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케치] 전통과 현대를 연결하는 구멍…이슬기 《삼삼》
[현장스케치] 전통과 현대를 연결하는 구멍…이슬기 《삼삼》
  • 김연신 기자
  • 승인 2024.06.27 17: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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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7~8.4, 갤러리현대
“단순미는 뼈대만 남긴 ‘에센셜(essential)’에서 온다”
전통과 현대를 연결하는 ‘구멍’
단청 장인들과의 협업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전통공예 장인과의 협업을 통해 탄생한 현대미술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전시가 열렸다. 갤러리현대는 이슬기의 개인전 《삼삼》을 오늘(27일)부터 오는 8월 4일까지 개최한다. 전시가 개막한 오늘, 갤러리현대 신관에서는 기자간담회를 통해 이슬기 작가의 작품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갤러리현대 신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 중인 이슬기 작가.
▲갤러리현대 신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 중인 이슬기 작가.

기자간담회에서 작가는 "단순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뼈대만 남기고 가는듯 한 '에센셜(essential)'이다"라고 답했다. 이슬기의 작품은 때로는 가늘고 때로는 단단한 뼈대로 공간을 새롭게 직조해낸다. 이슬기의 방식으로 살구빛 새 옷을 입고 재탄생한 갤러리현대의 전시공간은 노골적이면서도 은근하게 뼈대를 드러내고 있다. 

이슬기는 1992년 프랑스 생활을 시작으로, 세계 여러나라의 민속적 요소와 일상적 사물, 언어를 기하학적 패턴, 선명한 색채로 표현한 조각과 설치 작품을 통해 독창적인 시선과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 세계를 구축해 왔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면서도 특유의 조형성과 색채가 돋보이는 그의 작업들은 자연과 인류의 기원, 다양한 문화를 기반으로 제작된다. 작가는 한국의 단청과 문살, 통영의 누비이불, 멕시코의 지방 전통 바구니 조합 등 세계 각지의 장인들과 협업을 통해 전통이라는 틀 속에서 시대와 장인의 손길에 변화하는 전통과 언어, 문화를 소환한다. 여기에 공예의 조형 언어와 더불어 이슬기만의 시선과 해석이 더해져 고정된 의미와 맥락을 입체화 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작품이 탄생한다. 

▲살구빛 작품 앞에 살구가 세 개 놓여있다.
▲살구빛 작품 앞에 살구가 세 개 놓여있다.

전시 제목인 《삼삼》은 “외형이 그럴듯하다”, “눈 앞에 보이는 듯 또렷하다” 등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변주되어 사용되는 형용사 ‘삼삼하다’에서 착안했다. 작업의 제목이나 오브제 또는 지시 대상이 지닌 전형적인 의미에서 벗어나, 의미와 감각을 다차원적으로 개방하고 작품에 생명력을 부여하여 관람자에게 인식과 감각의 전환을 선사하는 이슬기 작가의 작업 세계를 은유한다. 

이번 전시는 이슬기 작가가 한국에 몇 개월 동안 체류하며 고안해낸 〈현판프로젝트〉를 중심으로 꾸준히 해온 〈이불프로젝트 : U〉의 새로운 이불 작품들, 대규모 설치 작업을 재편성한 〈느린 물〉, 갤러리현대 전 층을 가로지르는 〈모시 단청〉 벽화 작업 안에 설치된 〈쿤다리〉, 〈K〉, 〈바가텔〉 등 30여 점을 선보인다.

▲이슬기, 바가텔 1, 2020, 참나무, 못, 구슬, 120 x 60 x 6 cm
▲이슬기, 바가텔 1, 2020, 참나무, 못, 구슬, 120 x 60 x 6 cm

‘구멍’ 사이로 드는 빛

기자간담회에서 작가는 이번 전시의 주요한 키워드로 ‘구멍’을 거듭 강조했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소개되는 신작인 〈현판프로젝트〉에 대해 작가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갤러리현대라는 공간에 구멍을 뚫어 빛을 가져오고자 했다"라고 설명한다. <현판프로젝트>는 도안화된 의성어나 의태어를 나무 널빤지 위에 새겨 단어의 의미와 외형의 연결고리를 해학적으로 형상화한 작업이다. 

작가는 가상의 구멍을 통해 전시장에 노을 빛이 스며드는 장면을 상상하며 전시를 구성했다고 한다. 작가가 말하는 ‘구멍’은 다양한 형태와 의미를 담고 있다. 문이 만드는 밖과 안을 연결하는 큰 구멍부터 나무 문살의 격자 모양에서 자연스레 형성되는 작은 구멍, 전시장 벽면에 직조된 모시 단청 사이사이 등이다. 전시장 곳곳의 벽면에 도색 된 살구색은 노을 빛을 화이트 큐브로 전달하는 구멍 역할을 한다. 

▲이슬기, 현판프로젝트 쿵쿵, 2024, 홍송에 단청, 140 x 180 x 4 cm
▲이슬기, 현판프로젝트 쿵쿵, 2024, 홍송에 단청, 140 x 180 x 4 cm

작가는 사람만큼 거대한 덕수궁 대한문 현판에 대한 의문을 바탕으로 나무를 재료로 선택하고 태초의 단어가 무엇일지를 탐구하게 되었다. 이슬기 작가는 〈현판프로젝트〉를 통해 2019년부터 탐구해 온 ‘문’이라는 주제를 확장해 나간다. 문은 ‘들어가는 곳’, ‘나가는 곳’, 그리고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라는 세 가지 공간을 암시함으로써 각기 다른 관점에서 하나의 사건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는 같은 작품이라도 관람객의 위치나 시선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이는 '라쇼몽(羅生門, Rashomon) 현상'과 같이 동일한 사건이라도 입장에 따라 본질을 다르게 인식하는 현상과 유사하다.

이처럼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각기 다른 시각에서의 해석이 어떻게 사물의 본질을 다르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작가는 "한국어의 의성어는 매우 그래픽적이다. ‘쿵쿵’, ‘쾅쾅’, ‘꿍꿍’ 등의 단어는 모두 ‘삼삼한’ 장면을 생성한다."라고 설명한다. 작가가 현판에 새긴 단어는 특정한 의미가 없는 의성어로, 과거 중요한 이름이 새겨졌던 현판과는 대조적이다. 

▲이슬기, 13332244, 2020, 홍송, 212 x 77.5 x 7.5 cm (each)
▲이슬기, 13332244, 2020, 홍송, 212 x 77.5 x 7.5 cm (each)

전통공예 장인과의 협업

〈모시 단청〉은 전시장의 세 개 층을 가로지르는 벽화로, ‘긋기단청’이라는 전통 기법을 사용해 단청 장인과의 협업을 통해 제작되었다. 이 벽화는 마치 직물의 직조 방식을 연상시키는 가로와 세로선이 조화롭게 짜인 작품으로, 전시장을 둘러보며 감상하다 보면 지하, 1층, 2층에 놓인 작업들이 하나의 완전한 작품으로 연결되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전시장 지하와 1층 사이의 공간에 설치된 작업인 〈느린 물〉 또한 장인들과의 협업을 통해 탄생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고대 로마의 ‘빌라 디 리비아(Villa de Livia)’의 프레스코화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문살과 단청 장인들과의 협업을 통해 한국의 전통 기법으로 제작됐다. 작품의 부유하는 격자 무늬는 전시장 바닥에 수많은 구멍이 담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문살 하나하나에 입혀진 다채로운 색상은 관람객들이 전시 공간을 거닐며 여러 각도로 감상하도록 유도한다. 이 작품은 세련되고 아름다운 기하학적 문양을 통해 물의 움직임과 일렁이며 반사되는 빛을 표현한 것으로, 관람객들에게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마치 수면 아래에 있는 듯한 공감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이슬기, 쿤다리 거미 II, 2021, 스테인리스 스틸에 우레탄 도장, 180 x 200 x 100 cm
▲이슬기, 쿤다리 거미 II, 2021, 스테인리스 스틸에 우레탄 도장, 180 x 200 x 100 cm

전시장 곳곳에는 선사 시대 및 신석기 시대 유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여성 신체의 표현을 모티프로 한 〈쿤다리〉 연작을 만나볼 수 있다. '쿤다리'는 ‘굽은 다리’를 빠르게 발음한 데서 착안한 제목으로, 거미와 개구리를 원초적인 모양으로 해석한 뒤 자립시킨 작품이다. 〈쿤다리〉 연작은 인류의 여러 민속과 토착 문화에서 나타나는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조형적 언어로 접근한 작업이다. 고대 여성의 신체를 형상화한 토착 조형물의 원형을 모티브로 하여 기호와 도형 그리고 도식을 통해 재해석했다. 동서양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해 온 여성의 신체나 생식기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 구체적인 묘사와 형상이 기하학적이며 단순한 형태로 변형되고, 작가의 특유의 유머러스한 비틀기가 가미됐다. 

갤러리현대 관계자는 "이슬기의 《삼삼》 전은 세상에서 모든 것이 하나의 의미나 분류로 규정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라며, "모든 것을 수치화 하고 편의에 의해 쉽게 구분하여 단정짓는 현대 사회에서, 이번 전시는 하나의 작품이자 커다란 ‘구멍’으로서 우리의 굳어 있는 인식과 감각을 활기차게 깨워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