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비평의 위기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비평의 위기
  • 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 승인 2014.08.1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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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미술비평과 전시기획에는 성격상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다. 비평이나 전시기획을 직접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낫다거나,  사물을 서로 비교하여 보다 좋은 것을 가려내는 언표(言表)와 행위 속에는 미적 가치에 대한 판단이 개입돼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그러한 판단을 가능케 하는 기준(criteria)이 전제된다. 그것을 미학에서는 미적 판단의 기준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자리는 미학의 문제를 다루는 장소가 아니기 때문에 비평과 전시기획에만 국한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비평가를 의미하는 영어의 ‘critic’과 위기를 뜻하는 ‘crisis’, 이 두 단어의 희랍어 어원은 공교롭게도 ‘krinein’이다. 이 ‘krinein’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분리하다(separate)’ 또는 ‘구분하다(discern)’가 되는데, 체로 모래를 걸러내듯이 나쁜 작품들로부터 좋은 작품을 분리해 내는 일이 바로 ‘krinein’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사장의 인부가 모래더미를 체로 쳐서 모래와 거친 자갈을 가려내듯이, 비평가와 기획자는 다같이 쓸 만한 작품에만 관심을 갖고 그렇지 못한 것은 버리게 된다. 마치 공사장의 인부가 자갈을 버리듯이.얼핏 차갑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바로 비평가와 전시기획자가 지녀야 할 본연의 자세이기도 하다.

우리는 주변에서 주례비평이니 정실비평이니 하는 말을 자주 듣는데, 이런 말은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작품을 비평가가 추켜세웠을 때 나온다. 이 말 속에는 또한 누구에게나 그 나름대로의 보는 눈, 즉 미적 판단의 기준이 있다는 뜻이 함유돼 있다.

전시기획자가 전시를 기획할 때, 맨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바로 이 비평적 시선의 개입이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기획자는 실제의 작품을 보고 비평하면서 전시장에 내 걸 작품을 선별하게 된다.

 이 때 주제는 그/그녀에게 있어서 칠흙처럼 어두운 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위한 등대의 불빛과도 같다. 그/그녀는 주제를 구현하기 위해 머리 속에서 가상의 전시장을 허물고 다시 짓기를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도상(圖上) 연습이 필요하며, 때로는 축소된 전시실에 작품의 이미지나 모형을 배열하기도 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비평가와 전시기획자는 일란성 쌍둥이와도 같다. 여기서 누가 형이냐 아우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전시기획을 하지 않는 비평가는 생각할 수 있으나, 비평 행위를 하지 않는 전시기획자는 상상하기 힘들다는 점이 다르다.

전시기획자는 업무상 도록이나 홍보, 혹은 보도자료에 쓸 글을 쓰면서 늘 비평적 행위를 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반드시 전문적인 비평적 글쓰기가 아니더라도 판단하고 비평하기는 매일반이다. 미술사적 의미를 지닌 보다 큰 규모의 전시일 경우, 서문격으로 쓰는 전시기획자의 글은 흔히 전문적인 비평적 글쓰기의 모양새를 갖추게 된다.

때로는 각주가 줄줄이 달린 학술 논문의 형태를 띠기도 하나, 그것이 법조문이 아닌 이상 어딘가에는 필자의 비평적 시선이 스며들게 마련이다. 비평가가 판단하고, 평가하고, 기술하는 것처럼 전시기획자도 유사한 행위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비평가와 전시기획자의 비평적 행위를 어떻게 구분(discern)하고, 분리(seperate)할 수 있단 말인가? 

비평(criticism)은 그 어원에서 보듯이, 위기(crisis)를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 위기의 진원지는 과연 어디인가? 분리하는(krinein) 데서 온다. 이것은 명백한 역설이다. 비평과 전시기획이 분리되고 상호 소통이 없는 데서 같은 문화생산자로서의 동지 의식이 서서히 엷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단지 시대적 상황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비평적 위기의 심연이 너무도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