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읽어주는 아름다운 우리 詩>사북-정정하
<시인이 읽어주는 아름다운 우리 詩>사북-정정하
  • 공광규 시인
  • 승인 2015.05.18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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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복 
                                                  

                                   정정하 시인(1955~)

쉽게 벗어 버릴 수 없는
발가락이 나오는 양말 같은 곳
탄가루 묻은 돈으로 먹거리를 바꾸고
내 몸을 내놓지 않고 무엇을 얻느냐고
아버지는 출렁이던 꿈을 내 걸었다
지하 수천 미터에서 석탄을 꺼내오던
거대한 몸뚱이를 사람들은 막장인생이라 불렀다

고향을 생각했던 우체통과
담벼락에 동시상영 영화 포스터가
다정하게 어울려 나붙을 때쯤이면
오래된 전파사에서 스피커를 통해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흩날렸다

한 때 개도 돈을 물고 다녔다는,
막장, 행간 행간이 역사였다
고생을 포기하면 절망이었던
청춘을 포기한 아버지 이름은 산업전사
주머니에 접어 넣었다 다시 꺼내보는
탄가루 같은 아버지의 그 봄날은.

정정하 시의 매력은 현재의 삶의 바탕이 된 서정적 과거를 기억하고 회상하고 회감하는 참신한 비유에 있다. 그의 서정적 과거는 거의 고향에 토대를 두고 있다. 고향에서 가졌던 성장기의 체험은 시의 원천이자 흐르는 샘물이다. 아울러 고향에서 체험적 삶은 과거이기도 하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먼 미래이기도 하다. 그래서 누구나 고향을 버릴 수는 없다. 시인의 진술처럼 누구에게나 고향은 “쉽게 벗어버릴 수 없는/ 발가락이 나오는 양말 같은 곳”인 것이다. 고향에는 잘살고 못살고를 따지기 전에 운명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아버지의 그 봄날“이 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아버지들의 자식이다.

(공광규/시인)

<시인이 읽어주는 아름다운 우리 詩>를 연재해 주시는 공광규 시인은  1986년 등단. 시집 <담장을 허물다> 등. 2009년 윤동주문학상, 2011년 현대불교문학상 수상 등 우리 문단을 든든히 받치는 중견시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