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평창동에 있는 가나아트센터에서 고 하인두 작가를 기리는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주최의 비평 세미나가 열렸다. 마침 전시장에는 하인두전이 열리고 있어서 둘러봤다. 소품들 위주의 전시지만 알차보였고, 진귀한 아카이브 자료들도 전시되고 있어 카메라에 담았다. 작지만 주옥같은 하인두의 작품들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재음미돼야 할 작품들임에 분명해 보였다.
하인두(1930-1989)는 박서보, 김창열과 함께 1950년대 말엽에 한국 미술계를 강타한 비정형 회화(앵포르멜/Informel) 운동의 기수였다. 그들은 <현대미술가협회>(1957년 창립)를 결성하고 최신 사조인 비정형 회화운동을 펼쳤다. 그 뒤를 후배세대인 <60년미술가헙회>와 <벽전> 그룹이 이었다. 당시 화단의 주류인 국전의 권위와 아성에 도전한 반(反)국전파의 전위(avant-garde) 운동이었다. 윤명로(60년미술가협회)와 김형대(벽전)로 대표되는 서울미대 출신 작가들의 국전에 대한 반란. 이 두 그룹전은 전시장의 실내 공간이 아닌 덕수궁 돌담벽에서 이루어졌다. 보수(국전)와 혁신(앵포르멜 기반의 현대미협, 60년미협, 벽전) 간의 대혈전에서 다수의 용장들이 출현했다.
김창열, 하인두, 김서봉 등 주로 서울미대 출신의 작가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현대미술가협회의 출범과정에서 창립전(1957)에 박서보의 이름이 빠진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서보(1931-2023)는 반국전선언의 효시가 되는 [4인전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 박서보/동방문화회관,1956)을 통해 젊은 화가들 사이에서 그 존재감이 익히 알려져 있었다. 전후 미술계의 척박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피튀기는 싸움이 이어졌다. 국전 작가가 아니면 취직이 안 되던 시절이었다. 전위(avant-garde)가 척후조를 의미하는 군사용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용인한다면, 당시 이들이 벌인 행위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박서보가 현대미협가협회에 가입한 것은 2회전이었다. 작지만 다부진 몸집에 부리부리한 눈으로 상징되는 저돌적인 성격의 박서보의 등장은 곧 홍대파의 고지 탈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4인전> 멤버 중 김영환과 김충선, 문우식은 같은 홍대 출신으로 이미 현대미술가협회에 가입한 상태였다. 일종의 선발대였던 셈. 한국의 전위운동사 측면에서 볼 때, 1950-70년대 공간에서 서울미대 출신의 작가들은 초기에는 우세한 위치를 점하였으나 시간이 흐를 수록 열세에 몰리게 된다. 박서보의 현대미술가협회 가입 승인은 서울미대파의 패착이었다. 헤겔이 말한, 나폴레옹으로 대변되는 '이성의 간계'로서의 박서보의 등장은 곧 홍대파의 고지탈환을 위한 나팔소리였던 것이다.
1970년 이후 박서보의 주된 활동공간은 미협(한국미술협회)이었다. 박서보는 1970년부터 77년까지 미협 국제담당 부이사장을, 77년부터 80년까지 이사장을 지냈다. 국전은 수상을 둘러싼 잇단 부정으로 권위가 실추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국제전이 언론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파리비엔날레, 상파울루비엔날레, 카뉴국제회화제 등이 작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당시만 해도 비엔날레의 꽃인 베니스비엔날레는 한국에서 인지도가 낮았다. 한국은 1986년에 이르러 베니스비엔날레에 처음 참가했다. 비엔날레 참여작가 선정권을 미협 국제담당분과위원회가 쥐고 있었는데 그 수장이 바로 박서보였던 것. 실로 막강한 권한이었다.
막역한 친구 사이였던 하인두와 박서보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1980년의 미협 이사장 선거였다. 하인두는 재선을 노린 박서보를 외면하고 상대편 후보인 조각가 김영중의 편이 돼 선거운동을 벌였다. 결과는 같은 홍대출신인 김영중 후보의 승리였다. 그것은 곧 하인두의 승리이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에 조짐을 나타내 60년대 후반에 이르러 본격화된 한국의 실험내지 전위미술은 1967년 홍대출신의 무, 신전, 오리진 그룹의 연합체인 [청년작가연립전]을 시발로 한다. 탈(脫)평면을 주장한 그들은 당시만 해도 최신 매체인 입체, 설치, 해프닝을 받아들여 스승 세대의 앵포르멜 미학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앵포르멜은 이미 쇠잔한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뒤를 이어 한국 전위.실험미술의 선봉부대인 <AG>, <ST>, <신체제>, <제4집단>, <에스프리>가 결성되었다.
70년대 단색화의 등장은 50년대 화단을 주름잡았던 앵포르멜 세대의 고지탈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박서보가 주도한 단색화 운동은 결국 그 반대급부로 오방색에 기초한 색채추상과 구상회화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박서보는 막강한 화단 권력과 미술에 대한 자신의 견해로 그리하였다. 박서보의 공과가 엇갈리는 대목이다.
2019년 11월에 평창동의 가나아트센터에서 하인두 작고 30주년전이 열렸다. 하인두의 유작 10여 점과 미망인인 류민자의 작품을 소개한 소박한 전시였다. 그보다 한달 앞선 11월 8일에는 미술사가 김경연과 신수경이 쓴 <화가 하인두: 한국 추상미술의 큰 자취>(혜화1117)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나는 서울아트가이드 2019년 12월호 칼럼에 '하인두의 재평가와 한국 추상회화의 미래'라는 제목의 글을 써 단색화의 대표작가인 박서보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초대전에 걸맞는 하인두의 회고전을 열 것을 촉구했다.
그래야 박생광과 함께 전통 오방색에 기초한 색채추상의 거목인 하인두의 업적에 대한 국가차원의 예의가 될 것이다. 그렇게 해야 "단색과 다색을 둘러싼 거장들의 영향력이 미래의 화단에 미칠 자장(磁場)의 조화와 파급력의 편차가 균형"을 이룰 것이라 전망했다.
그 후 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하인두 예술의 재평가는 전혀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한국미술평론가협회의 이번 세미나 소식을 들었다. 부디 이번 세미나를 계기로 국립현대미술관의 하인두 회고전 논의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무려 70 여년간 화업을 통해 열정적인 삶을 산 박서보는 2023년 93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하인두보다 무려 33년이나 더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