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 권이나 작가 “내 자신에 대한 확신, 자존심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작가의 일”
[Special Interview] 권이나 작가 “내 자신에 대한 확신, 자존심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작가의 일”
  • 이은영 발행인ㆍ이지완 기자/ 김재성 작가
  • 승인 2021.12.22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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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규 조각가로부터 시작한 예술의 길
치료 위해 프랑스…세자르 조각가에게 배움 얻어
부친 권옥연 작가, 가장 친한 사람이자 가장 잘 통하는 사람
백범일지 모티프로 ‘태극기’ 작품 시작
사랑이 담긴 진실된 작품 하고파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는 권이나 작가는 국내 미술계에선 조금 낯선 작가다. 하지만, 권이나 작가의 부모를 언급하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권 작가의 부친은 전후(戰後) 한국 미술계에서 서양화단을 이끌었다고 평가되는 권옥연 작가고, 모친은 한국 무대미술과 의상을 하나의 예술 장르로 개척하고 극단자유의 대표였던 이병복 무대미술가다. 한국 예술계에서 거장으로 평가받는 이들을 부모로 두고 살아간 삶은 어떠했을까. ‘피는 못 속인다’라는 말이 불변의 진리인 듯, 그들의 딸 역시 조각가이자 화가의 길을 걸어 나갔다.

인터뷰 전, 권이나 작가의 작품을 먼저 찾아보며 얼핏 권옥연 작가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색감들을 찾은 듯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터뷰 당일, 함께 취재를 나간 김재성 사진작가는 이병복 선생의 인물 사진을 보고선 기자에게 “저 분, 권이나 작가님 아니었나요?”라고 묻기도 했다. 권 작가에게선 권옥연 선생의 기운도 이병복 선생의 기운도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 예술계 거장들 슬하에서 자란 자신의 유년 시절을 풀어내고, 자신의 작품관을 강직하게 표현하는 모습은 ‘권이나’라는 사람 그 자체였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권이나 작가는 한국에 올 때면 현재 동생이 살고 있는 이병복 무대미술가의 집에서 머문다 ⓒ김재성 작가
▲프랑스에 거주하는 권이나 작가는 한국에 올 때면 현재 동생이 살고 있는 이병복 무대미술가의 집에서 머문다 ⓒ김재성 작가

인터뷰가 끝나고 권 작가는 이은영 발행인에게 한 편의 메일을 보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서, 후련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느낌이었어요”라는 문장이 담긴 안부와 함께, 프랑스에서 진행하고 있는 전시 소식을 전했다. 파리문화원 《소나무협회30주년 기념전》에 <태극기>, <미루나무와 사형수>를 출품하고, 지난 16일부터는 프랑스 beaubourg 갤러리 그룹전에 브론즈 흉상을 전시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내년 2월에는 <산>이라는 작품을 완성해 프랑스 그랑 빨레에 전시한다는 계획도 알렸다. 최근 접한 중국 현대작가 펭젠밍의 소설 「그 산, 그 개, 그 사람」에서 시작한 작품으로 지금도 열심히 작업 중이란 소식도 전했다.

이와 함께 권 작가는 이병복 미술가의 병구완을 하며 작성했던 글 <제망모가: 어미의 환상>도 보내줬다. 예민한 성정의 이 선생 곁을 머무르며 작성했던 글 곳곳에는 엄마에 대한 서운함도 한껏 담겨있었고, 또 자식 된 도리를 하지 못했다는 후회 역시 담겨있었다. 예술계의 거장들의 시간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또한 한 명 한 명의 사람이었고, 가족이란 연으로 얽혀있는 생을 살았었다. 이 인터뷰에는 그간 우리가 알지 못했던 거장들의 일상과 그 속에서 살아 온 한 예술가의 성장과 다짐이 담겼다.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는 자주 들어오지 않는 것 같은데, 이번엔 어떤 이슈가 있어 들어왔는지.

최근에 개인 웹페이지를 만들었다. 주소는 ‘ina-kwon.com’이다. 나는 외골수로 작업만 하고, 특별히 나를 드러낸 적이 드물었다. 그런데, 웹페이지 작업을 하면서 카탈로그 같은 책 작업을 한번 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빳빳한 종이로 만들어서 무게만 무겁고, 사람들 손이 잘 가지 않는 작품집이 아닌 사람들이 자주 보고 만질 수 있는 책으로 만들고 싶었다. 한국에 와서 이런 내 생각을 지인들에게 전했는데, 반응들이 좋지 않았다. 잘 팔리지 않는 책은 출판사에서 내주지 않을 것이라 해서 많이 상심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좋은 소식이 있었다. 카탈로그 작업을 도와주시겠다는 분이 나타나서, 프랑스에 가서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수필가로도 활동하시는 걸로 알고 있다.

나는 글 쓰는 작가는 아니다. 밤마다 쉽게 잠들지 못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철학서적을 읽다보면 재밌는 것이 많고, 생각이 점점 뻗어나가 하고 싶은 얘기들이 많이 생겼다. 그래서 가끔씩 글을 썼고, 우연한 기회로 수필을 연재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권이나 작가와 이은영 발행인이 권 작가가 출간한 책을 함께 보고있다 ⓒ김재성 작가
▲권이나 작가와 이은영 발행인이 권 작가가 출간한 책을 함께 보고있다 ⓒ김재성 작가

서울예대 드라마센터에서 무대미술까지 전공했지만, 치료 때문에 프랑스로 떠나야만 했다고 알고 있다.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이화여중에 다닐 때였다. 뇌 신경계에 문제가 생겨서, 어디서든 갑자기 쓰러질 수 있는 불치병에 걸리게 됐다. 프랑스에는 특별히 공부하러 간 것이 아니라, 의사를 만나러 갔다. 프랑스로 이주하고서는 파리 국립미술학교 에꼴드 보자르에 들어가, 8,9년 정도 공부를 했다. 사실 ‘일’을 했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조각을 공부했는데, 흙과 석고만 있으면 학교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때였다. 학업은 중요치 않았고, 전시가 정말 중요해서 항상 작업에 매진했다. 조각은 그림과 달리 그냥 시작할 수 없다. 흙을 만지기 전에 석고를 떠야 하고, 석고는 몇 십 킬로가 되기 때문에 작업과정이 노동하는 것과 비슷했다. 학생들 간 경쟁이 치열했고, 그만큼 선배들 사이에서 많이 배웠다.

파리에서 학교를 다니며 얻게 된 가장 큰 경험은 세자르 선생님을 만난 것이었다. 세자르 선생님께 총애를 받았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은 내 작품에는 손을 대지 않으며 “이나, 네 흙은 내가 만지면 이상해져”라고 얘기했다. 선생님은 항상 “조각은 이나 너처럼 해야 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세자르 선생님은 내 조각의 무기가 ‘할 줄 모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선생님을 따라 석고를 뜨고 공부하면서 참 많은 시너지를 경험한 시간을 보냈다.

김종근 미술평론가 글을 보면, ‘그림이란 견딜 수 없어 받아들인 숙명적인 어떤 것’이라는 작가의 고백이 있다. 미술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치사한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른 작가들을 그림에 대한 어떤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시작했을 것인데,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서 흙을 만졌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공부를 참 잘하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이화여중에 딱 들어가자마자 병이 생겼다. 당시 의사는 “뇌신경에 문제가 있어서, 이 아이는 정상적인 학업을 지속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학교를 갈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우리 엄마는 “얘는 학교를 못가면 콤플렉스가 생겨서 아마 죽어버릴 것”이라며 아주 큰 지프차를 하나 사서 매일 학교에 데려다 줬다. 6년 동안 끔찍한 시간을 보냈다. 약을 먹으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어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잠에 빠지곤 했다. 약이 발작 제어를 하기 때문에 그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었고 들을 수도 없었다. 친구도 없었다. 특히 여학생들은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까지 따라오면서 꺄르륵거리고 웃는 모습들이 너무나 싫었고 한편으론 부러웠다. 당시 내 일상은 비둘기를 바라보고, 책을 보고, 하늘을 바라보는 게 전부인 시기였다.

몸이 힘드니까, 공부도 정말 하기 싫었다. 그래서 아버지께 투덜거리니 “그래, 그것도 학교냐, 너희 선생도 선생 아니다. 가서 배울 것도 없으니 가지 마라”라고 답을 줬다. 사실 그건 가슴이 아파서 자식 듣기 좋으라고 해준 말인데, 철없던 나는 그걸 곧이곧대로 들었다. (웃음)

그 이후에 권진규 선생님이 우리 집에 찾아와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간 적이 있었다. 가까운 친척은 아니었지만, 어느 날 아버지가 권진규 선생님한테 가서 한 번 배워보라는 얘기를 했다.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가서 흙을 만지며 베토벤 얼굴, 다비드 상, 내 얼굴을 막 만들었다. 이후엔 선생님과 함께 작업하면서, 선생님이 내 조각을 조각도로 고쳐준 것을 보고 공부 했다. 항상 선생님은 내게 “이나는 감정적이면 안 돼, 감정에 너무 치우치지 마”라고 얘기해주곤 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인터뷰 질문을 듣고있는 권이나 작가 ⓒ김재성 작가
▲인터뷰 질문을 듣고있는 권이나 작가 ⓒ김재성 작가

아버지는 이름난 서양화가인 권옥연 선생, 어머니 또한 이병복 무대 미술가였다. 한국 미술계 거장과 연극계 1세대 작가 자식으로 살아온 경험은 색달랐을 것 같다.

내 세계는 보통사람들의 삶과 달랐다. 나는 아버지를 가장 잘 알고, 가장 친하고 잘 통했던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초상화 작업을 하면서 작품을 가장 비싼 값에 많이 팔고, 모든 영광을 누리신 분이었다. 아버지의 작품은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고, 예쁜 작품이었다. 나는 이런 아버지의 고독했던 세계를 기억하고 있다. 작품이 잘 팔리면서, 너무 뜨기 시작하니까 아버지는 어느 순간 겁을 먹고 “내가 잘못 되고 있구나”를 느끼셨다. 그것을 나도 함께 느꼈다. 그래서 아버지는 내가 본인 아틀리에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고, 가끔은 “나는 이나가 너무 무서워”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작을 하게 되면 작가는 가라앉는 것 같다. 아버지 스스로 본인을 잘 알았고, 나중에는 굉장히 고독하게 끝내셨다.

어머니도 허점을 갖고 계신 분이었다. 어마어마한 업적을 이룬 저변에는 피, 땀, 눈물이 있었다. 어머니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큰 업적을 이루고, 꼿꼿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갔다는 것은 결국 어머니 앞에 아무도 없었다는 얘기이기도하다. 나는 어머니 뒤의 그늘, 정서의 불안정들을 봤다. 그래서 큰 아들에게 그렇게 많이 의지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빠 얘기도 안 할 수 없다. 부모님이 없었던(두 분이 함께 프랑스 유학을 떠난 시기) 4년 동안 오빠는 어머니를 참 미워했다. 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면, 오빠는 나를 붙들고 울면서 “내 동생이 이런 병이 걸린 것은 엄마 때문이야”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어머니가 없으면 밥을 안 먹으려했고, 내 앞에서도 “이나야 나는 엄마, 아빠가 싫어. 어떻게 자식을 그렇게 내팽개치고 4년 동안 사라질 수 있어”라고 말하곤 했다. 그래도 나는 오빠라는 바람막이가 있었기에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Priest Abbe 신부, 2008, oil on canvas ⓒ김재성 작가
▲Priest Abbe 신부, 2008, oil on canvas ⓒ김재성 작가

그래도, 권옥연 선생은 간송 선생의 영향을 받아서 문화재를 돌보는 일도 하시고 이병복 선생 덕에 주위에 사람이 많이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겉에서 보기엔 그럴 수 있지만, 나는 아버지의 내면도 기억하고 싶다. 다작을 하면서 스스로 침체기를 겪었던 작가의 마지막도 아버지의 한 모습이었다. 얼마 전, 모 평론가가 ‘호랑이 육포를 먹으며 성장했다’는 표현을 한,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정리한 글을 본 적이 있었다. 맘이 좋지 않았다. 그의 가장 외롭고 고독했던 시기의 세계는 담아내지 않고 잘난 체 하는 아버지의 썰과 같은 이야기와 즐거움이 넘치는 아버지만 기억되는 것이 많이 싫다. 마지막에 얼마나 노쇠하게 떠났는지도 사람들이 기억해주길 바란다.

어쩌다보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록을 내가 다 가지고 있다. 1957년 파리에서 아버지가 보낸 엽서라든지, 박수근 선생과 나눈 서신들도 가지고 있다. 내 바람이 있다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든 업적과 생애를 기록하는 작업을 한 번 해보고 싶다. 예전에 한 번 어머니의 업적을 정리하고자 하는 작업을 한다고 연락이 온 적이 있었다. 너무 반가웠고, 좋은 책을 작업해줬다.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어머니의 연혁이었다. 천석꾼, 만석꾼의 자제로 태어났다는 것을 시작으로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죽 나열한 글은 진정한 연혁이 아니었다. 먹어본 놈이 맛을 잘 낸다고, 어머니가 천석꾼, 만석꾼 자제로 태어났기에 그러한 무대들을 꾸밀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연혁에 포함되지 않는 어머니의 삶도 있다. 삶은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권옥연 선생과 이병복 무대 미술가를 얘기하면, 남양주에 기증한 금곡의 ‘궁(宮)집’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중학교 2학년 때 찍은 사진에 궁집이 남아있다. 그 때 아버지가 내게 “이 집은 말이야, 조선시대 어느 왕이 가장 사랑하는 딸을 위해 지은 집이야”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그 왕이 영조인지도 몰랐고 화길옹주의 집인 줄도 몰랐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림 판 돈으로 나무를 심고 집을 가꿨다. 궁집은 두 분의 환상이었고, 꿈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돈이 들었다. 밑빠진 독에 물 붓기인지도 몰랐다.

사실 동생과 나에게 금곡의 그 집은 짐이었다. 동생은 가끔 ‘금곡’이라는 지명만 들어도 “누나, 나 오늘 혈압 올라서 잠 못 자”라고 얘기하곤 한다. 부모님의 꿈을 자식이 이뤄줄 수 있다. 하지만, 부모님 대의 꿈은 그 때에 정리해야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그 곳을 공원처럼 가꿔서 그 지역 사람들이 잘 사용해주길 바란다. 그 곳에 권옥연과 이병복의 피, 땀, 눈물이 서려있다. 그걸 조금이라도 알아준다면 좋을 것 같다.

국내 전시가 드물었던 것 같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국내에서도 꽤 많은 전시를 열었다. 마니프(MANIF)에 출품하기도 했고, 박영덕 갤러리에서도 전시를 했다. 일일이 다 기록하진 않았지만, 많이 했고 국내에서도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런데, 이 호응이 곧장 상업성이랑 연결되진 않는다. 그래서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이 미술계에서 조금 특수한 계열에 포함되는 것 같다. 일단, 내가 그림 그리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신체적으로 핸디캡이 있다 보니, 강박이나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참 많이 떨린다. 실수를 하면 어떡하나, 갑자기 아프지 않을까 두려워하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기도 한다. 사람들의 시선이나 얘기가 예민한 내게는 너무 강하게 다가오고, 그래서 항상 물러서 있었다.

또, 내 작품을 보면 알겠지만 상업성이 없다. 가끔 작가로서 자격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작품은 화랑에서 쉽게 판매할 수 없는 그림이다. 지인들은 내게 “네 그림은 집에 걸 수 없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뮤지엄으로 바로 들어가야 하는 그림이라고 말하는데, 나 또한 그렇게 느낀다. <신부>라는 작품이 있다. 신부 얼굴을 그린 작품인데, 가끔은 그 섬뜩함이 나한테 느껴질 때도 있다. 개인들에게 판매를 하기도 했지만 막 걸 수 있는 그림도 아니고, 막 팔 수 있는 그림도 아니다. 체력 때문에 다작을 하지 못하고 자존으로 작업을 해오고 있다. 그래도 양심적으로 작업했다는 사실을 남기고 싶다.

▲답변을 하던 중 생각에 잠긴 권이나 작가 ⓒ김재성 작가
▲답변을 하던 중 생각에 잠긴 권이나 작가 ⓒ김재성 작가

아름답고 평온한 일상보다, 일상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뾰족한 불안과 갑작스러운 우울을 깊이 있게 압축해놓은 듯하다. 조각가에서 화폭을 채워나가는 행위로의 변화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가.

조각을 하기 위해서는 물질을 해야 한다. 프랑스에서 결혼을 하고 이사를 했는데, 근처에 밭이 있어서 아파트 지하에서 물질을 할 수 있었다. 그 공간을 내 작업실로 삼아 작업을 했다. 그런데 지하다보니 광선이 들어오는 곳이 없었고, 물질을 할 수 있다는 것 이외에 아쉬운 점이 많은 공간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작업을 하는데, 어느 날부턴가 작업을 시작하면 갑자기 뒤에서 칼을 든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쫓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공간이 무서워서 얼른 지상에 있는 집으로 올라왔고, 조각을 할 수 없어서 손을 놀리다보니 그림을 시작하게 됐다. 나는 회화를 배워본 적이 없어서 정통적인 방법은 알지 못한다. 아직도 뭘 섞어야 하는지 모르고, 테크닉도 없다. 조각도를 들고 캔버스 앞에 앉아서 작업을 했다.

한 번은 내가 그린 그림들을 모아서 아버지께 보낸 적이 있었다. 동생이 그때 일화를 전해줬다. 아버지가 내 그림을 펼쳐두고 보더니 “얘는 미쳤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동생은 그때 아버지께 “아버지 그림은 그게 그림이야? 똑같은 들창코 10개 넣어서 똑같이 그리면서, 나는 누나가 더 아티스트 같은데? 누나가 그런 말 들으면 얼마나 마음이 안 좋겠어?”라고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동생을 막 타일렀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미쳤다’라는 의미가 무엇이었을지,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지 궁금하다.

2020년 작품 <태극기/Drapeau>가 인상적이다. 4년 간 계속 고민했고, 계속 놓쳤다고 했다. 유난히 힘든 작품이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한국에서 학교를 잘 다니지 못해서 역사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애들을 다 키우고 나서 인터넷을 배웠고, 글을 쓰다 보니 조국이 그리워서 몇 년 전부터 한국 역사를 배우게 됐다. 역사 공부를 시작하고 처음 접한 것이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였다. 그 일지에서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다. 김구 선생은 “나는 배운 게 없어서 큰 인물은 못 되지만 그래도 내가 이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라며 동네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데, 공부를 가르치려 부른 아이들인데 정작 그 시간에 아이들 머리를 빗겨주느라 수업을 못했다고 한다. 아이들 머리에는 이가 바글바글했고, 당시 부모들은 아이들의 머리를 빗겨줄 시간도 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화를 읽고 나니, 너무나 아름답고 공감이 갔다. 김구 선생 옆에 있고 싶었고, 나도 그 마음을 이어가보고 싶었다.

백범 일지를 읽으면서 서대문 형무소에 대해 알게 됐다. 그리고 그 곳에 있는 미루나무 한그루와 아주 자세히 들여다봐야지만 태극기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흔적이 남겨진 사진을 보게 됐다. 그 미루나무는 애국선열들이 사형당하는 곳 바로 앞에 있었다. 100년 전에 심겨진 나무인데도, 그 나무는 자라지 않고 있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나라를 지키다 일제치하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의 한이 서리고 서려서 그렇게 됐지 않았을까 싶었다. 나무가 우리 민족의 한 그 자체라고 봤다. 이런 과정 속에서 나는 먼저 ‘미루나무와 사형수와 태극기’라는 글을 창작했었다. 그런데, 글을 쓰고 보니까 태극기를 그리고 싶었다.

▲태극기 Drapeau, 2020 (사진=권이나 작가 제공)
▲태극기 Drapeau, 2020 (사진=권이나 작가 제공)

정말 어려웠다. 120호 캔버스를 사서 시작하려하는 데 쉽지 않았다. 어디에다가 사괘를 그려야 할지, 빨강이 위인지 아래인지 어디에 넣어야 하는지 정말 어려웠다. 김구 선생 생전의 태극기란 장 속에 넣어두고 감춰보는 것이었고, 어디에 매달려 있다기보다 땅바닥 위에 짓밟히고 굴러다니는 형태였다. 그때에는 태극기를 손에 들면 손목까지 자르는 시대였다고 한다.

첫 작품은 태극기를 도저히 표현할 수 없어서 미루나무와 사형수만 표현했는데, 완성하고 보니 사형수의 얼굴도 사라져있었다. 미루나무인 것도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 이후에 또 다시 도전했을 때는, 어머니가 참 많이 힘드셨을 때였다. 작품을 준비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태극기에서 시작한 그림은 어머니의 초상이 됐었다. 그리고, 또 준비했는데 그 해가 하필이면 3ㆍ1운동 100주기의 해였다. 그 때 태극기로부터 시작해 완성한 작품이 ‘유관순’이었다. 파리 그랑빨레에서 전시를 했고, 영어로 ‘류관순’이라고 제목을 적어두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에 캔버스 앞에 섰다. 2월에 전시는 예정돼 있는 상황이었고 ‘이거 몇 년 째 이러고 있냐, 너도 작가냐, 한 번 해보자’ 이런 마음으로 캔버스를 붙들었다. 빨간색을 그리고, 파란색을 칠했다. 그런데, 내 그림을 아들의 중국인 친구가 와서 보더니 “이거 펩시 아닌가요?”라는 것이다. 놀란 마음에 그때부터 빨간색, 파란색을 막 지우고 그 위에 목탄을 문지르고 스프레이를 뿌려서 고정시키고 작품을 완성했다. 전시 개막 바로 전날까지 두 개의 작품을 가지고 고민했다. 전시 개막 전 날 작품을 걸고 돌아서는 순간까지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 전시장에 걸린 내 작품을 보는 순간에 눈물이 났고, 스스로 박수를 쳤다. 그 감격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 작품을 보고 아무도 태극기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한테만큼은 태극기였고 내 마음 속의 태극기였다. 사실 우리 민족의 한이 서려있는 태극기는 어떻게 생긴 것인지 모른다. 걸려있는지. 떨어져있는지, 빨강과 파랑이 어디에 배치돼있는지. 태극기에 눌려있던 민족의 한을 표현하고자 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내 <태극기>작품을 국가에서 사줬으면 하는 꿈이 있다.

앞으로 어떤 작가로 나아가고 싶은가.

그냥 스쳐지나가는 그림이 아닌, 보는 이에게 무언가를 전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가끔 수필 작업도 하고 있는데, 글을 쓸 때는 가장 간결하고 복잡하지 않은 언어로 모두가 읽을 수 있는 글을 창작하고 싶고, 그림에 있어서는 진심이 담기고 정이 가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이자 지금 시대에 가장 가까이 서있는 작품을 지속해나가고 싶다. 영원히 못할 수도 있지만 (웃음) 어느 날 훗날 세상이 내 그림을 인정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내 자신에 대한 확신, 자존심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작가의 일이다. 언제나, 지난번에 했던 것보다 나은 것, 가장 내 맘에 드는 것, ‘짱’인 것, 내 맘에 드는 작품을 해나가고 싶다.