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를 극복하지 않고는 역사에 남을 수 없다”
도장쟁이·전각가 구분하는 건 문자학에 대한 인식
스스로 감동이 있는 글 쓰고자 해
앞으로 한문서예 쇠퇴하고, 한글서예 시대 열릴 것
한글 서예 진작 위해 한글 배려 필요해
[서울문화투데이 김연신 기자] 동양의 ‘일필휘지(一筆揮之)’ 퍼포먼스가 세계 미술시장에서 주목받던 때가 있었다. 순간의 영감이 작품을 완성하듯 막힘없이 붓질 한번으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남기는 신비로운 인상 때문이다.
그러나 서예가 하석 박원규 선생은 일필휘지 하지 않는다. 예술의 ‘예(藝)’의 의미 중 ‘계속해서 닦는다’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그는 일필휘지보다는 마천철연(磨穿鐵硯)이나 여필퇴산(如筆堆山)이 어울리는 서예가다.

그에게 일필휘지는 퍼포먼스에 불과하다. 글을 쓰는 매 과정은 일필휘지일지 몰라도, 갈고 닦는 것에서 무엇인가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씨를 쓸 때 마음에 들 때까지 수백 번을 다시 쓰는 과정은 그야말로 수양의 과정이다.
한번 쓴 글씨를 고쳐 쓰는 개칠(改漆)은 최대 금기로, 서예의 모든 과정은 즉 완성이기도 하다. 먹을 갈아 먹물을 만들고, 점과 선, 획의 굵거나 가는 정도, 붓누름의 강하거나 약함 또는 가볍거나 무거움, 붓놀림의 빠르거나 느림, 먹의 짙거나 묽음, 문자의 비례 균형 등을 고려하며 한 자 한 자 써내려가는 과정에는 올곧은 선비정신이 깃들어야 한다.
하석 선생의 서실에 빼곡하니 꽂혀있는 서적들은 이를 대변한다. 학부 시절 법학을 전공했던 선생은 글을 쓰기로 마음 먹은 이후 국문학 석사 과정에 진학, 석사 졸업 이후에도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독옹 이대목 선생께 전각을, 긍둔 송창, 월당 홍진표, 지산 장재한 선생 등의 한학자들에게 한문을 배웠다.
그는 요즘도 매일 아침 번역된 텍스트를 보고 역으로 한문으로 옮겨 쓰는 식으로 한문 공부를 하고 있다. 대조해서 완벽히 외워질 때까지 하다 보니, 종이가 수북하게 쌓였다. 법고창신의 정신을 중시하기에, 작품이나 전시에 있어 늘 전통을 지키면서 새로운 것을 보여줄 궁리를 하고 있다. 지난 9월, 대만 대만 타오위안시립미술관(TMoFA)에서는 ‘한글 서예의 변천에 관하여’를 주제로 한국 근현대 서예의 독창성을 알리는 강연도 진행했다.
끝없는 배움과 정진 끝에 확장된 하석의 작품 세계는 한자와 한글, 전각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2020년에 열린 초대개인전 《하하옹치언(何何翁卮言)》에서는 광개토대왕비체, 금문체, 갑골문체, 한간체, 특히 현재 세계에서 유일하게 사용되고 있는 상형문자인 동파문자체와 이 문자들이 한 작품에 결합된 작품들을 전시했다. 갑골문, 금문 등 전서 작품 뿐만 아니라 광개토대왕릉비체 등 추사 이후에 발견된 글씨들을 연구하고 써내려가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추사 김정희를 존경하는 동시에 ‘추사가 가지 않은 길’을 가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그는 글씨는 곧 사람이며, 자기를 쓰는 행위라고 말한다. 실제로 과거 붓글씨는 군자의 덕목이자, 심성을 바르게 하는 수신의 수단이었다. 단순한 시각적인 미를 넘어서 쓰는 이의 사상과 이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져왔기에, 안중근이나 김구의 작품은 높은 가치를 지닌다.
요즘과 같은 혼탁한 시대, 인내의 과정에 따르는 순일한 정신은 서예를 통해서 구해야하는 것일지 모른다. 하석 박원규 선생을 만나, 오늘날의 서예와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들어보았다.

- 2010년 12월 『박원규 서예를 말하다』가 발간된지 13년만인 작년 12월, 『박원규 전각을 말하다』가 발간되어 현재 박원규 대담집 세트로 판매되고 있다. 그 다음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작품을 하는 사람이 책을 쓰고 있으면 국가적 손실이다’라고 생각을 했지만 대담이라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 혹은 내후년을 목표로 『추사를 말하다』를 쓰려고 한다. 지금까지 나온 추사 김정희 관련 서적은 대부분 읽고 있는데, 서예가가 추사 김정희에 대해 쓴 책은 아직까지 없는 것으로 안다. 대부분이 미술사 연구자들이지, 나처럼 글씨를 평생 해온 사람들은 없다.
- 쉽지 않은 작업일 듯 하다.
추사의 가계나 역사를 다룬 건 많지만, 나는 작품만 다루려고 한다. 도판을 위해 전부 촬영하고 싶은데, 진짜를 추리기가 쉽지 않다.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도 전부 진품은 아니다. 그러나 추사의 작품에는 고유의 아우라가 있어, 1초만에 알아볼 수 있다.
인장 역시 진품을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된다. 명가들의 것은 다 측관이 되어 있다. 추사 선생 활동 시기가 중국의 전각 전성기라서, 좋은 명가들이 하면 측관이 다 있다. 측관이 없으면 전각가가 만든 전각이 아니라 도장이다.
- 추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듯하다. 제 2의 추사가 될 법도 하다.
추사를 극복하지 않고는 역사에 남을 수 없다. 중학교만 나와도 다 아는 게 추사 선생이 아닌가. 그래서 추사 선생이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고 한다. 그분이 했던 걸 한다면 얼마나 견주어질까. 그렇기에 새로운 것을 해야 하고, 새로운 것으로 평가를 받고 싶다.
추사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발굴되지 않은 것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한간, 갑골문, 추간 등은 1900년대 초에 발굴됐다. 광개토대왕릉비 역시 추사 사망 이후에 재발굴됐다.

- 1984년에 첫 번째 작품집 『계해집』을 시작으로 5년간 매년 작품집을 출간했으며, 그 가운데 네 권은 전각집이다. 한국전각협회 제12~13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중요한 결정에 쓰이는 인장은 사용인의 품격과 상통하는데, 작품의 수준은 어떻게 구별하는지.
도장쟁이와 전각가를 구분하는 건 ‘문자학에 대한 인식의 유무’다. 한마디로, 문자학이 뭔지 알면 전각가고, 그걸 모르면 도장쟁이라는 것이다. 문자란 인간 사이의 약속이기에 세상에 본인만 아는 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인만 아는 대로 멋대로 새겨서는 안 되고, 문자학을 알아야한다.
또, 전각가라면 필히 측관을 새겨야 한다. 측관을 통해 인장의 품격이 드러난다. 예를 들자면 여기 이 인장은 네 군데 전각이 있는데, 전각이 왼쪽에 가도록 찍어야 한다. 이게 전각가들의 약속이다.
- “글자는 생각, 글씨는 마음을 전달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좀 더 구체적인 의미를 듣고 싶다.
한문을 모르면서 쓰면 그저 필경사인 것이다. 이 길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서 그때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스스로가 감동이 있는 글을 쓰고자 해서 서정적인 아름다운 시문보다는 경서, 경구를 쓰고 있다. 내 자신을 곧추세우는, 귀감이 될 만한 글을 쓰고자 한다. 풍월을 읊는 서정적인 음주시 보다는 인생사에 길라잡이가 되는 경구를 선호해서 그런 것 같다.
-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광개토대왕릉비체’를 쓰고 있다고 해서 흥미로웠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장수왕이 414년(장수왕 3년), 아버지이자 19대 태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찬양하고 추모하기 위해 능묘 곁에 세운 비석이다. 한글이 1443년 창제되어 1446년에 반포된 걸 고려하면 광개토대왕릉비와는 약 1000년의 간극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 천 년의 간극이 존재함에도 두 서체가 몹시 닮아있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서체는 진솔하고 기교가 없다. 졸박미가 탁월한데, 그러면서도 글자가 두텁다. 투박하고 꾸밈없고 질박한 것이, 이게 바로 우리 민족의 서체가 아닌가 싶었다.
비석에 쓰인 글씨가 보통 아무리 커도 3센치에서 5센치 사이의 크기인데, 광개토대왕릉비는 큰 글자가 12센치에서 16센치에 이른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망하지 않은 민족이 얼마나 있을까.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고구려인의 기상이 어땠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누가 썼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런 미감은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 2020년 JCC아트센터에서 열린 전시 《하하옹치언》에서 전·예·해·행·초서 등 틀에 박힌 오체를 훌쩍 넘어선 작품들을 선보였다. 중국 나시족이 쓰는 상형문자인 동파문자체는 특히 다채로운 색이 돋보여 그림과 같이 느껴졌다.
중국의 나시족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상형문자를 공식적으로 쓰는 민족이다. 그 상형문자가 바로 동파문자다. 독특한 점은 글씨에 채색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작품을 보면 알겠지만 글씨가 색채를 입어 울긋불긋한 빛을 낸다. 전시에 선보인 작품도 의미 없이 색을 쓴 것이 아니라 동파문자이기 때문에 채색을 했다.
- 요즘 ‘한글서예’가 화두에 오르고 있다. ‘한글서예’라는 시대적 요구의 당위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앞으로 한문서예는 쇠퇴하고, 한글서예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전망한다.
한글의 역사가 약 600년 밖에 되지 않는데, 한문은 3천년이다. 오랜 시간동안 발전해온 만큼 수많은 서체가 존재한다. 전서(篆書), 예서(隸書), 초서(草書) 등 한문의 다양한 획의 구사를 응용해 한글을 아름답게 쓰는 것이 나의 목표다.
작품집이 서른 권정도 나와 있는데, 그 중 두 권은 한글 작품으로만 이루어져있다. 늘 우리 모국 문자를 어떻게 아름답게 형상화할지 고민하고 있다. 중국 서체 필법을 다양하게 익힌 다음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필법을 한글서예에 녹여내고 싶다. 너무 번듯하면 안 되고, 생소하되 멋이 있어야하는 것이 필요충분조건이다. 창신이 중요하지만 격조가 없으면 안 되지 않나.
한글 서예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뜻도 틀렸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한문을 알아도 어디 가서 무슨 위세가 되는가. 내가 한문을 배운 것도 내가 모르지 않고, 답답하지 않기 위해서지 내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 “현재 (광화문)현판의 문양은 글씨로서 어디 내놓기 너무 부끄럽다”라며, 과거 훈련대장이 쓴 광화문 현판을 다시 쓰는 것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이번 국감에서도 한글 현판 교체가 거론됐고, 한글 현판을 쓸 경우 선생이 추천되고 있기도 하다. 현판 교체에 대한 선생의 견해를 듣고 싶다.
당연히 한글로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은 한글, 뒤는 한문으로 쓴다던가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시대가 한문 시대도 아니고, 한문으로만 써 둔다면 여기가 중국인지 일본인지 알 턱이 없을 것이다. 최소한 앞면이라도 나는 꼭 한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본 글씨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뒷면에 걸어도 되지 않는가.

- 지난해 전북서예비엔날레 심사위원상은 한글서예로 선정되기도 했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다.
전북서예 시상 당시 30여 년이 지나도 한글에서 대상이 안 나온 것이 안타까워 한글 서예 중 수상작을 뽑자는 게 송하진 이사장의 뜻이었다. 심사에 들어가기 앞서, 금년에는 한글 서예 중에서도 흘림이나 고체 말고, 제일 어려운 궁체 정자에서 뽑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심사 들어가기 전에 원칙을 정한 것이다. 수상자는 여든이 넘어가는 여성분이셨다.
국제 비엔날레다보니 그동안 주종이 한문이었고 한글서예는 출품작 수가 현저히 적었다. 이렇게 큰 행사에서 한글서예의 비중을 높여놔야 한글서예가 더 주목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앞으로도 한글서예를 진작할만한 무언가가, 또 한글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젊은층들은 서예보다는 ‘캘리그라피’에 관심을 가진다고 들었다.
그것 역시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이름은 중요하지 않고, 붓을 가지고 한글을 많이 쓰는 데 의미가 있다. 거기서 더 나아가 글을 보다 제대로 쓰고자 한다면 서예도 배울 수 있는 것이지, 서예와 캘리그라피를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 국내 서예 개인전 최초로 입장료가 있었다.
아이돌 콘서트 티켓은 몇 십 만원에 이르는데, 내 전시도 최소한 현대미술관나 국립박물관 입장료 정도는 받아야하지 않을까 싶었다. 대신 입장료를 받으려면 차별화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규모의 ‘맘모스 전시’를 열었다.
스스로 ‘뭘 해서 입장료를 받을지’ 질문을 던졌다. 구태의연한 것들을 선보이며 입장료를 받을 수 없진 않은가. 표구사에서 쓰는 비단 대신 삼베, 모시 등을 도입한다던가 하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고 싶었다.
마지막 전시는 입장료가 만 원이었다. 당시 대관료만 8천 만 원이었는데, 한 달간의 전시를 마치며 돈 내고 하는 전시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전시 기간이 3개월 이상인 초대전에만 응하고 있다. 그러한 조건이 맞는 전시를 네 번 정도 했다.

- 강암 송성용 선생 문하로 입문해 서예를 배웠다. 붓을 잡고, 스승을 만나게 된 일화가 궁금하다.
실은 송성용 선생보다 선생의 자제였던 송하진 전 전북도지사와의 인연이 먼저였다.
고등학생 때 근정 조두현 선생에게 한문을 배웠다. 조두현 선생을 찾아갔는데, 웬 중학생이 손에 흰 봉투를 들고 선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소년이 바로 송하진이었다.
소년에게 손에 든 게 무엇인지 물었더니, 아버지 글씨라고 하더라. 봉투를 가져가 글을 보고 아버지가 누군지 물었더니 강암 선생이라고 답해왔다. 그렇게 송하진 전 지사와 친분이 생기고, 후에 대학에 들어가서 강암 선생 문하에 들어갔다.
강암 선생에게 배우게 된 것은 아버지 덕도 있다. 아버지는 늘 스승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며, “최고한테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호랑이를 그리려다 잘못 그리면 고양이라도 되지만, 처음부터 고양이를 그리려 하면 쓰겠냐”라며, (강습료가)비싼 것에는 전부 이유가 있다고 말하시던 기억이 난다. (웃음)
- 학부 시절 전공은 법학이었는데, 이후 국문학 석사 과정에 진학했다. 석사 졸업 이후에는 독옹 이대목 선생께 전각을, 긍둔 송창, 월당 홍진표, 지산 장재한 선생 등의 한학자들에게 한문을 배웠다. 글과 관련된 건 전부 욕심이 났던 모양이다.
법학과는 맞지 않았던 것 같다. 법학과 재학 당시 교수님들을 찾아뵙고 “이 길은 제게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래도 강의는 빠지지 않고 열심히 들었더니 성적은 어찌저찌 잘 나왔던 것 같다. (웃음)
한문은 긍둔 선생에게 처음 배웠고, 총 세 분을 모셨다. 경학을 전공하신 지산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던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선생 문하에서 배우면서 20년간 지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선생이 강의 시간을 잊었을 때도 비가 오는 날 그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 다음부터는 그냥 찾아가도 선생께서 ‘아차, 오늘이 하석 강의 날이었던가’하며 긴장을 하셨다.

- 현재 작품 활동과 후학 지도에 몰두하고 있다.
이제까지 서실 간판을 붙여본 적이 없는데, 가르치는 걸 위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늘 내가 배우러 다니지, 가르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지금의 지도 방식도 쓰는 건 각자 쓰고, 획을 봐주고 있다. 안목 지도라고 해야 하나.(웃음) 대부분 고전을 가르치지, 내 글씨를 가르치고 있지는 않다.
글씨의 격조는 혼자서는 높이기 어렵다. 글씨는 직접 쓰되, 길라잡이를 할 선생이 필요하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쓴 것을 보면 이름을 안 써도 누구의 글씨인지 다 알 수 있다. 각자의 독특한 느낌이 있다. 본인 글씨를 쓰되 격조 있고 우아하게 쓸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선생의 역할이다.
- 오늘날의 서예는 무엇인지. 젊은 세대에게 서예의 매력을 소개한다면.
서예는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 중 하나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5분을 얘기해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듯이 글씨도 결국 말과 문장과 같이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이다. 글씨는 곧 사람이며, 자기를 쓰는 행위다.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서예 올림피아드를 펼치는 것이 꿈”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앞으로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국제 서예 올림피아드와 같은 전시를 열고 싶다. 한중일 뿐만 아니라 제 3의 나라들에서도 대표들이 작품을 출품하도록 하는 것이다. MoMA,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 뉴욕의 미술관들을 둘러봤는데, 나는 구겐하임이 내 작품 성향과 잘 맞는 것 같고 제일 맘에 들더라. (웃음) 조금이라도 이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한테는 내 꿈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한시도 쉬지 않고 자기 세계의 새로운 경지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서예가로 기억되고 싶다. 요즘 매일 아침 번역된 텍스트를 보고 역으로 한문으로 옮겨 쓰는 식으로 한문 공부를 하고 있다. 대조해서 완벽히 외워질 때까지 하다 보니, 종이가 수북하게 쌓였다.
어떠한 예술적 성취를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석이란 사람은 자기 세계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 사람이다”, 이렇게 기억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