 바 있는데, 색동 꽃을 처음 그리게 된 계기부터 변화 과정이 궁금하다. 
 
90년대 이후 한창 수묵 추상 작업을 하던 시기, 어머니께서 “지윤아, 이렇게 심각하고 시커먼 그림 말고 예쁜 꽃을 그려보는 건 어떠니”하고 제안하셨다. (웃음) 그때만 해도 꽃 그림은 상업 그림이었기 때문에 마음에 담아두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2007년 ‘음유, 낭만, 환상’ 시리즈 작업 때 꽃 작업을 선보였는데, 사람들이 그 꽃을 너무 예뻐하는 것이다. 

2010년 ‘Life is colorful’ 작업 때 형광색의 오방색을 쓰면서 꽃에 대한 사유가 다시 시작됐다. 나의 여러가지 색깔이 꽃의 색으로 나온 것 같다는 생각도 했고, 꽃이 가진 특성이 줄기를 중심으로 뭉쳐있는 꽃의 특성이 나의 ‘둥근 사유’와도 가깝게 느껴졌다. 이 꽃은 장식적인 의미의 꽃과는 거리가 있다. 불교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고, 나를 설명하는 ‘폭발하는 에너지’의 상징처럼 보이기도 한다.

꽃을 그리는 나는 여성주의 미술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페미니즘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 꽃으로 시적 사유를 전달하고 싶은 것이다. 나약한 존재 또는 가부장적 제도의 희생양인 여성을 드러내고자 하기보다 상대적으로 섬세한 미감과 예술과 세상을 연결하는 표현에서 더 유연 할 수 있는 여성적 장점들을 드러내고 싶다.
페미니즘을 통해 여성의 비극적 존재론이나 여성이 누려야 하는 사회 정치적 이슈, 극복해야 하는 패러다임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한 경지의 여성성을 강조하여 시적 서정의 진실한 힘을 드러내고자 한다.

(...) 여러 가지 색의 꽃잎이 하나의 꽃이 된 [색동꽃]은 모든 것이 연결돼 있는 순환의 사유를 상징한다. 불교의 사유체계인 원융무애는 이러한 사유의 구성과 특징을 대변한다.
음과 양과 같은 상대적인 요소들. 과거와 동시대, 아날로그와 디지털, 동양과 서양, 무거움과 가벼움. 이 모든 것들은 상대적으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 안에서 연결되어 서로 관계 맺으며 하나의 원으로 순환한다.
지금, 세상을 보는 시점이다.

- 홍지윤 작가의 2024 작업일기 中 '시점, 時點' 일부 -

▲접시꽃들판에 서서. Standing on the hollyhock field. 220x640cm Acrylic on canvas 2014
▲접시꽃들판에 서서. Standing on the hollyhock field. 220x640cm Acrylic on canvas 2014

- “작업 속의 색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있다”고 말했는데, 생전 디자이너였던 모친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화가는 원래 어머니의 꿈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지적인 욕구가 컸지만 여성은 집안에서 크게 지원 받지 못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원하시던 일본 유학도 가지 못하시고 결혼 후 의상실을 운영하셨다. 의상실을 운영하면서도 재능을 인정 받아 의상 디자이너로서 유명해지고 상도 받고 하셨다. 갖가지 화집과 의상 잡지, 그림, 옷감. 색색의 패턴들로 채워진 어머니의 의상실은 작업의 색인이 되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나는 다섯 살부터 그림을 그렸다.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지로 예술적이며 풍요로운 유년을 보냈다. 어머니께서는 늘 검소하게 살라고 하면서도 책값이나 학비 등 내가 무언가 배울 때에는 아끼지 않는 분이셨다.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나 없이 살지 못한다고 하셔서 유학도 가지 못했다.(웃음) 어머니가 나를 참 아끼셨기 때문에 평생 받을 사랑을 생전에 다 주고 떠나셨다는 생각도 든다.

어머니를 잃은 시기는 밀레니엄을 맞은 사회변환의 시점이었다. 국가차원의 IT산업의 육성으로 수직구조의 사회가 수평적으로 개편됐다. 작업은 선구적인 디지털 작업을 통해 권위미술에 저항하고 고유의 미술로 전환됐다. 

▲나, 꽃, 바다, acrylic on canvas, 162x130cm,2022
▲나, 꽃, 바다, acrylic on canvas, 162x130cm,2022

- “둥근 형태의 꽃의 중심에 동양의 정신과 형식을 두었다. 정신은 ‘노자’적 ‘은유, 반증, 역설’의 방식, 형식은 ‘시서화’와 ‘지필묵’이다”라고 말했다. 1층의 회화 작품은 아크릴로 그린 한국화와 같이 느껴진다. 동서양의 정신과 형식이 혼합된 독특한 작품 세계가 궁금해진다.

예전에는 모든 자연물이 다 둥글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이번 전시의 신작의 주제인 단테의 ‘신곡’에서도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가 수레바퀴와 같다 했다고 한다. 과거와 미래가 만날 수 있는 둥근 원, ‘둥근 사유’를 중요한 화두로 삼고 있다. 

노자는 음과 양으로 본질을 말한다. 순수를 향해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가는 것이 동양철학의 핵심이다. 동서양과의 차이를 인지하고 녹여내는 것이 숙제처럼 느껴졌는데, 문득 ‘그냥 섞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섞인다는 것은 같은 걸 섞는 건 의미가 없다. 다른 걸 섞어야 충돌 에너지가 생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동양과 서양을 섞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미술과 인문을 결합하기도 했고,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을 내 예술에서 만들고자 했다. 

근본적인 아이디어는 시서화일체(詩書畵一體) 사상이었다. 그 기저에는 선비 정신이 있다.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보다 무서운 기개가 우리에게 있기에 한국사회가 지탱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선비정신이 작품 안에서 신라의 최치원, 시인 이상의 모티프의 차용으로도 이어졌다.

동양화 전공은 전통과 고전에 대한 집착과 당시 이슈였던 한국성, 또는 전통의 현대화 또는 재해석에 대한 문제제기를 갖게 했다. 따라서 젊은 날의 작업은 이를 어떻게 동시대화하고 현대미술과 병치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집중이었다.
나는 전통에서 동양적인 사유방법에 집중했다. 동양적 사유의 전통은 나와 자연, 대상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하게 여겼다. 이 말은 동양철학에서의 음과 양의 개념으로 부연된다. 상대적인 것이 다르지 않고 동일 하다는 노자의 반어법적 은유는 이를 함축한다.
동양적 사유 방법인 이 지점은 내 미술 시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 홍지윤 작가의 2024 작업일기 中 '시점, 時點' 일부 -

▲서시 Love everything dying,160x160cm, acrylic on canvas, 2024
▲서시 Love everything dying,160x160cm, acrylic on canvas, 2024

-  작품에서 색감이 눈에 띤다. 수묵 위주의 작업을 이어나가다가 독일에 다녀 온 후 색채를 많이 쓰기 시작했는데, 독일에서 어떠한 계기로 화려한 색채를 도입하게 됐나.

2003년부터 현재까지 독일을 일 년에 한 번씩은 가고 있다.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다른 느낌이 있다. 알맹이 같은 느낌이랄까. 껍데기 없이 본질을 찾아갈 수 밖에 없는 느낌. 독일 사람들은 투박해도 굉장히 진실하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것에서 확신을 얻었다고 해야 하나. 전통을 중히 여기면서도 진보적인 독일 문화를 흡수하면서 다른 예술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베니스비엔날레를 매번 보고, 뮌헨의 미술관들을 다니며 무엇이 좋은지 알아가게 됐다. 

2004년에 아버지 친구 부부가 독일 뮌헨 근처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 사셔서 자주 방문했다. 그 때 마음 맞는 갤러리 주인을 만나 개인전을 가지고, 2006년에는 뮌헨 문화부 초청으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뮌헨의 국제 예술가의 집 빌라 발드베르타(Villa Waldberta) 레지던시에서 2006년 6개월 정도 작업을 했다. 스위스와도 근접한 남부 외곽에 위치한 레지던시였는데, 정문에서 내부까지 5분 걸어가야 했고 앞에는 큰 호수도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거기서 음악가 등 예술가들이 다 모였는데, 그게 너무 천국 같았다. 풍광도 좋고 햇빛도 잘 드는 것이 마치 텔레토비 동산 같았다. (웃음) 빛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고 서양화를 많이 보다 보니 ‘누가 수묵화만 하라고 정해준 것도 아닌데 이것만 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원래의 나를 찾아간 것 같다. 

또, 다중매체를 사용하는 내 작업에서 경우에 따라 지필묵(紙筆墨)을 온전히 다 가져가고 있지는 않지만, ‘필’(筆)은 중추적 역할을 한다. 그 ‘필’의 전통이 독일 회화에 있다. 1950년대 독일 추상에서 많이 볼 수 있기에, 여기서 오는 동질감도 있다.

- 앞으로 계획된 전시가 있다면.

해외 전시로 확장하고 싶다. 미국과 유럽 쪽으로 진출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이번 전시가 나에게 좋은 프레젠테이션이었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고 시공간적인 확장을 해나가려고 한다.

▲움직이는 思惟 큰 새 “붕(鵬)”, Video screen shot, 3분 15초, 2003
▲움직이는 思惟 큰 새 “붕(鵬)”, Video screen shot, 3분 15초, 2003

- 앞으로의 변화 지점이나 지향점이 있다면 무엇인지.

표범이 털갈이를 할 때 완전히 갈아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화려하고 아름답다고 한다. 웬만한 변화로는 아름다워질 수 없는 것이다. 자유나 새로움을 희구하며 작업을 해왔는데 정말 그랬을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털 관리를 잘하는 표범은 가을철이 되면 모든 털이 털갈이를 말끔하게 함으로써 무늬가 더욱 선명하고 아름다워진다고 한다. 이로부터 ‘표변(豹變 표범 표, 변할 변)’이라는 말이 생겼다. 표범이 완전한 털갈이를 하여 더욱 아름다운 무늬를 갖듯이 사람이 허물을 고쳐 말과 행동이 뚜렷하게 달라지고 착해지는 것을 이르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주역(周易) 혁괘(革卦)의 효사(爻辭)에는 “군자표변(君子豹變), 소인혁면(小人革面)”이라는 말이 있다. “군자는 표변하고 소인은 낯만 고친다”는 뜻이다. ‘혁’은 흔히 ‘가죽 혁’이라고 훈독하는데 동물의 완전한 털갈이에 대한 비유로부터 변혁(變革), 혁신(革新), 혁명(革命) 등의 단어가 파생되었다. 2024.09.15.

- 홍지윤 작가의 2024 작업일기 中 '표범지향' -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폭탄 머리도 하고, 보헤미안 스타일을 하는 등 새로운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시기가 있는데, 나이가 들면서 변혁이나 혁명이라는 말들이 책임감이 따르는 말임을 알게 됐고 조심성이 생겼다. 그런데 미술은 항상 새로워야 하고 남이 하지 않은 걸 해야 하기 때문에, 조심성이 생기면 이러한 것들을 놓쳐버릴 수 있다는 것이 딜레마다. 

▲사유의 풍경 Thoughtful Scenary,162x130cm,ink & stone powder on fabric, 2000
▲사유의 풍경 Thoughtful Scenary,162x130cm,ink & stone powder on fabric, 2000

내 작품들은 팔색조의 형태로 많은 것들을 담고자 하는데, 최근에 많이 변화되는 시점인 것 같다. 경로를 확장하는 것도 좋지만 좋은 생각을 가지고 수양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갱신, 저항, 선구 이들은 새로움과 자유에 관한 것이고, 이제까지 독창적인 내 실험 작업을 대변해왔다. 최근의 대상은 본질의 ‘나’다. 선명한 현존을 바라보며 예술의 기쁨과 오랜 정의인 ‘사랑’과 ‘희망’에 다가가고자 한다. 외피와 표제의 내면에서 꿈틀대는 다듬어 지지 않은 깊은 곳의 나를 보려고 한다. 원래의 그림을 좋아하던 내가 되어 궁극의 자유를 찾고자 한다. 무엇보다 나를 위로하며. 보편적 언어로.

동양에서는 선(善)의 가치를 중시하는데, 미술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대한 답 역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멋 부리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내 속에서만 나오는 말만 하고자 한다. 대부분이 그렇지 않기에 외로움이 따르고, 어려운 일이기에 어떻게 해나갈지 생각을 많이 한다. 비워나가면서 단순하게 생각하려고 한다. 스님처럼 비우겠다는 것이 아니라 표범의 털갈이와 같은 변혁처럼 비우고자 한다. 그 변혁의 목적은 예술가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선을 향한 것이라 말하고 싶다. 

-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동・서양화를 떠나 나의 미학을 보이고 싶다. 오늘날 동・서양화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보는데, 신작은 그 구분을 더욱 흩트렸다. 

규정할 수 없는 작가가 되고 싶다. 원래 예술은 혼돈 속에서 나오는 것이며 답을 가지는 순간 개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