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Interview]이해준 한국현대무용협회 이사장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춤은 모두 ‘현대무용’”
[Culture Interview]이해준 한국현대무용협회 이사장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춤은 모두 ‘현대무용’”
  • 이은영ㆍ진보연 기자
  • 승인 2021.06.1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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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무용 역사 담긴 모다페의 40년
모다페 역사 함께한 원로 조망…“역사를 잊는다면 미래도 없다”
원칙이나 공공성 지키려면 내 것부터 버리는 수밖에 없어
존경은 아니어도 인정받는 이사장으로 명예롭게 임기 마치고 싶다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ㆍ진보연 기자]지난 5월 7일, 영국의 4인조 록밴드 콜드플레이(Coldplay)가 신곡 ‘Higher Power’를 발표했다. 여덟 번째 앨범 <Everyday Life>(2019)를 발표한 지 2년 만이다. 콜드플레이는 스웨덴 프로듀서 겸 작곡가인 맥스 마틴(Max Martin)이 프로듀스한 이 곡의 뮤직비디오를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했다. 그런데 컨테이너 야적장에서 이들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홀로그램 댄서들의 동작이 낯익다. 바로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에서 독특한 댄스 동작을 선보여 국내외에 대단한 신드롬을 일으켰던 현대무용 그룹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Ambiguous Dance Company)다.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가 참여한 콜드플레이의 ‘Higher Power’ 뮤직비디오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가 참여한 콜드플레이의 ‘Higher Power’ 뮤직비디오

이처럼 한국의 현대무용수들은 미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일본 등 해외 각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안무가로서 인정받고 있다. 특히 안은미컴퍼니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 전미숙 무용단 ‘BOW(바우)’, 고블린파티 ‘옛날 옛적에’, 아트 프로젝트 보라 ‘소무’ 등은 동시대적 한국성이 반영된 우리만의 현대무용으로 국내외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우리나라에 전문적인 현대무용이 정착된 시점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다. 서구의 현대무용 교육을 받은 무용가가 등장하고 무용과와 현대무용 전공이 확립된 시기이다. 1963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최초로 체육과와 분리된 무용과가 개설됐고 한국무용, 발레, 현대무용 전공으로 삼분화 되면서 현대무용은 도약의 발판을 바련하게 된다. 

1980년대 이후 한국의 현대무용계는 무용공연이 해마다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신진 무용가들은 더 많은 활동의 기회를 제공받게 됐다. 아울러 페스티벌, 무용제, 제전 등 다양한 축제들이 등장했고 국제무용제, 신인무용제, 안무가대회 등이 적극적으로 실현됐다. 그리고 현대무용의 폭발적인 발전에는 국제현대무용제(MODAFEㆍ이하 모다페)가 함께했다.

모다페는 1982년 ‘한국현대무용협회 향연’을 시작으로 40년 간 한국 현대무용계와 발자취를 같이했다. 모다페 조직위원장을 맡은 이해준 한국현대무용협회 이사장은 이 축제의 역사에 대해 “무용인들이 무대에 올렸던 작품들과 그것이 담은 메시지가 모다페를 지켜온 동력”이라고 말한다. 

▲제40회 국제현대무용제(MODAFE) 기자간담회 모습 ©Hanfilm,MODAFE 

전 세계를 마비시킨 코로나를 모다페 역시 피할 수 없었지만, 움직임을 멈추는 대신 관점을 달리해 ‘작품’ 보다 그것을 만드는 ‘사람’에 집중했다. 아티스트에 집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모다페의 역사를 함께한 원로들을 조명했다. 더불어 무용제 최초로 국립 무용 단체를 한 자리에 모아 새로운 볼거리를 만들어냈다. 

이 이사장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컨템퍼러리 필드’에서 함께 춤을 추는 사람들”이라며 “단체마다 중심으로 두는 춤의 형태는 다르지만 발레든, 현대무용이든, 전통이든 우리는 모두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 춤을 추고 있는 것이고, 동시대에 춤을 추는 모든 사람은 컨템퍼러리 춤을 추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정형의 틀을 깨고 탄생한 현대무용의 동반자 모다페는 이제 새로운 변곡점을 맞았다. 지난 40년을 발판 삼아 세대, 지역, 장르, 국가 간의 경계를 허물고, 보다 많은 예술인들이 분명한 몸짓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하는 무용인들의 디딤돌을 자처하는 한국현대무용협회 이해준 이사장을 만나 무용계 안에서 모다페가 가지는 의미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물었다. 

▲이해준 한국현대무용협회 이사장 ⓒ김재성 작가
▲이해준 한국현대무용협회 이사장 ⓒ김재성 작가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국제현대무용제(MODAFE)는 40회를 맞이했다. 모다페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모다페는 1982년 제1회 한국현대무용향연을 효시로 출발했다. 이후 1988년 국제현대무용제로 이름이 변경됐고, 2002년부터 국제현대무용제와 모다페(MOdern DAnce FEstival)라는 약칭을 함께 쓰기 시작했다. 명칭의 변화에 따라 협회의 역할도 조금씩 확장되어, 현재는 해외 작품들을 국내에 소개하고 또 국내에 있는 작가들을 이제 해외로 내보내는 플랫폼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현대무용협회 모다페가 40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간 쌓여있던 축적된 노하우와 인프라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협회는 모다페를 통해 많은 무용가들이 보다 다양한 공연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동시에 좋은 작품들을 한국에 소개하는 플랫폼을 구축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관객들에게 늘 신선한 주제의 작품들을 전달할 수 있었다. 이것이 아마 모다페를 지켜왔던 동력이 아닌가 싶다. 나아가 일방적인 전달을 넘어 양방향 소통을 통해 관객들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힘을 발생시킬 수 있도록 많이 노력하고 있다.

공연 티켓은 어느 정도 판매되었나?

올해 모다페에서 선보인 거의 모든 작품이 매진을 기록했다. 전 좌석을 오픈하지 못했으니 매진의 의미가 크게 없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어려운 시기임에도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보내주신 관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올해 코로나19 방역지침에 의해 총 객석의 1/2만 오픈하게 됐다. 협회 차원에서 보면 수익에 큰 손실이 생긴 것이 사실이고 이로 인한 운영의 어려움도 동반될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 이전에는 대부분이라 할 수 있었던 단체 관람이 지금은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일반 관객들의 힘을 느끼게 됐다. 한 장 두 장씩 예매된 티켓이 모여 매진을 기록했다. 엄마랑 오는 아이, 부부, 혼자 관람하는 무용 마니아 등이 관람할 기회가 확대되고, 장르에 대한 일반 관객들의 관심도도 훨씬 높아졌다.

▲‘모다페 인 제주’ 무대에 오른 KARTS Dance Company 호페쉬 쉑터 안무 'tHE bAD' (사진=Hanfilm, MODAFE 제공)
▲‘모다페 인 제주’ 무대에 오른 KARTS Dance Company 호페쉬 쉑터 안무 'tHE bAD' (사진=Hanfilm, MODAFE 제공)

이번 행사에는 처음으로 지역 확장성을 위해 ‘모다페 인 대구’, ‘모다페 인 제주’를 테스트 케이스로 진행을 했었고, 하반기에는 당진과 창원 등의 지역을 접촉하고 있다. 제주 같은 경우 특히 무용과가 있는 대학도, 예술 고등학교도 없다. 그런데 320석이 티켓 오픈한 지 30~40분 만에 매진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쪽 담당자도 놀라고 우리도 놀랐다. 현대무용의 불모지라 할 수 있는 제주에서 이렇게 반응이 뜨겁다는 것은, 콘텐츠 파워의 중요성에 대한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성을 많이 고려한 작품으로 접근하려 신경 썼다.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인간의 리듬’, 툇마루무용단 ‘해변의 남자’ 등 즐거운 작품들을 선보이다 보니 이슈가 되고, 일반 관객들의 호기심을 높이다 보니 판매가 잘 된 것 같다.

코로나와 처음 대면했던 지난해와 올해의 차이점이 있다면?

‘올해 40회를 맞은 모다페를 보다 의미 있게 하는 건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하게 됐다. 여러모로 힘든 시기지만 40회를 맞아 새로운 가치와 방향성을 잡아보고 싶었다. 

작년과 올해의 가장 큰 차별점은 ‘작가 중심의 작품’을 조망하는 것이었다. 지난해 컬렉션으로 정영두, 이경은, 김설진, 안애순 등의 작가들을 조망했다면 올해는 하루 프로그램으로 이 작가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게끔 구성했다. 전미숙, 안성수, 안은미 세 아티스트의 작품을 하루씩 배치했다. 그리고 컬렉션으로 들어오는 몇몇 공모팀들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디펜던트 하면서도 스타성을 가진 김보라, 김경신, 박순호 그리고 이동하, 권혁, 박관정 등이 참여했다. 작품성과 예술성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이들이 가진 컨템퍼러리 필드 내 포지션을 잘 파악해서 구성하고자 했다.

▲전미숙 무용단_Talk to Igor ⒸBaki
▲전미숙 무용단_Talk to Igor ⒸBaki

더불어 축제를 디렉팅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예술감독과 협의했던 부분은, 우리나라 50ㆍ60대 여성 작가들에 대한 조명이었다. ‘이 궁금한 사람들을 왜 궁금해하지 않을까’라는 답답함과 갈증이 동시에 일었다. 그래서 김영미, 황미숙, 장은정, 강미희 이렇게 네 분을 모시게 됐다. 

아울러 내년의 계획은, 예산은 부족하지만, 우리가 제작ㆍ투자해서 아티스트와 협업할 수 있는 프로덕션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 가능성을 열어두고 접근하고 있다.

올해 모다페 프로그램 가운데 한국현대무용협회 역대 회장을 지냈던 원로들의 무대로 꾸며지는 ‘모다페 뮤지엄(레전드 스테이지)’는 그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모다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선 40년 동안 모다페를 만들어 온 사람들의 노력과 그들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에 모다페라는 국제현대무용제 페스티벌 안에서 활동하셨던 육완순 선생님부터 최청자, 이숙재, 박명숙, 박인숙, 양정수, 안신희의 원로 작가분들을 모셔서 조망하고 아카이빙하는 시간을 갖고자 ‘모다페 뮤지엄(레전드 스테이지)’를 기획하게 됐다. 

▲육완순-수퍼스타예수그리스도 초연(어떻게 그를 사랑해) ⓒ이화여대교목실
▲육완순-수퍼스타예수그리스도 초연(어떻게 그를 사랑해) ⓒ이화여대교목실

‘모다페 뮤지엄(레전드 스테이지)’는 어른들을 위한 단순한 효도 프로그램이 아니라, 역사를 조망하지 않으면 미래를 볼 수 없다는 의미를 담는다. 그분들이 일궈온 시간이 쌓여 지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단순히 가격(price)으로 평가할 수 없는 가치(value)가 있는데 많은 사람이 이 부분을 주목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 

올해는 국립 무용 단체가 처음 참여한다는 점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들의 페스티벌 참여가 가져온 내부적인 변화는?

지금껏 어느 축제에서도 국공립 무용 단체가 한자리에 모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40회를 맞이한 모다페가 하나의 계기로 작용하길 바랐다. 또한 그들의 무대를 한 페스티벌에 넣어서 관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국공립단체에 도움을 요청했다. 

국립현대무용단과 국립무용단, 그리고 국립발레단까지 과감한 결정을 내려주신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더불어 코로나로 인해 누구보다 어려움이 컸던 대구 지역을 대표하는 대구시립무용단은, 지난해 모다페 폐막작으로 참여했던 인연이 이어져 올해도 함께하게 됐다. 

취지는 좋으나, 국립발레단이나 국립무용단이 모다페에 참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의문이 든다.

그 부분에서도 대단한 설득이 필요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컨템퍼러리 필드’에서 함께 춤을 추는 사람들이다. 발레든, 현대무용이든, 전통이든 우리는 모두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 춤을 추고 있는 것이고, 동시대에 춤을 추는 모든 사람은 컨템퍼러리 춤을 추고 있다. 단체가 중심으로 두는 춤을 바탕으로 점점 다양한 색이 칠해지고 있다. 클래식을 기반으로 하는 국립발레단이나 국립무용단에서 컨템퍼러리 요소를 가미하고, 국립현대무용단에서 전통적 요소를 차용하기도 한다. 

▲국립무용단_가무악칠채ⓒ국립극장
▲국립무용단_가무악칠채ⓒ국립극장

이번 축제는 각자 속해있는 필드에서 한 발짝 나와, 춤이라는 큰 덩어리로 하나 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는 데 의미를 두고 긍정적으로 바라봐주셨으면 한다.

국립 무용 단체의 참여로 컨템퍼러리 영역이 확장되었고 삭감된 예산적인 부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올해는 국립 단체들의 참여를 독려해 부족한 예산을 메꿀 수 있었지만, 앞으로의 대책이 필요할 것 같다.

협회가 이제는 공공성이나 공익성을 담보하면서 사업을 운용할 사업비, 즉 수익이 아닌 소득을 내야 한다는 쪽으로 이견이 좁혀졌다. 이에 이번에 정관 변경을 통해 일부 수익사업을 개시했다. 어린이 봉사활동이라든가 실버 계층을 위한 사업을 했을 때, 많지 않아도 강사료 정도는 받을 수 있는 루트를 만들었다. 나는 협회에서 활동하고 계신 분들 이외에도 현대무용을 하는 모든 분이 협회 구성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대무용을 하는 분들이 어느 정도 혜택을 볼 수 있도록 루트들을 열어놨고, 예산 등으로 활용될 수 있는 방법도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다. 또한, 극장과의 공동 작업도 논의 중이다. 여러 방면으로 예산 확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내년에는 좀 더 많은 지원이 있길 바란다. 

▲국제현대무용제(MODAFE) 이해준 조직위원장©Hanfilm,MODAFE
▲국제현대무용제(MODAFE) 이해준 조직위원장©Hanfilm,MODAFE

모다페는 매년 신인 안무가를 발굴하고 성장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Spark Place’ 외에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신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다면?

협회 이사장이 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젊은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사업의 모든 참가비를 없애는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친구들이 첫발을 떼는 청년예술가 육성프로젝트 ‘신인 데뷔전’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기존에는 열 몇 팀 정도의 참여율을 보이던 것이 참가비를 없애고 나니 스물여덟 팀으로 크게 늘었고, 올해는 마흔네 팀이 왔다. 사회 초년생들이 어떤 부분에서 망설이고 고민하는지 정확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무대와 연습실, 공연 활동에 필요한 제반을 제공해 신진예술가들의 역량 강화 및 작품 활동 지속을 위한 지원을 도모하고 있다.

▲올해로 28회를 맞이한 한국현대무용협회의 ‘신인데뷔전’
▲올해로 28회를 맞이한 ‘신인데뷔전’©Hanfilm, 한국현대무용협회

이런 작업을 통해 발굴된 작가들의 공연이 한 번으로 끝나선 안 되지 않나. 우리가 이들을 지속해서 지켜보며 성장과 작업을 지원하려 한다. 이것의 일환으로 ‘소극장 프린지’를 준비하고 있다. 모다페에 참여하지 못한 젊은 친구들에게 무대를 제공하고, 좋은 작품들이 네트워킹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자는 취지다. 아마 내년에 진행이 될 것 같다. 

올해 진행되고 있는 사업 중 또 하나는 ‘생생 춤 페스티벌’이다. 대학을 기반으로 한 무용단, 쉽게 말하면 대학생과 대학원생까지 포함한 친구들이 현장으로 떠나기 전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안무가 매칭 프로젝트’를 통해 현장에 있는 프로페셔널한 독립 안무가와 전문 무용단체를 매칭해 준다. 단체는 그 안무가로부터 새로운 스타일과 레퍼토리를 배우고 공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작가는 새로운 작업 환경에서 유능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무용수들이 에너지도 받고 소속된 무용단에서 보다 확장된 공간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현대무용협회 이사장으로서 우리의 현대무용이 국내외에서 더욱 많은 무대를 갖기 위해서 어떤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한국현대무용협회가 기획사는 아니지만 링크의 역할, 중심에서 헤드가 아닌 링크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플랫폼과 허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가 필요한 것은 인력풀 네트워크와 이들을 명확하게 소개할 수 있는 자료다. 

우리 협회가 오랫동안 글로벌 페스티벌을 이끌어오면서 축적된 노하우는 다름 아닌 인력풀이다. 해외 페스티벌 디렉터들과의 연계성을 갖고 있는데, 그들과의 지속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우리 작가들이 해외 무대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고 있다. 

재작년에 이미 선발된 아티스트들이 있는데, 코로나로 인해 움직이질 못하고 있다. 네덜란드 대사관의 경우에도 그쪽의 젊은 작가들과 우리 작가들의 협업에 관심이 많다. 준비 중인 여러 프로젝트가 있지만, 물꼬를 한 번에 확 여는 것이 아닌, 스텝 바이 스텝 형태로 규모가 크지 않아도 책임감 있게 진행할 예정이다. 

현대무용의 시장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스타플레이어 육성이 아닐까 싶다.

스타플레이어를 만들고 싶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고 이뤄지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만, 모다페, 신인 데뷔전, 생생 춤 페스티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인재들을 발굴해서 지속해서 지원한다면 예술성과 대중성을 아우르는 스타플레이어는 충분히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가능성을 위해 신인 안무가들의 성장을 돕는 것이 협회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 친구들이 결국 우리의 자산이 될 거고, 우리는 그들을 위한 자양분이 돼야 한다는 게 기본적인 생각이다.

교단에서 학생들과 만나고 있는데, 가르침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국문과 교수이신 아버지와 심리학을 가르치시던 어머니 아래서 자랐고, 마틴 부버의 <만남의 철학>을 배웠다. 부버 철학의 핵심은 인간성의 회복, 즉 ‘나-그것’의 비인격적 관계로부터 ‘나-너’의 인격적 관계의 회복, 수평적 관계의 정립이다. 아이들과도 이 수평적 관계를 늘 잃지 않으려 한다. 아이들이 성장해 나가는 발판, 기틀을 만들어나가는 게 선생이 해야 할 일이며, 이 모든 것은 수평적 사고 안에서 충분히 가능하다.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나름 최선의 노력을 다했고, 존경받는 선생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하다. 그러나 무용계 한편에서는 대학교수를 잠재적 범죄자 혹은 이상한 집단의 수장으로 바라보는 시선들도 있다. 일부의 그릇된 행동들이 쌓여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일반화되어선 안 된다. 지금도 교육 현장에서 봉사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헌신하는 분들이 정말 많이 계신다. 그분들을 폄훼하는 일은 더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해준 한국현대무용협회 이사장 ⓒ김재성 작가
▲이해준 한국현대무용협회 이사장 ⓒ김재성 작가

과거 1993년 제23회 동아무용콩쿠르, 1995년 한국현대무용협회 등 걸출한 대회에서 상을 휩쓸며 현대무용수로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이후 안무가로서의 능력 또한 인정받았다. 현재는 관리자로서의 행보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데 무대 위 활동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가.

무용하는 사람들은 무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다들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다. 

우선 경제적으로 지원이 보장되지 않으면 작업에 어려움이 있다. 그런데 내가 2010년에 대학교수가 되면서 스스로 결심한 게 있다. 10년 정도, 제가 나름대로 성장할 때까지는 지원 사업에 지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대학교수니까. 대학교수는 공모에서 당선되기가 유리하다 보니, 필드에서 경쟁하는 작가들의 파이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현재, 협회 차원의 (공모에는) 지원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12년 동안 단 한 번도 지원서를 내지 않았다. 

아울러 협회 이사장을 맡은 동시에 강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지금, 작품을 위한 시간을 만들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처음 협회 이사장이 되었을 땐 강단과 무대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선생으로서의 삶을 선택했으니 좋은 선생도 돼야 하고, 협회를 맡은 이상 인정은 받아야 하지 않겠나. 행정적으로 원칙이나 공공성을 지키려면 내 것부터 버리는 수밖에 없다. 무대는 그립지만 아마 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동안에는 불가능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오래 쉬다가 감을 잃을까 봐 걱정도 된다. 그래도 모다페 같은 행사가 열리면 뛰어난 예술가들의 무대를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어서 감사하다. 가까이서 열심히 보며 많이 배우려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며,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

‘누구나 리더가 될 수 있지만, 모두가 리더십을 갖는 건 아니다’라는 말을 믿는다.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존경은 아니어도 인정받는 협회 이사장으로서 임기를 명예롭게 마치고 싶다. 그리고 강단으로 돌아가 아이들과 잘 지낼 계획이다.

욕심이라면, 나중에 ‘그래, 이해준 후반기 작품 중에 이런 것도 있었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걸 한번 해보고 싶다. 지금 상태로 보자면 기약은 없다.(웃음) 무용하는 모든 이들이 예술가로서의 삶을 꿈꾸고 그 작품이 기억되길 바랄 것이다. 무대예술은 휘발성이 강한 시공간의 예술이다 보니, 무대에 한 번 오르고 끝나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그럼에도, 그 짧은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작품을 꼭 한번은 하고 싶다. 

생각하고 있는 주제나 작품의 방향성이 있는지?

주제나 방법이 신선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보다 나만의 스타일,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시’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내가 가장 처음 작업했던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해석적 입장을 달리해서 다시 작업해보고 싶다. 별로 인기는 없을 것 같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