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류의 예술로(路)] 인(人)과 사(事)는 어떻게 만나야 할까
[장석류의 예술로(路)] 인(人)과 사(事)는 어떻게 만나야 할까
  • 장석류 국립인천대 문화대학원 초빙교수·칼럼니스트
  • 승인 2024.04.1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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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류 국립인천대 문화대학원 초빙교수·칼럼니스트
▲장석류 국립인천대 문화대학원 초빙교수·칼럼니스트

문화예술 분야에서 조직진단을 해보면 뒤틀린 직무구조를 가진 곳이 많다. 특히 문화재단 조직은 공연·전시, 축제, 예술창작, 문화예술교육, 도서관, 지역문화·문화도시, 관광 등 다양한 영역의 일을 함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일이 왜 이 팀에 있는지, 저 일은 왜 저 팀에 배정하지 못하는지, 이 사람은 왜 이 팀에서 일하고 있는지, 직무구조가 마치 뼈마디가 뒤틀려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렇게 직무구조를 뒤틀리거나 골절된 상태로 두면 조직이 힘차게 달리기 어렵다. 이것은 전문적으로 조직진단을 하는 사람만 알아보는 게 아니다. 일과 사람이 잘못 만난 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불편과 어려움으로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조직의 뼈마디를 조금만 다시 맞춰도 일하기 좋을 것 같은데, 처방을 어려워하는 나름의 이유가 제각각 있다. 뒤틀려 있는 곳을 자세히 보면, 내보내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않는 빌런이 있어 직원들도 도망가고, 일도 다른 팀으로 보내는 사례가 많다. 그러면 이 팀에 있어야 하는 일이 저 팀에 가고, 이쪽에 필요한 사람이 저쪽으로 간다. 또 다른 양상으로는 기계식 순환보직을 남발하는 인사권자가 있다. 두루 겪어 보는 게 좋다고 하면서 공격수 손흥민 같은 직원을 수비수로 보내고, 중앙수비수 김민재 같은 직원을 최전방 공격수로 올리기도 한다. 이것이 반복되면 조직 운영의 좋지 않은 관성이 되고, 사람(人)과 일(事)이 톱니처럼 물리지 못하는 직무구조의 뒤틀린 좀비화가 진행된다. 이런 조직에 계속 있으면, 나의 전문성은 도대체 무엇인지 방황하게 된다. 

적재(適材)가 적소(適所)에 가지 않았을 때 

우리는 적재적소가 필요하다는 말을 자주 쓴다. 적재(適材)는 적절하고 알맞은 ‘인재’라는 뜻이다. 적소(謫所)는 알맞은 ‘자리’라는 의미이다. 적재는 인(人)이 되고, 적소는 사(事)가 된다. 적재는 곧, 사람을 안다는 것이다.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조직은 구성원이 가지고 있는 적재를 가늠하기 어렵다. 조직진단 일을 하면 인사권자와 대화할 일이 많다. 조직력이 좋고, 조직이 역동적인 곳의 인사권자는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구체적 이해가 깊다. 일과 사람이 꼬여있는 조직의 인사권자는 대체로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사람을 많이 궁금해하지 않는다. 직원들에게 다가가는 것에도 두려움이 있고,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관점을 가졌다는 가정을 잘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구성원들의 생각을 다 알고 있다거나 혹은 세대, 부서, 입사 시점 등으로 범주화한 일반론에 근거해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도 많았다. 

적재를 가늠할 수 있는 역량은 사람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다. 사람을 알려고 하는 이해는 관계의 신뢰를 촉진한다. 이해가 선행되면 신뢰가 깊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구성원 간 이해가 높은 조직은 사람들이 가진 적재를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이 커진다. 적재를 가늠하는 조직 역량이 높아지면 적절한 자리를 찾아줄 수 있다. 적재적소가 되면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안다는 것이다. 내가 이 자리에 왜 있는지 이해한다는 것은 조직이 골을 넣기 위한 전술에서 내 역할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아는 조직과 나를 왜 이 자리에 보냈는지 모르는 조직은 일의 과정과 결과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미국의 대표 저널리스트인 데이비드 브룩스는 베스트셀러 <사람을 안다는 것>에서 한 사람을 진심으로 바라보는 일이 가진 힘을 얘기한다. “누군가 바라봐준다는 것은 성장을 이끌어낸다. 관심의 빛이 누군가를 비출 때 비로소 그 사람은 꽃을 활짝 피운다.” 적재를 잘 가늠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관심의 빛을 비추며 구성원의 성장을 끌어내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잠재력을 알아봐 주면, 그 사람도 자기 안의 잠재력을 알아보게 된다. 적재의 핵심은 조직 구성원이 가진 잠재력과 가능성을 알아보는 것이고, 일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적소의 옷을 입게 해주는 것이다. 

적소(適所)에 적재(適材)가 가지 않았을 때 

우리는 적재적소라는 말은 잘 사용해도, 적소적재는 덜 친숙한 편이다. 적소적재는 ‘자리’에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이다. 옛말에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자리에 맞지 않는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꼭 해야 하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 때는 적소에 잠재력 있는 적재가 갔을 때이다. 적소적재는 자리가 하는 ‘일(事)’에 대한 깊은 이해가 선행되고,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을 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개념이다. 수만 명의 임직원이 있는 큰 조직은 정규채용을 통해 두루 괜찮은 사람을 잘 뽑아, 적재를 적소에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수십 명 혹은 1~2백 명 남짓한 작은 문화예술 조직은 ‘필요한 자리’에 맞는 ‘사람’을 잘 찾는 방식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런데 ‘자리’에서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어떤 사람이 필요한지 그 기준을 알기 어렵다. ‘자리’에 대한 이해 부족이 기계적인 순환보직과 알아서 적응하라는 조직문화와 결합하면 사람과 일이 뒤틀리는 좀비 증상이 나온다. 

어떤 문화재단에서 대표이사나 본부장, 혹은 팀장을 채용한다고 하자. 이력서와 면접을 보고, 좀 더 좋은 사람을 뽑으려 할 것이다. 여기서 ‘좋은 사람’의 기준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살아온 인생은 얼굴에 드러난다고 하면서 인상을 중심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이전에 근무했던 이력을 중심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논리적인 말솜씨, 태도와 품성을 중요하게 여기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앞으로 3년 혹은 향후 조직에서 이 자리가 필요로 하는 역량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설명을 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적소를 깊게 이해할수록 적재를 보는 눈도 밝아진다. 적소에 적재가 가지 않으면, 명함 뒤에 숨어 기생하는 월급 루팡이 많아진다. 

사람도 일이 필요하고, 일도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과 일을 잘 만나게 하려면, 사람을 더 알아야 하고, 일도 더 알아야 한다. 사람의 입장에서 일을 보고, 일의 입장에서도 사람을 봐야 한다. 인사(人事)의 요체는 결국 사람(人)과 일(事)을 적절하게 만나게 하고, 일과 사람이 함께 성장할 수 있게 관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