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Interview] 김창겸 한국시각예술저작권연합회 수석부회장 “전시 중심인 작가 존중받지 못하는 시스템 바로 잡아야”
[Culture Interview] 김창겸 한국시각예술저작권연합회 수석부회장 “전시 중심인 작가 존중받지 못하는 시스템 바로 잡아야”
  • 이은영 발행인‧이지완 기자/사진 김재성 작가
  • 승인 2021.12.08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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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비-미술진흥법 제정-저작권으로 이어진 18년 간 ‘미술투쟁’
교통비조차 주지 않던 2004년 광주비엔날레, 부당함 인지
‘아티스트 피(Artist fee)’ 개념 언급 시작해
예술인 권리·저작권 얘기하는 데에 18년 걸려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이지완 기자/사진 김재성 작가] 지난달 한국시각예술저작권연합회가 창립됐다. 저작권에 대한 논의가 가장 활발하게 이뤄졌을 것 같은 시각예술분야지만, 이 분야에서는 처음 발족되는 저작권 관련 단체다. 연합회에는 국제미술교류협회, 극동예술연합, 대학미술교육협의회 등 총 18개 예술 단체가 참여했다. 초대회장으로는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이 선출됐다. 미디어아티스트이자 지난해 한국미디어아트협회를 출범시키고 이사장으로 선출된 김창겸 작가는 한국시각예술저작권연합회의 수석부회장을 맡았다.

김 작가는 2003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에서 열린 《사루비아 다방》전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그의 작품은 정물 위에 영상을 투영하거나 <반 고흐에 대한 경의>작품처럼 위대한 인물 위로 일반적인 개인을 겹치면서 연관 관계 속에서 의미를 이끌어낸다. 김 작가는 세종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이탈리아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1998년에 이르러서, 작은 중고 빔 프로젝터로 콜라 캔 위에 콜라 이미지를 수사한 습작이 그의 초창기 비디오 작품이었다. 최근 그는 비디오를 넘어, 3D 작업, 인공지능 활용, NFT 영역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다.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김창겸 미디어아티스트, 김 작가 뒷편으로 미디어 작품들이 재생되고 있다. ⓒ김재성 작가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김창겸 미디어아티스트, 김 작가 뒷편으로 미디어 작품들이 재생되고 있다. ⓒ김재성 작가

지난 6월 문체부에서 주최한 ‘미술진흥법 제정 토론회’에서 김 작가는 미술진흥법추진위원회 사무총장을 맡으며, 창작자 입장의 시각을 날카롭게 제시했다. 진흥법이 아우르지 못하고 있는 비엔날레, 대안공간의 존재를 수면으로 끌어올리는 토론이 인상적이었다. 미술진흥법추진위원회를 함께 이끌었고, 한국미디어아트협회 이사장, 한국시각예술저작권연합회 부회장까지 맡고 있는 그의 모습은 꽃이 만발하고 소녀와 나비가 움직이는 그의 작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인 것 같다.

초창기 작가 레지던시 형태를 갖추고 있는 파주 작은 마을에 마련된 그의 작업실에서 진행된 인터뷰는 미디어아티스트 김창겸과 미술계 혁명가 김창겸 사이를 오갔다. 예정했던 시간을 훌쩍 넘겨서 진행된 인터뷰에선 아티스트 김창겸이 미디어아트계 막내가 아닌 선배의 역할로 나아가며 한국 미술계의 미래를 개척해온 시간들이 담겼다.

최근 한국시각예술저작권연합회 창립됐다. 부회장을 맡게 됐는데, 창립에 앞서 많은 고민들이 있었을 것 같다.

지난 6월에 열린 미술진흥법 제정 토론회에서 ‘추급권(미술품재판매보상청구권) 도입’에 관련된 얘기가 중점을 이뤘다. 추급권이라는 것은 미술품이 재판매될 때마다, 창작자에게 일정부분 보상을 해주는 개념이다. 토론회에서 이 ‘추급권’에 대한 얘기는 활발하게 오가는데, ‘저작권’에 대한 얘기는 잘 나오지 않았다. 왜 ‘저작권’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당시 패널로 참석했던 이동기 국민대 법학과 교수가 ‘저작권 법안은 다 있는데, 민간영역에서 움직이지 않아서 활용되지 않는 것’이라는 답을 해줬다. 그래서 토론회 이후 문체부 저작권 산업과에 문서로 질문하고, 답변을 받았다. 돌아온 답변에는 굉장한 법률 용어들이 난무했는데, 내가 느낀 바는 ‘아, 어려운 문제라는 거구나’였다. 그 때 미술 분야에서도 저작권에 대해 발언을 해야 할 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국내에는 굵직한 저작권 협회가 두 개 있는데, 영화와 음악 쪽이 잘 돼 있다. 미술은 주도적인 저작권 협회가 없었다.

시작은 사비나 미술관에 이명옥 관장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이 관장은 미술계에서 신뢰가 두텁고, 공익사업도 많이 한 분으로 이 문제에 대해 잘 이끌어 주실 것 같았다. 그때 이 관장님이 ‘이거 하자’라는 답을 보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려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저작권이라는 것이 모든 작가와 전시 기획자,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 디자인도 들어올 수 있고 서예, 만화 등등 많은 것을 아우른다. 특히나 앞으로 수많은 창작품이 디지털로 변하는 시기에 이 ‘저작권’이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면 미술계에 주요한 개념들이 다 뺏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작권의 개념이 어렵고 무척이나 스케일이 방대하고 크지만, 꼭 논의돼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 책임감을 갖고 시작하게 됐다.

▲(사)한국시각예술저작권연합회 창립총회 현장 (사진=김창겸 제공)

작가로서의 역할, 미술계의 목소리를 이끄는 한국미디어아트협회 이사장으로의 역할도 이어왔다. 특히 ‘아티스트 피(Artist fee)’라는 개념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현장에서의 시각예술저작권 상황이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정말 악질인 곳들이 많았다. 아티스트 피(Artist fee)라고 불리는 작가비가 지금은 정착됐지만, 처음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작가비에 대해 처음 발언을 시작하게 된 곳은 2004년도 광주비엔날레였다. 그 당시 광주비엔날레를 보이콧하면서 이슈화 됐는데, 이유가 교통비를 주지 않아서였다. 광주비엔날레 약관 협약서에 ‘작품 제작에 따른 경비는 작가부담을 원칙으로 한다’라는 조항이 있었다. 외국 작가들은 다 비용을 지불하면서, 국내 작가에게는 아무런 비용을 주지 않는다는 게 황당했다. 그래서 비엔날레 전에 전시할 공간을 점검해야하니, 교통비는 지원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돌아온 반응은 ‘끼워줬으면 열심히 할 것이지, 뭐 이렇게 작가가 잔소리가 많냐, 할 건지 말 건지나 말해라’였다. 부당하다고 느꼈고, 보이콧을 선언하고 바로 언론사에 제보해 기사화를 시켰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고난의 시간이었고, 불이익도 많이 받았던 때다.

이후에 또 비슷한 일이 발생했었다. 2009년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서울관 예정지에서 여는 《신호탄》 전시를 위해서 작가 4,50명 정도를 모은 적이 있었다. 당시 국현 측에서는 작가들에게 소장품과 콜라보레이션을 하던가, 전시에 맞는 새로운 작품을 창작해달라고 요구했다. 새로운 작품을 하면 당연히 제작비가 발생하는데, 운송비만 지원해준다고 했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껴서 5명의 작가들을 모아서 청와대에 민원을 넣었다. 비용이 발생하는 일인데, 공짜로 일을 해줄 순 없다. 노동비도 주지 않는데, 재료비도 안 주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민원을 넣어서, 관계자 몇몇 분을 만나고 결국 작가 한 사람당 50만 원씩을 받게 됐다. 일이 끝나고 났는데, 굉장히 허무했다.

그런데, 이후에 또 문제가 발생했다. 지원금을 받은 작품은 작품의 소유권이 지원금을 제공한 쪽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이 조항은 광주비엔날레 협약서에서 확인을 하게 됐는데 ‘작가한테 지원비를 줬을 경우에 그 작품의 소유권은 광주 비엔날레에 있다’라는 것이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이 조항의 근원이 어디인가 찾아올라갔더니 국립현대미술관 문서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아마, 이 조항은 지금도 여러 군데에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미술계 현장에서 경험한 사건들을 얘기하는 김창겸 미디어아티스트 ⓒ김재성 작가

작가가 창작한 작품의 소유권이 어떻게 작품 값에도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지원금을 주고 귀속시킨다는 것인지, 말도 안 되는 조항들로 보인다.

더 황당하고 악질적인 조항들도 있다. 대구사진비엔날레에서 확인한 조항인데 ‘작품비를 지원받은 작가의 작품은 파기하는 게 원칙이다’라는 것이다. 대구시가 작가들을 불러서 10평정도 되는 방을 하나씩 주고 100만 원씩 지급하면서 도시에 대해 조사해서 창작품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100만 원이라는 돈은 자료 조사하고 숙식을 해결하기에도 적은 돈이다. 당시에 어떤 작가는 작품을 더욱 잘하고 싶어서 600만 원 프린트 비용을 자비로 사용하기도 했다. 나 같은 경우는 해당 제안을 거절하고, 내가 기존에 진행하던 작품을 출품하고 50만 원을 받았다. 그렇게 비엔날레를 진행하고 전시가 끝났을 때 모든 참가 작가들이 동일한 메일을 받게 됐다. 아까 말한, ‘작품비를 지원받은 작가의 작품은 파기하는 게 원칙이다’라는 조항이 담긴 메일이었다.

분노했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공론화했다. 당시 비엔날레 측에선 담당직원의 실수라고 하며 유야무야 넘어가려했다. 하지만 멈춰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론적으로는 그 때를 기점으로 완전히 바뀌게 됐다. 당시 관련 직원들은 모두 해고되고 문제가 크게 번졌다. 그런데, 허무한 것은 당시 높은 책임자였던 조직위원장은 더욱 잘돼서 또 좋은 곳으로 이직해 간걸로 알고 있다. 정말, 참담한 심정이었다. 하소연을 하려해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던 시기였다. 전시의 핵심은 작가인데, 작가가 제일 존중받고 있지 못하는 시스템이었다.

이후에는 좀 달라졌는가.

없었다. 되레, 하소연 할 곳이 필요해서 그 이후부터 더 열심히 알아보고 다니게 됐다. 그런 와중에 문화공장 오산이라는 곳에서 내게 개관전을 제안했다. 시간이 없어서 전시는 할 수 없지만, 기획자로 참여하겠다고 했다. 그 경험이 내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줬다.

작가가 아닌 기획자로 참여하게 되니까, 작가에게 인건비라는 명목의 비용을 지불 하게 되면 문화재단이나 기관 사람들이 불법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왜냐하면, 법적으로 작가 인건비 지급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또 한 번 황당함을 느끼고, 작가에게 인건비를 주지 말라는 규정이 있는지도 찾아보게 됐다.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 계속 찾아나가던 시기였다.

계속 묻고, 민원을 제기했다. 왜 예술가들이나 작가들에게는 재료비만 줄 수 있는 것이냐 물었다. 민원을 한 번 해결하는 데에 15일이 걸리고 그것을 5,6번 반복했다. 내 작품 활동을 하고, 개인적인 일도 처리하면서 시간을 투자했다. 그리고 드디어 2014년에 문체부의 국장급 인사를 만나게 됐다. 그 때 그 분이 제게 얘기하길 ‘이제 제도를 좀 바꾸려한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아티스트 피(fee) 정책토론회’에 발제자로 참여하게 됐다. 그런데,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단 10분이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어떻게 지난 이야기를 모두 전하는가. 허탈함이 더 컸다.

이 사건들 이전에는 아무도 작가의 인건비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을 달라고 투쟁하는데, 작가는 인건비 자체가 책정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정의로운 세상인가 싶었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침묵했다. 기관과 국가와 갤러리와 민간 기업들이 모두 암묵적으로 움직였다. ‘예술인들 너네는 인건비가 없잖아, 너네는 팜플렛이나 잘 뽑으면 되잖아’라는 논리로 작가들이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은 시간이었다. 나는 현장의 목격자였고, 감시자였다.

▲인터뷰를 하고 있는 김창겸 미디어아티스트와 이은영 발행인 ⓒ김재성 작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김창겸 미디어아티스트와 이은영 발행인 ⓒ김재성 작가

투쟁의 역사를 듣는 것 같다. 한국미디어아트협회 창립, 미술진흥법 입법 제안 또한 지난 경험을 통해서 시작한 일인지.

2019년쯤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작가비가 하루 250원으로 책정됐던 논란인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광장》전시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당시 문체부에서 ‘미술창작 대가 기준안’을 발표했다. 그 법안을 기준으로 1일에 책정된 작가비 5만 원에 작품 전시일수, 작가별 배분율, 조정계수 등을 곱한 결과, 작가가 하루 받을 수 있는 금액이 250원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미술계에 큰 파장이 일었고, 토론회가 열렸다. 나 또한 방청객으로 토론회에 참여했다.

나는 2019년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한국 비디오 아트 7090》 전시에 참여하면서 450만 원을 받았다. 2004년부터 일련의 사건을 겪고 깨닫게 된 점은 작품을 유상 임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술관과 견적서를 주고받으면서 절차를 진행했다. 사실 예술가가 사업자를 등록하고, 용역 계약을 하면 예술인 판에 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각오한 부분이었다. 나는 무력하게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2019년 토론회 당시, 내 견적서를 공개하면서 “왜 예술인들은 못 받으면서, 나는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라고 되물었다. 당시 현장에는 국현 기획자가 있었고, 내부에 해당 사안이 전달돼 결과적으로 《광장》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50만원씩 더 지급받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미술계는 계속 바뀌어왔다.

18년이 걸렸다. 예술인의 권리와 저작권을 얘기할 수 있게 되기까지 18년이 걸린 것이다. 2009년 국현 《신호탄》 전시기획자는 현재 대형 미술관 관장으로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들의 처우는 나아지지 않았는데, 관련자들은 앞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 작가들에게 스피커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무엇을 얘기하고 싶으면 우리는 항상 마이크를 뺏어서 외쳐야 하는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법을 공부하고 협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토론회에서 우리를 초청하게끔 만들었다. 3~4년 동안 작가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고, 작가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대변해주면서 협회의 토대를 닦아서 드디어 지난해 사단법인 한국미디어아트협회를 만들게 됐다.

2019년에 작가비 250원을 50만원으로 만들었고, 거기서 더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술진흥법추진위원회를 만들어서 국회의원들을 찾아가며, 미술진흥법 제정을 위해 발로 뛰었다. 지금 계속 토론회가 열리고, 입법 발의도 됐는데 어떻게 결론이 지어질 진 모르겠다. 그리고, 미술진흥법 토론회를 통해 저작권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김창겸, Watershadow in the dish 3, video installation, 4min. 50sec., 2015~2026 (사진=김창겸 제공)
▲김창겸, Watershadow in the dish 3, video installation, 4min. 50sec., 2015~2026 (사진=김창겸 제공)

이제 개인 작품세계에 대한 질문으로 돌려보겠다. 사실 미디어 전공자가 아니다. 서양화를 전공했고, 이탈리아에선 조각도 공부했다. 미디어 아트를 택한 계기와 지금까지 어떻게 지속해오고 있는지 궁금하다.

원래 조각을 했다. 87년부터 97년까지 조각을 했고, 6년에서 8년 정도는 대리석도 만졌다. 나는 5년간의 결혼 생활 힘들게 했는데, 이혼을 하면서 미술을 포기하려까지 했다. 생활비가 없어서 조각을 포기하고 석공 생활도 했다. 이혼 후에 독일에서 혼자 유학생활을 하면서, 한국에 잠시 들어와 돌 공장에서 3,4개월 일하고 돈을 벌어가는 생활을 지속했다. 그런 시기들 중에 우연히 전시를 하게 됐다. 습작으로 하고 있던 영상 작업을 선보였다.

당시가 성수대교 붕괴 이후에 사회가 굉장히 흉흉할 때였다. 아무도 전시를 보러 오지 않았는데, 그 때 김학량이라는 기획자 한 명이 전시를 보고 갔다. 삶도 막막할 때다 보니, 그 사람 앞에서 술에 취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가지고 있는 작품은 없으니까, 어떤 작품을 해보고 싶은 지에 대해서 주절주절 털어놨었다. 그 이후 1998년 동아갤러리 《이 작가를 주목한다》 전을 통해 비디오작가로 알려지게 됐다. 처음엔, 비디오 작업을 하면서 편집도 제대로 못해서 계원조형예술대학교에 가서 편집을 부탁하기도 했다. 기획자들은 내가 비디오를 공부한 줄 알아서 다음 전시를 계속 제안했는데, 나는 배워가면서 작품을 했다. 1999년부터 작품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고, 그 이후 물질에 영상을 접목시키는 작업을 선보인 《사루비아 다방》, 《거울》 전시 등을 열게 됐다.

사실, 내 작품은 모두 첫 사랑에서 시작한다. 첫 사랑을 1999년도에 21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됐는데, 수락산 근처를 산책하며 나눴던 대화나 고민을 나눴던 분위기 등이 내 작품 면면에 깔려있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존재에 대한 고찰을 투영하고, 과연 영상에는 신뢰만 있는가 묻기도 했다. 두 번째 시리즈에선 그림자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넣어왔다.

작품의 방향은 계속 바뀌고 있다. 최근엔, 인공지능을 사용한 협업작품도 했고 NFT 작업도 진행했다. <인공지능과 만다라>라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만다라를 하나의 공간으로 보고 여러겹의 우주가 생성된다고 생각했다. 그 안엔 어떤 생명이든 존재할 수 있는데, 이번 작품엔 인공지능의 존재를 넣어보게 된 것이다. 앞으로 인공지능을 활용한 작품을 논의할 수 있는 비엔날레도 기획하고 있는 중이다.

▲김창겸, 도자기의 역사, single channel video, 3min. 28sec., 2020  (사진=김창겸 제공)

코로나의 지속, NFT 미술품의 등장, 이건희 컬렉션 등으로 미술계가 여러 이슈들이 많았다. 한 해가 마무리 되는 시점에서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미술계 이슈는 무엇이었나.

이건희 컬렉션이 가장 큰 이슈였다고 생각한다. 이건희 컬렉션으로 인해 물납제도도 수면 위로 올라왔고, 미술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만약 우리나라에도 물납제가 도입된다면, 기업이 미술에 투자하는 문화가 확산될 것이라고 본다. 기업의 큰 자본들이 미술계로 흐르기 시작하면, 전문가들이 고용되면서 고용인원도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일단 작가의 작품이 팔리고, 화랑과 작가가 살 수 있게 되면 미술계에는 긍정적 영향을 줄 것이다. 또 그 기증이라는 행위 자체가 우리 미술계 이곳저곳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물납부분은 작가들에게는 긍정적이지만, 기업들이 이를 악용할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기업들이 미술품 투자를 돈세탁에 사용할 우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건희 컬렉션과 이건희 미술관 부지가 서울로 결정된 것에도 많은 논란이 있다. 어떤 문제든지 항상 반대 논리는 존재한다. 한 발 물러나고, 하나를 얻는다고 생각한다. 현재 암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지하경제를 지상경제로 끌어올리고, 투명성을 점차적으로 추구해나가야 할 것도 앞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건희 컬렉션이 어떤 경로로 작품이 국가에 돌아왔던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가치는 대단한 것이라고 본다.

▲질문에 답하고 있는 김창겸 미디어아티스트 ⓒ김재성 작가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바람이나 전할 말이 있다면.

올해 미술계 중요한 사건으로 한국시각예술저작권연합회 창립 또한 꼽고 싶다. 한국미디어아트협회를 설립한 경험으로 보면 사단법인은 국가기관의 인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발명특허와 유사한 지점이 있다. 협회 명칭에서 중복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특허에서 새로운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와 동일한 것 같다. 미디어아트협회도 미술단체 중에서 이런 영역의 단체가 없기에 구심점을 갖고 만들게 됐다고 생각한다.

미술에서 저작권 개념은 공기처럼 당연하게 권리를 누려야 하지만, 너무 광범위하게 크고 당연하기에 오히려 관심이 덜했다고 본다. 지난 시간 동안 내가 경험했던 미술계의 불합리한 제도는 ‘저작권’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이 가능하다. 요즘 이슈가 되는 NFT보다 상위 개념이라 생각한다. 앞으로의 미래에는 저작권이 열쇠가 돼 많은 문화 현상과 문화적 결과들이 나타날 것이다.

한국시각예술저작권연합회를 이명옥사비나미술관 관장, 김정희 조각가협회 이사장님과 온 힘을 바쳐 만들고 있다. 시각예술의 20개 단체가 발기인으로 연대해 만드는 것이니, 국내 최대의 미술단체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문체부 사단법인 인가를 받아야 하고, 저작권산업과에 신탁단체 인가를 받아야 하는 등 나아가야 할 길이 멀다. 앞으로의 과제를 차근차근 수행해나가면서 저작권관련 시각예술의 창작자들의 권익을 위해 일할 것이다. 한국시각예술저작권연합회 수석부회장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나아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